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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빠 어렸을 적에] 오빠야. 내 딱지 돌려내놔. 엉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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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봄, 광릉수목원에 갔다가 인근의 한 식당에 들러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40대 초·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들이 길 건너 슈퍼 앞에서 딱지치기를 하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오, 사각 모양으로 단단하게 접힌 일명 ‘방석딱지’를 다시 본 게 얼마만의 일이었는지. 제법 크고 두툼한 것이, 야무지게 잘 만든 딱지들이었다. 어쨌든 왕복 2차선의 좁은 도로라고는 해도, 버스까지 다니는 한 길가에서 초등학생들도 아니고 다 큰 어른들이 딱지치기를 하다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스멀스멀 재미가 피어올랐다.

곁에는 막걸리 두세 병과 종이컵들도 놓여 있었다. 건장한 사내 다섯이 그 정도 막걸리 양에 취할 리도 없겠지만, 그들의 소란함과 즐거움이 술기운에서 비롯된 성질의 것이 아님은 분명해 보였다. 키큰 사내 하나가 긴 팔을 휘둘러 ‘배꼽치기(위에서 아래로 딱지를 내리치는 것)’를 한다. 너무 중심 쪽에 맞았나 보다. 바닥에 놓인 딱지 한 귀퉁이가 잠시 벌떡 일어서는 듯하더니, 이내 털썩 하며 그대로 땅에 드러눕는다. ''쳇'' 하는 표정으로 그가 종이컵 한 잔을 벌컥 비운다. 막걸리가 싫은 게 아니다. 벌칙과 놀림이 싫은 게다. 나머지 사내들이 좋다고 웃는다.

"여긴 어른들도 딱지를 치시네요. 재미있어 보여요."
마침 반찬과 찌개를 들고 오신 주인할머니께 말을 건넸다.

"그러게. 쟤네는 아주 쬐깐한 꼬맹이 적부터 한 동네서 같이 자라, 같은 학교 다녀, 군대랑 결혼 빼고 늘 같이 살았어. 그니까 애 아범들 된 저 나이에도 일 끝나면 모여 저러고 놀지. 저 장난꾸러기들이 딱지치기만 할까. 윷놀이, 제기차기, 아주 뭐 바꿔 가며 잘도 놀아. 시골이라 놀 게 뭐 있어야지. 그래도 어디 가서 사고나 치고, 숨어서 도박이나 하는 거보다야 백 번 낫잖아. 우리 마을 애들이 참 착해. 응, 서로들 친형제처럼 그리 지내더라고."

밥 한 술 뜨려는데, 스포츠머리를 한 사내의 힘찬 ''발대기(한쪽 발을 딱지 바로 옆에 대고 치는 것)''에 딱지가 훌러덩 하고 뒤집어졌다. 기가 막힌 한 방이었다. 이번에는 야구모자 쓴 사내 하나만 빼고, 다들 ''옳다구나'' 신이 났다. 스포츠머리가 야구 모자에게 얼른 새로운 딱지를 깔라고 재촉을 해댔다. 대신 야구 모자는 슈퍼 입구에 세워져 있던 빗자루로 콘크리트 바닥을 싹싹 쓸어댔다. 딱지가 잘 뒤집히지 않으려면 바닥이 평평해야 좋으니까. 스포츠머리가 연속 강타를 날렸다. 웃는 게 웃는 것이 아닌 야구 모자와 곁에서 약 올리는 다른 네 명의 사내들의 모습이 예전에 어디선가 많이 본 장면이다.

딱지는 종이가 점차 널리 보급되었던 1940년대부터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러다 6.25전쟁을 치른 후 두껍고 질긴 종이가 나오면서 접는 딱지가 보편화되었고, 아이들의 대표 놀이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어릴 때 제일 흔히 놀아본 딱지놀이 방식은 ''넘겨먹기''였다. 쳐서 뒤집어진 딱지는 뒤집은 사람이 따먹고, 뒤집지 못하면 다음 순서로 넘어간다. 이 과정에서 친 딱지가 상대 딱지의 밑으로 들어가면 이기고, 위로 올라가면 진다. ''밀어내기''도 있다. 땅에 커다란 원을 그려 놓고 상대의 딱지를 쳐서 말 그대로 원 밖으로 밀어내면 이긴 다. ''날려먹기''는 더 간단하다. 딱지를 가장 멀리 던지는 사람이 상대의 딱지를 따먹는다.

규칙은 간단했지만, 어깨나 손목의 순간적인 힘 조절은 도저히 남자애들을 따라갈 수 가 없었다.그래도 딱지 만들기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버리는 달력이나 과자 상자는 덕분에 족족 내 차지였다. 잠깐 사이면 다잃을 딱지를 고집스레 접었던 건, 동네 딱지대장 성호 오빠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었다. ''여자애가 무슨 딱지냐''며 비아냥대면서도 수십, 아니 수백 장도 넘게 따간 내 딱지만큼은 단 한 장도 물러준 적이 없는 얄미운 오빠였다. 하루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집에 있는 1년 치 달력을 모조리 뜯어내 딱지를 접은 다음, 남자애들이 모이는 공터로 길을 나섰다. 또 백전백패. 나름의 설움(?)에 북받쳐 울음이 터졌다. 엄마한테 혼날 일을 생각하면 겁도 났다.


"내 딱지 내놔. 나 이제 집에서 큰일 났단 말이야. 엉엉."

이후 성호 오빠는 편먹기 할 때만 나를 끼워주었다. 그것도 늘 자기편에 말이다. 평발에 약골이었던 나는 딱지치기놀이가, 동네에서 딱지 제일 잘 치는 성호 오빠가, 참 좋았다. 게임이 다 끝난 모양이다. 다섯 명의 사내들이 하나 둘씩 주변을 정리하더니 우르르 슈퍼 옆 삼겹살집으로 들어간다. 막걸리 몇 모금으로 식전 술을 삼고, 딱지치기로 흥을 돋우었으니, 그들의 저녁 식사 또한 꿀맛이었을 것이다. 승패를 떠나, 평생을 한 동네에서 형제처럼 자라온 그들이라니 누가 음식 값을 내었던 조금도 아깝지 않았을 것이다. 나만 그런가. 예전처럼 깔깔거리며 제대로 놀아보고 싶은 마음은 지금도 굴뚝같지만, 일에 치여 놀 시간이 없다는 둥, 나이 드니 노는 방법도 잃어버렸다는 둥 습관처럼 핑계를 대고 산다. 정작 잊고 산 건 놀이 특유의 건강한 에너지였는데도 말이다. 진실로 부러워 흉내라도 내보고 싶다. 다 큰 어른 다섯이 한날 한자리에서 한마음으로 뿜어내던, 아이보다 더 아이들 같은 그 천진난만한 웃음들을.



배선아
칼럼리스트, 방송자가, 여행· 인터뷰 전문기자로 글을 써왔다. 종로구 동의동에서 태어나 그곳에 27년을 머물렀다.





글 배선아 일러스트 어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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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빠 어렸을 적에] 오빠야. 내 딱지 돌려내놔. 엉엉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원본시스템 서울사랑 제공부서 시민소통담당관
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16-07-19
관리번호 D0000028036863 분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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