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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문화유산 답사] 한국식 연와조 고딕 양식이 돋보이는 뾰족집, 명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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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에 준공한 명동성당은 한국 가톨릭의 상징이자 총본산이다. 고딕 양식의 정수인 석조가 아니라, 한국식 연와조로 지은 우리나라 유일의 순수한 고딕 양식 건축물로 가치가 높다. 준공 당시 뾰족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장안의 명물이었다고 한다.



 명동 언덕배기에 우뚝 서서 고딕건축의 장중함과 위용을 자랑하는 명동성당은 한국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성당이다. 프랑스 신부 코스트가 설계해 1898년에 준공한 한국 천주교를 대표하는 교회당 건물로 1977년 11월 22일 사적 제258호로 지정되었다. 종현성당, 명동천주교당이라고도 하며 한국 가톨릭의 상징이자 총본산이다.

명동성당이 위치한 지역은 조선 시대 명례방에 속해 있었다. 명례방은 천주교 신앙이 유입된 이후 천주교 신도들의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곳으로, 이승훈이 세례를 주었고 신앙 집회를 열었다. 1830년 이후에는 선교사들이 비밀리에 선교 활동을 하던 중심지였으며, 1845년 귀국한 김대건 신부가 활동하기도 했다.

현 명동성당 터는 조선 시대 판서를 지낸 윤정현의 저택이 있던 곳으로, 바깥채만 60여 칸이 되는 큰 한옥이었다. 1882년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종교의 자유가 어느 정도 허용되자 당시 교구장이던 주교 블랑이 성당 부지로 이곳을 매입해 종현 본당을 설립, 성당 건립을 추진했다. 그러나 1888년 조선 정부는 이곳이 열왕의 영정을 모신 영회전의 주맥에 해당하는 곳으로, 영회전을 내려다보는 지역이라 건축을 할 수 없다는 풍수적 이유를 들어 건립 중지와 토지소유권 포기를 요청했다. 이 분쟁은 1890년까지 계속되다가 프랑스 공사관의 노력으로 토지소유권이 천주교 측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 후 1892년에 착공해 6년 만인 1898년에 준공했다.



박해 속에서 성장한 한국 천주교의 상징

설계와 공사 감독은 신부 코스트가 직접 맡았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양옥 건축 기술자가 없었으므로 벽돌공·미장이·목수 등을 중국에서 데려다가 일을 맡겼고, 도중에 재정난과 청일전쟁으로 공사를 한때 중단하기도 했다.

1896년 벽체 공사가 끝날 무렵 설계와 감독을 맡은 코스트가 죽자, 잠시 공사를 중단했다가 코스트 신부를 돕던 위돌박 신부가 일부 설계를 변경하고 공사를 감독해 드디어 준공했다. 특히 실내 건축은 대부분 위돌박 신부가 마무리했다. 그는 1913년 명동성당의 여학교를 설계·감독했으며, 코스트 이후 한국에서 가장 많은 천주교 건물을 설계한 신부로 알려져 있다.

1898년 5월 29일에 준공식을 한 명동성당은 ‘뾰족집’이라는 이름으로 장안의 명물이 되어 매일 많은 구경꾼이 몰려왔다고 한다.

명동성당의 평면은 라틴 십자형 삼랑식(三廊式)이나 건축양식은 고딕 양식의 정수인 석조가 아니고 연와조다. 따라서 고딕 양식의 장중함은 덜하지만 우리나라 유일의 순수한 고딕 양식 건축물로 가치가 높다. 또 성당 건립 과정에 무보수로 공사에 참여하거나 헌금을 한 조선인 신도 1천여 명과 조선에서 사역한 선교사 명단을 이 성당의 머릿돌과 함께 묻었다.

이 건물의 준공은 박해와 성장으로 점철된 천주교 유입 200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출발을 다지는 의미가 있다.


명동성당 관람 정보

● 위치 : 서울시 중구 명동길 74(명동2가)
● 관람 시간 : 화요일~일요일 오전 9시~오후 9시, 토요일 오전 9시~오후 8시
● 휴무일 : 매주 월요일
● 문의 : 02-774-1784트가



글 이정은 사진 문덕관, 홍하얀 자료 제공 서울시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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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문화유산 답사] 한국식 연와조 고딕 양식이 돋보이는 뾰족집, 명동성당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원본시스템 서울사랑 제공부서 시민소통담당관
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1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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