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사랑

[서울의 소울] 온갖 이야기가 흐르는 아름다운 미로,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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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정여울의 서울은 365일 아름다운 이야기가 흐르는 미로다.
그는 서울을 걷고 또 걸으며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기쁨을 느낀다.

작가 크리스토퍼 몰리는 말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아름다움의 진동에 반응하는 비밀스러운 신경이 있다”라고. 서울은 아름다움의 진동에 반응하는 내 비밀스러운 신경을 유난히 강렬하게 건드리는 도시다. 서울을 떠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결코 떠날 수가 없다. 복잡한 교통이나 비싼 물가를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떠나야 할 것 같은데, 서울은 멈출 수 없는 매력으로 내 신경과 무의식 곳곳을 건드린다. 휘황찬란한 야경과 드높은 건물들도 저마다 늠름한 위용을 자랑하지만, 어른이 되어 비로소 서울을 사랑하게 된 나에게 진정 소중한 것은 ‘오랜 이야기를 품은 장소들’이다. 내게 그 첫 번째 이야기는 윤동주의 시와 생애다.

윤동주의 시와 함께 걷는 길

청년 윤동주는 누상동 9번지 하숙집에서 살았다. 윤동주는 아침마다 누상동 9번지 하숙집을 나와 인왕산 중턱까지 올랐을 것이다. 연희전문학교를 다니던 시절, 그는 인왕산 중턱까지 산책하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름다운 시어들을 매만졌을 것이다. 수성동 계곡에서 탁족을 하거나 세수를 하기도 하지 않았을까.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로 나가 금천교시장을 거쳐 필운대로를 지나면 윤동주문학관(청운동)에 다다를 수 있다. 그곳으로 가는 길 자체가 서촌의 매력을 듬뿍 느낄 수 있는 볼거리로 가득하다.

윤동주문학관은 그의 요람에서 무덤까지,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온갖 ‘시인의 흔적’을 담고 있다. 윤동주의 작품 중 1941년에 쓴 ‘무서운 시간’이 있다.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한 번도 손들어보지 못한 나를/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나를 부르는 것이오.//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나를 부르지 마오.” 청년 윤동주는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것마저 부끄러웠나 보다. 자신을 부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가 이 사회에 속한다는 뜻인데, 그는 이 사회에 속한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던 것이 아닐까.

그는 하늘 아래 자신을 받아줄 곳이 없다고 생각하며 괴로워했지만, 그의 시는 온 세상의 아프고 외로운 사람들을 보듬는 너른 품으로 우리를 눈물겹게 한다. 그는 이 세상의 환대를 받지 못했지만, 그의 시는 끝내 살아남아 우리 모두를 뜨겁게 환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윤동주가 이토록 괴로워했다는 사실이 우리의 가슴을 여전히 아프게 한다. 그가 자신을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도 없는 나’로 표현했다는 것이 못내 가슴 아프다. 모든 길이 막혀 있을 때, 단 하나 아주 희미하게 뚫려 있는 자유의 틈새가 그에게는 바로 글쓰기가 아니었을까. 일제 당국의 검열이 있긴 했지만, 골방에 앉아서 글을 쓰는 비밀스러운 청년의 열정까지 막지는 못했을 테니까. 나는 윤동주문학관에서 그의 슬픔과 희망, 그의 눈물과 미소를 본다. 매일 아침 누상동 9번지에서 나와 인왕산을 오르며 산책했을 윤동주의 하루하루를 상상해본다. 그의 시와 함께 걷고, 그의 미소와 함께 걷는 서울을 변함없이 사랑하게 된다.

옛 시대로 돌아가고 싶을 땐 창덕궁으로

창덕궁의 사계절이 모두 아름답지만, 한겨울의 창덕궁은 더욱 특별한 정취로 우리를 초대한다. 창덕궁은 언제라도 좋지만,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창덕궁을 걷는 것은 인생에 꼭 한 번은 경험해봐야 할 기쁨이다. 눈 오는 겨울, 나는 창덕궁 투어를 신청했다. 그 추운 겨울날 궁궐 깊은 곳까지 구석구석 엿볼 수 있는 창덕궁 투어에 참여한 외국인이 매우 많아서 자랑스러운 느낌까지 들었다. 한겨울에도 이렇게 궁의 위엄과 옛사람들의 비밀스러운 온기를 간직하고 있는 궁궐 구석구석이 신비로운 느낌, 경외감을 자아냈다. 새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궁궐의 구석구석은 비밀을 품은 이야기의 방들로 가득한 거대한 미로처럼 다가왔다. 한겨울의 추위를 깡그리 잊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문득 서울 한복판에서 옛 시대를 향한 타임머신을 타고 싶을 때 나는 창덕궁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누리는 완벽한 하루

삼청로 국립현대미술관은 나의 힐링 스페이스다. 나는 힘들 때마다 이곳에 가서 그림을 감상하기도 하고,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서울의 낮 풍경을 바라보기도 한다. 너무 바빠서 이곳까지 갈 시간이 없을 때는 휴대폰에 저장해둔 국립현대미술관의 사진을 찾아본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미술관 입구로 나올 때 마치 새로운 세계를 향한 비밀스러운 입장권을 따낸 기분이다. 마치 건물 자체가 거대하고도 완벽한 액자가 되어 북악산을 가장 아름다운 프레임으로 감싸 보여주는 것 같다.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거나 책을 읽고, 카페에서 글을 쓰고, 내가 좋아하는 맛집 ‘밀과 보리’에서 보리밥 정식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코스가 ‘나의 완벽한 하루’의 밑그림이다. 일상과 예술, 휴식과 놀이가 완전한 하나가 되는 듯한 기쁨을 선물하는 장소, 그곳이 나에게는 삼청로 국립현대미술관이다.

서울은 이렇게 365일 아름다운 이야기가 흐르는 미로처럼 다가온다. 서울을 걷고 또 걸으며 나는 내가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기쁨을 느낀다. 더 사랑받고 싶은 마음, 더 인정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괴로울 때마다 나는 홀로 서울의 거리 곳곳을 걸으며 내 마음에 쌓인 수많은 슬픔의 먼지를 털어냈다. 서울의 길을 걸을 때마다 마음이 깨끗해지는 느낌, 마음이 아주 산처럼 넓어지고 강처럼 깊어져서 내가 입은 상처나 괴로움은 어느새 아주 작아져버린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 아름답고 풍요로운 ‘서울의 넋’을 우리가 부디 오래오래 간직할 수 있기를.

서울의소울 기사이미지

창덕궁은 사계절 내내 저마다의 정취로 우리를 초대한다.

글. 정여울

<감수성 수업>, <문학이 필요한 시간>,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등의 에세이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
KBS라디오 ‘이다혜의 영화관 정여울의 도서관’ 진행자.
네이버 프리미엄콘텐츠 ‘살롱드뮤즈’ 연재. 네이버 오디오클립 ‘월간 정여울’ 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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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소울] 온갖 이야기가 흐르는 아름다운 미로, 서울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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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24-08-02
관리번호 D0000051367088 분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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