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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소울] 옥상, 서울의 영혼이 머물 미래의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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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오래된 도시는 ‘영혼’을 갖고 있다. 632년째 수도 역할을 하고 있는 서울 또한 도시 곳곳에 영혼이 깃들어 있고,
서울시민은 그 영혼을 느낀다. 이 젊은 건축 평론가는 도심 빌딩의 옥상을
서울의 영혼이 머물 미래의 장소라고 생각한다

군 복무 후 서울에서 살기 시작한 곳은 화양동의 옥탑방이었다. 건대에서 어린이대공원으로 향하는 언덕 끝에 자리한 그 집은 오래된 빌라의 전형적인 옥탑이었다. 외벽 일부에는 벽돌 무늬가 인쇄된 시트지가 붙여져 있었다. 변기에 앉으면 맞은편 벽에 무릎이 닿았고, 샤워기를 머리 위로 들면 천장에 부딪혔다. 여름엔 덥고 겨울에는 추운 데다 엘리베이터도 없이 5층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다. 그럼에도 버틸 만했던 것은 난간에 기대 길 위에서는 볼 수 없던 북쪽의 얕은 산과 주변의 굽이진 언덕 위로 깔린 도로와 집들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 덕분이었다.

빌딩 뒤로 가려진 영혼

학교에서 배우기를 여느 해외 도시들과 다른 서울의 정체성과 매력은 평지가 아닌 완만한 산세 위에 놓여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도심에서 일상을 보내며 그런 서울의 지형을 인식하거나 경험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주변에 온통 눈높이와 산봉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높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즈음 수강했던 한 수업에서는 한 차례 북악산에 올라 서울의 지형을 살펴보도록 했다. 힘들게 정상에 올라 내려다보니 조선 시대 광화문 육조거리에서 바라본 경복궁의 배후로 펼쳐진 북악산의 수평적 경관을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울에 높은 건물들이 없었던 시절에는 주변 산봉우리의 위치를 보고 행선지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었다는 어느 선생님의 말도 실감되었다.

사실 그것은 서울뿐 아니라 한국의 지형이 가진 보편적 특징이기도 하다. 일본이나 유럽의 일부 지역도 우리나라와 비슷한 수준의 산지 비율을 갖고 있다고 하지만, 대부분 오르기 험한 악산(惡山)으로 일반적인 생활공간과 엄격하게 구분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서울 같은 한국 도시들에 인접한 산기슭은 흔히 공원의 일부로, 산책로나 ‘산스장(산+헬스장)’으로 이용된다.

화양동의 옥탑방을 구한 것은 다른 지역에서 보낸 내 유년 시절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았다. 중학교 입학 즈음 살았던 그 집은 학교 정문에서 200m 정도 경사를 오르면 나타나는 빌라촌의 옥탑이었다. 학교와 집 사이에는 작은 동산이 있었는데, 지금은 근린공원으로 바뀌어 여러 체육 시설이 들어섰다. 여름밤, 친구들과 뒤편 아파트 주차장에서 놀던 중 경비 아저씨의 호통에 도망쳐서 낮 동안 달궈진 옥상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를 듣던 기억이 남아 있다. 많은 시민이 이와 비슷한, 동네 뒷산과 얽힌 다른 지역에서의 기억을 갖고 있음에도 서울의 삶 속에서 그것이 소화되는 것은 점차 더 어려워 보인다. 얼마 전 지나던 길에 본 그 집들은 모두 헐려 두세배는 더 높은, 번듯한 원룸 건물이 되었다. 그렇게 일상의 공간들은 땅으로부터 점차 더 멀어지고 더욱 거대한 그림자로 거리의 시야를 가리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옥상이라는, 더 높은 곳에 인공의 대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화양동을 떠나 이사한 청량리의 반지하 집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했다. 그다음 집이었던 신림동 복층 원룸의 화장실은 샤워기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려도 천장에 닿지 않았다. 하지만 이따금 화양동 옥상에서 마주했던 서울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지난해 여름 찾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시간의 정원>은 옥탑에서 살았던 예전 기억을 선명히 떠올리게 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옥상에 설치된 건축가 이정훈의 파빌리온은 주변 환경이 지닌 모습을 펼쳐 보여주며 우리가 서 있는 장소가 어디인가를 감각하게 해주었다.

서울 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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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빌딩의 옥상이 하나둘 공원화되면 우리는 이곳에서 서울의 수평적 경관을 감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옥상, 서울과 마주할 새로운 장소

잃어버린 서울의 매력을 드러내기 위해 흔히 거론되는, 건물의 높이나 개발을 제한하거나 그 이전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것은 도시적 해법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도심에 대규모 공공 공간이나 오픈스페이스를 조성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서울의 수평적 경관을 경험해볼 수 있는 대안적 장소 중 하나가 바로 ‘옥상’이다. 건축가와 도시계획가들은 본격적인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대지와의 교감이 부족해진 서울 도심지에 오픈 스페이스를 만들 수 있는 해법 중 하나로 옥상을 꼽아왔다.

예컨대 서울시청을 설계한 건축가 유걸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설계 경기에 낸 제안서를 ‘서울시청 앞 광장부터 동대문운동장에 이르는 구간에 단 하나의 오픈스페이스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시작했다. 이는 도심지 공원으로 계획된 부지가 매각되고 모두 건물이 들어선 까닭이다. 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당선으로 건립된 DDP 역시 건설 과정에서 유적이 발굴됨에 따라 매립된 건물을 들어 올리는 형태로 계획안을 조정하기 이전까지는 보행로에서 건물 상부로 접근할 수 있는 일종의 옥상 공원 만들기 프로젝트였다.

‘지니어스 로사이(Genius Loci)’는 땅의 정령 혹은 대지의 신을 의미하는 라틴어로, 현대건축에서는 장소성 또는 장소의 혼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된다. 그러나 서울과 같이 고층 빌딩으로 이루어진 메트로폴리스에서 부러 공원이나 수변 공간을 찾지 않는 한 대지에 깃든 혼과 마주하고 그와의 교감을 기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언젠가 빌딩의 옥상이 공원화되어 사라져가는 옥탑을 대신해 서울이 가졌던 본래의 수평적 경관을 다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면 그곳이 곧 서울의 영혼이 새롭게 머물 미래의 장소가 될 것이다.

글.정평진(건축 평론가)

건축 전문지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창간 40주년 기념 비평상을 수상했다. 공공건축 설계 경기 플랫폼 ‘스코어러(scorer.co.kr)’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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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24-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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