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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도시] 돌아볼수록 더 재미있는 나의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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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풀리는 계절이 오면 불광천에는 왜가리나 백로, 청둥오리가 날아든다.

여자 친구는 부산에 산다. 그녀는 나를 만나러 서울에 올 때 마다 다짐한다. “이번에는 꼭 성수동에 가볼 거야.”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묻곤 한다. “진짜? 자신 있어?” 성수동에 가려면 정말 ‘자신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서울 은평구 응암동에 산다. 응암동에서 성수동까지는 대중교통으로 약 1시간이 걸린다. 1시간 정도면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돌아올 때가 걱정이다. 사람 많은 동네를 한참 돌아다니다가 은평구로 돌아오는 여정은 상당한 피로감을 동반할 게 분명하다. 게다가 여자 친구는 평일에 직장에서 힘들게 일하다가 주말이면 고양이처럼 누워 있는 사람이다. 그녀에게 길고 먼 외출은 그만큼 힘든 일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성수동 이야기를 하면 “성수동 근처에 숙소를 잡고 가야해”라고 말 한다. 이런 대화를 여러 차례 했다. 성수동은 어느덧 우리에게 밈이 되어버렸다. 가보고 싶지만, 지금은 집에 있는 게 더 좋아서 못 가는 서울의 힙 플레이스. 그래서 우리는 주로 은평구 일대를 돌아다니는 편이다. 그때마다 여자 친구는 말했다. “또 군부대에 데려가려고 그러지?” 은평구 바로 옆은 경기도다. 고양시 서오릉과 북한산 주변에는 넓고 매력적인 카페가 많다. 그런데 군부대도 많다. 결국 우리에게 드라이브는 군부대 탐방이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버스와 지 하철을 탈 때 오히려 더 높은 만족도를 보였다. 우리가 자주 찾는 곳은 망원동과 부암동이다. 성수동만큼은 아니어도 성수동과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닌 공간이 많다. 몇 차례 돌아다녀본 여자 친구가 말했다. “나한테는 여기까지가 딱 알맞은 이동 반경 같아.”

나와 그녀는 이동 반경이 더 편한 곳을 찾고 싶었다. 종로구나 마포구, 서대문구까지 갈 게 아니라 그냥 은평구에서 재미있는 곳을 찾아보자! 그런데 나는 은평구에서만 40년을 살았다.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여기서 다녔다. 당연히 모르는 곳이 없다. 추억의 장소만 산책해도 불광역에서 독바위역을 거쳐 불광2동을 지나 갈현동, 구산동까지 이어질 수 있다. 이런 동네에서 데이트할 만한 곳을 찾아야하다니…. 다행히 은평구민인 나에게는 보이지 않던 것이 부산시민인 여자 친구에게는 보였다. 그녀는 종종 잡지나 블로 그에서 본 은평구의 새로운 명소에 관한 정보를 보여주었다. 그곳들을 찾아다녔다. 불광천을 산책하다가 카페 ‘필구커피’ 에서 커피를 마셨다. 가끔은 물가의 새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벚꽃이 피면 갑자기 외부인이 많아지고, 동네 축제를 할 때면 시끄럽고, 선거철이 되면 더 시끄러운 곳이지만, 그래도 여자 친구와 돌아다니면서 불광천의 매력을 알게 됐다. 물론 그녀와 매번 불광천만 거닐 수는 없었다. 여자 친구는 연신내에 있는 몇몇 장소에 관한 정보도 알아왔다. 연신내는 내가 10대 시절 대부분을 보낸 곳이다. 이 동네는 나에게 빨갛다 못해 검붉은 레드 오션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곳에서 자신의 취향을 찾아냈다. 우리는 종종 독립 서점인 ‘니은서점’에 가서 책을 산다.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이피플라츠’에 가서 와인과 스페인식 문어 요리인 폴포를 시켜놓고 같이 축하를 한다. 최근에는 내가 퇴사해서 그녀가 샴페인을 사줬다. 고급스러운게 끌리지 않을 때는 연서시장에 간다.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곳은 ‘섭섭이네’다. 푹 익은 파김치가 아주 맛있다.

사실 은평구는 딱히 특별한 개성이 없는 곳이다. 연신내가 나름 번화가라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불광동과 갈현동, 구산동 아이들이 주로 놀던 곳이다. 신사동이나 증산동 친구들은 아예 신촌이나 홍대로 나가서 놀았고, 녹번동 친구들은 종로로 나갔다. 그만큼 외부인이 이곳으로 오는 일은 별로 없다. 그나마 이곳에 오는 외부인은 휴가 나온 군인들과 북한산에 오르는 등산객 정도일 거다. 거의 평생을 이곳에서 산 나에게는 더 ‘노잼’일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이 나에게 은평구는 일상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아침에 연신내역으로 나갔다가 저녁이면 연신내역으로 돌아왔다. 영화를 볼 때는 불광역 NC 백화점에 있는 CGV에 가고, 식재료를 살 때는 이마트 은평점에 가고, 친구들과 만날 때는 연신내 ‘보들이 족발’에 갔다. 게다가 은평구에 사는 동안 우리 집 주변에는 언제나 친척들이 있었다. 집성촌이 아닌데도 집성촌처럼 살았던 것이다. 지금도 이 일대에는 나의 친척들이 산다. 게다가 동네를 떠났던 몇몇 친구도 결국 서울 안에서 상대적으로 집값이 저렴한 이 동네로 돌아왔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 나오는 ‘정희네’ 같은 아지트는 없지만, 나한테는 만들려면 만들 수 있는 곳이 은평구다.

그런데 그녀와 다니기 시작하면서 나는 이 동네에서 해본 적 없던 일의 재미를 경험하는 중이다. 사실 나는 연서시장에서 김밥과 국수만 먹어봤지 술을 마신 적이 없었다. 연신내에서 소주에 순댓국, 삼겹살은 먹었어도 와인과 파스타, 치즈를 즐긴 적은 없었다. 어쩌면 나에게 은평구의 이미지는 앞으로 더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빌라가 들어찬 베드타운인 이 동네에 곳곳에 재개발 깃발이 꽂히고 있기 때문이다. 아파트 가 들어서면 당연히 과거의 정취는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40년 동안 살아온 동네가 바뀌는 풍경은 그 자체로 드라마 틱할 듯싶다. 다만 변화의 바람 때문에 여자 친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 곳들이 사라지는 건 아쉬운 일이다. 집 근처에 1인 키친으로 운영하는 수제 버거집과 소라무침, 해물파전 등을 파는 작은 포장마차가 있었다. 아지트처럼 찾아다니던 그곳들은 어느새 문을 닫았다. 사장님들은 잠시 쉬었다가 근처 다른 곳에 다시 연다고 했지만, 보이지 않았다. 나와 여자 친구는 이야기했다. “사장님들, 혹시 강남에 가신 거 아닌 가?” 뛰어난 실력과 수완을 가진 분들이니 더 많은 고객이 있 는 곳에서 새로운 영업장을 만들었을 수도 있으려나. 어쩌면 은평구는 그들에게 테스트 베드로 삼기에 알맞은 곳이었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그 덕분에 여자 친구가 찾아낼 수 있는 곳도 많았을 것이다. 앞으로도 더 재미있는 곳들을 찾아볼 생각이니, 더 많은 사람이 마음껏 은평구에서 시작해주었으면 좋겠다. 성수동에 가보는 날은 또 멀어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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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네에는 벚나무가 꽤 많고 올해는 불광천 벚꽃 마라톤 대회도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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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강병진
대중문화 저널리스트이자 유튜브 크리에이터.
<씨네21>, <허프포스트코리아>에서 영화와 대중문화 전반에 대한 글을 썼고, OTT 서비스 왓챠에서 콘텐츠 마케팅을 했다. 책 <생애최 초주택구입 표류기>를 썼다.
현재는 프리랜 서로 일하며 영화 전문 유튜브 채널 <이상한 장면 by 강병진>을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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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24-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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