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사랑

[이야기가 있는 도시] 서울과 나의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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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인사동길 가장 목이 좋은 곳에 매장을 열고 고미술품을 거래하셨다. 주말이면 나는 종종 그 가게를 찾았고, 아버지는 나를 근사한 일식집이나 한정식집에 데려가 밥을 사주셨다. 때때로 과묵하게 숟가락을 드는 일만 이어질 때도 있었는데, 아버지는 언제나 반주로 주문한 따뜻한 정종을 한 모금씩 음미하곤 하셨다. 식사가 끝나면 아버지는 두툼한 지갑에서 몇 장의 지폐를 꺼내 내 손에 쥐여주셨다. 그러면 나는 신이 나 인사동 구석구석은 물론, 저 멀리 계동과 재동, 누하동과 체부동, 수송동과 청진동 일대를 비집고 다녔다. 혼자서 떠나는 발걸음이 종종 두려울 때도 있었지만, 오래된 도심 곳곳에는 호기심을 끌 만한 볼거리와 먹거리가 가득했다. 그리하여 유년 시절의 나에게 서울은 한양 성곽의 테두리를 둘러싼 곳에 머물러 있었다.

나의 서울이 조금 더 넓어지게 된 것은 커피 때문이었다. 중학교 시절에 활동했던 동호회의 형과 누나들을 쫓아 다니며 신촌과 이대, 홍대 주변을 거닐었다. 그들은 두꺼운 전공 서적을 들고 학교 앞의 이름난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고매한 음악 취향을 가진 대학생들의 입맛은 까다로웠다. 그들은 한여름에도 뜨거운 커피를 주문해 설탕도 넣지 않고 후루룩 들이켜고는 쓰다고만 느껴지는 그 커피에 담긴 맛과 향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곤 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마시던 믹스커피가 전부였던 나는 커피가 원래 달지 않다는 사실에 조금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이내 그 깊고 쓴 맛에 빠져 주말이면 당시 서울에서 손에 꼽던 커피 전문점을 찾아다녔다.

운 좋게도 당시는 커피업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던 때였다. 고대 후문에 있던 카페 보헤미안은 그 새바람을 이끈 주역들이 커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여들던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 집이 있던 불광동에서 6호선을 타고 꼬박 1시간을 가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지만, 나는 주말마다 그곳을 찾아 커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엿듣는 것이 그렇게도 재미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에도 쉬지 않고 주말이면 그곳을 찾았는데,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면 커피를 가르쳐주겠다는 점장님의 말을 듣고 잠시간 커피를 끊기도 했다. 점장님에게 커피를 배우고 싶은 마음이었는지, 멋쟁이 대학생이 돼 커피를 마시고 싶은 마음이었는지 얼마간 공부에 조금 더 몰두해 다행히도 원하는 대학에 합격할 수 있었다.

대학생이 되니 정말로 원하는 만큼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삼삼오오 소주나 막걸리를 마시러 가던 친구들을 뒤로하고 나는 카페로 향했다. 그리고 고대 앞 카페 보헤미안과 홍대 앞 카페 커피볶는곰다방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커피 얘기를 잔뜩 했다. 앞서 새바람이라 일컬었던 ‘스페셜티 커피’의 흐름은 카페 보헤미안에서 시작해 곧 커피인들 사이로 유행처럼 번져갔다. 스페셜티 커피는 커피 본연의 맛과 향을 중시하면서 커피 농가부터 유통 로스팅 추출까지 모든 제조 과정에 전문가들이 개입했다. 또 커피가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는지를 알 수 있는 명확한 이력을 강조했다. 그래서 모든 이력이 추적 가능하도록 직접 커피 산지를 찾아가는 직거래 방식을 선호하기도 했다.

이후 15년 가까이 흐르는 시간 동안은 우리나라 커피 산업의 전성기나 다름없었다. 스페셜티 커피 흐름에 동조했던 젊은 커피인들은 서울 각지에서 자신만의 스페셜티 커피를 다루는 카페를 열었고, 세계의 커피 산지로 떠나 양질의 커피를 직접 가져왔다. 그사이 우리나라에서도 세계 바리스타 챔피언이 탄생했고, 그 외에도 실력 있는 커피인들이 세계 곳곳에서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지금의 서울은 세계 어느 도시보다 맛있는 커피를 마시기에 최적의 장소가 됐다. 나는 그동안 변화하는 서울과 서울의 커피인들을 꾸준히 취재했고, 그 내용을 몇 권의 책으로 엮어 출간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나의 서울은 커피와 함께 커져나갔다. 한양 성곽을 벗어나 신촌과 홍대, 안암동에 숨어 있던 카페들을 찾아 나섰고, 이후에 빠르게 번져나간 스페셜 티 커피 흐름을 취재하기 위해 성수동·연남동·한강로동·압구정동과 강남 등을 찾았다. 초창기 스페셜티 커피 산업을 이끌던 이들이 만든 카페는 규모와 세를 상당히 키웠는데, 이후 이들 카페에서 일하던 바리스타와 로스터가 독립해 각자가 살았던 서울의 다른 동네에 새 카페를 열었다. 이제는 불광동과 연신내에서, 창신동과 공릉 동에서, 양평동과 목동에서도 수준급의 스페셜티 커피를 맛볼 수 있다. 서울은 이제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커피의 도시가 됐다. 그리고 지금도 빠르게 그 모습과 색깔을 바꾸며 무섭게 성장하고 변화해가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추억하는 어떤 시절의 서울과 커피는 더 이상 없다. 이대 앞의 비미남경, 고대 앞의 보헤미안, 홍대 앞의 커피볶는곰다방은 각자 다른 이유로 문을 닫거나 이전해 상호를 바꿔 달았다. 아들과 점심을 먹고 용돈을 쥐여주던 아버지는 내가 대학에 입학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커피와 함께 커져나간 서울은 너무나도 빠르게 변화했다. 종종 인사동 거리를 찾아 아버지와의 추억을 되새길 때면 쉽게 잊히는 서울의 어떤 장면들이 생각나 아쉬움이 들곤 한다. 물론 지금처럼 어딜 가도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근사한 서울의 모습이 싫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나간 일들이 잊히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쓰는 글은 대체로 잊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도시의 어떤 장면과 그곳에서 마시는 커피를 주제로 다룬다. 서울과 서울의 커피가 넓고, 깊고, 크고, 빠르게 변하니 나의 글감은 언제나 부족함이 없다.


조원진
평범한 회사원이자 칼럼니스트로, 다양한 커피를 마시고 공부하며 커피 이야기를 나누는 일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실용 커피 서적>등이 있다.

조원진 일러스트 이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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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시스템 서울사랑 제공부서 시민소통담당관
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23-11-02
관리번호 D0000049327862 분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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