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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도시] 위로와 용기의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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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북한산

때는 2009년. 산에 빠진 지 3년 차에 접어든 등산 초보였던 나는 매주 주말이면 등산 유람을 다니느라 친구도, 연인도, 가족도 뒤로하고 전국의 산에서 인생의 재미를 보고 있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첫 산으로 지리산을 오른 나머지 눈에 보이는 것이 산밖에 없었다. 어른이 되고 뒤늦게 이렇게 무언가에 깊이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을, 내 안에 이토록 대단한 열정과 끈기가 있다는 것을 산에서 알게 됐다.

2011년, 신의 부름처럼 히말라야가 다가왔다. 무슨 열병 앓듯 일도 손에 안 잡히고, 그저 가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결국 잘 다니던 회사도 그만두고 네팔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북한산에 처음 오른 것은 그즈음이었다. 히말라야를 걸으려면 산에 한 번이라도 더 오르며 체력 단련을 해야 했는데, 마침 활동하는 산악회에서 시산제와 더불어 북한산 정기 산행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북한산? 그 순간 서울에 살면서 아직 북한산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 북한산의 어느 코스를 올랐는지, 백운대 정상에 갔었는지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구파발역에서 모여 버스를 타고 북한산 입구로 향했던 것, 봄이 온 계곡을 따라 대서문 대동문 등의 성문을 돌았던 것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이토록 좋은 산을 지척에 두고 왜 그동안 한 번도 와보지 못했는지 안타까워했던 기억도. 아마도 향로봉이었을 것이다. 어느 멋진 봉우리에 올라 바라본 화려한 서울 시내는 그동안 오른 다른 산에서는 보지 못했던 최초의 풍경이었다.

다시 만난 북한산

2012년, 산악 잡지 기자가 됐다. 취재를 위해 전국의 산을 오르내리며 시간의 사각지대에서 계절의 절정을 누렸다. 철야를 하며 원고 작업을 해도 힘든 줄 몰랐다. 북한산과 다시 만난 것은 그즈음이었다. 새벽까지 마감 근무를 하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는 어느 평일 아침, 한차례 장대비가 쏟아지다 그친 듯 공허해진 마음은 산을 찾고 있었다. 문득 북한산이 떠올랐다. 집으로 향하던 걸음을 돌려 구파발역으로 향했다. 잊고 지냈던 최초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후로 쉬는 날이면 무시로 북한산을 찾았다. 불광동에서 향로봉과 문수봉을 이어 오르기도 했고, 상명대학교에서 구기분소를 지나 깔딱고개를 오르기도 했다. 진관사를 거쳐 비봉 능선을 오르기도 했고, 도선사에서 출발해 백운대에 이르기도 했다. 집 뒷산인 안산을 기점으로 인왕산과 북악산을 거쳐 둘레길을 경유해 북한산 능선에 이르는 길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등산 코스였다. 북한산은 아무리 가도 끝이 없었고, 갈 때마다 새로웠다.

외국에서 친구들이 오면 여지없이 북한산에 함께 올랐다. 이곳이라면 자신 있게 안내할 수 있었다. 북한산을 본 친구들은 실망하는 법이 없었다. 서울 도심에 해발 1,000m 고지에 이르는 아름다운 명산이 이렇게 가까이 있다는 것에 하나같이 놀랐다. 친구들은 대본이라도 외는 듯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만한 크기의 산에 가려면 차를 타고 적어도 2시간은 넘게 가야 해!” 그러고 보니 내가 히말라야에 갔을 때도 카트만두에서 버스를 타고 구절양장의 길을 12시간 동안 고생하며 이동했다.

북한 산 너머의 산

반복되는 일상과 일탈, 일과 생활의 팽팽한 줄다리기에 지쳐 몸도 마음도 쉬고 싶을 때, 먼산은 너무 아득해서 어디로도 갈 수 없을 것 같을 때, 지금 당장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지하철을 타고 언제든지 갈 수 있는 북한산을 생각하면 묘하게 안심이 됐다. 북한산은 언제라도 만날 수 있는 친구였고, 어떤 상황이든 내 편이 되어주는 연인이었으며, 같은 자리에서 나를 기다려주는 가족이었다.

북한산에 서면 다른 산이 보였다. 북한산에서 출발해 도봉산, 사패산, 수락산, 불암산으로 이어지는 강북 5산과 한강 너머 청계산에서 출발해 우담산, 바라산, 백운산, 광교산으로 이어지는 강남 5산을 하나둘 올랐다. 그리고 삼성산, 관악산, 남산, 용마산, 아차산 등 서울 동서남북의 산도 올랐다. 이 산의 정상에 서면 한눈에 보였다. 내가 사는 서울이라는 곳이 얼마나 작은지, 세상은 또 얼마나 크고 넓은지, 나는 또 얼마나 강하고 단단한 사람인지, 코로나19가 터지고 하늘길이 막혀 갈 곳을 잃었어도 이 모든 산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2023년 여름. 북한산과 처음 만난 지도 어느덧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그사이 내가 사는 동네도, 곁에 사는 이웃도, 서울 시내도, 세상도, 또 나도 변했지만 어쩐지 북한산만은 그때 그 모습 그대로인 것 같다. 온 세상이 깨어나 움직이는 요즘 같은 날이면 하루하루 더욱 북한산 생각이 간절하다. 연고 없이 무작정 꿈 하나 믿고 시작한 서울 생활에 한결같은 위로가 되어준 북한산. 태어나 처음으로 세계의 산을 꿈꿀 때 무한한 용기를 심어준 북한산. 이번 생에 나는 결코 북한산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장보영
마운틴 러너이자 작가. <아무튼, 산> 을 썼다.

장보영 일러스트 이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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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23-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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