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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품은 서울] ‘역지사지’를 생각하게 하는 살곶이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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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이 많이 찾는 겨울의 살곶이다리

창공을 날던 꿩의 몸통으로 화살이 날아와 정확히 꽂혔다. 살에 꽂힌 꿩은 맥없이 떨어졌고, 사람들은 그 들판을 살곶이벌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살곶이벌을 지나 한양의 동남쪽을 드나드는 다리가 놓이자 살곶이다리라고 불렀다. 나는 새를 화살로 관통시킨 이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다. 왕이 적중시킨 꿩이 떨어진 벌판이니 살곶이벌이라는 명명이 가능했을 것이다. 살곶이벌은 꿩이 많아 왕의 사냥터로 쓰였다고 한다. 꿩이 많이 찾을 정도의 들판이라면 많은 새에게도 살기 좋은 환경이지 않을까? 벌판 주변에는 여전히 숲이 있고, 물도 흐른다. 무려 500년 동안 조선왕조의 도읍이었던 서울에는 지금도 이야기가 담긴 지명이 곳곳에 남아 있다. 유래를 알기 전 살곶이다리는 이름도, 생긴 모양도 특이했다. 한강과 지천을 건너는 수많은 다리 가운데 살곶이다리는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만, 아치 모양의 무지개다리 같은 미적인 면을 고려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흐르는 물의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다리 기둥을 마름모 모양으로 다듬었을 뿐 기둥 위에 얹은 돌 대부분은 커다랗고 질박하다. 투박한 돌을 세우고 얹어 튼튼하게 만들었다는 느낌만은 확실하니 다리의 쓰임새에 충실했다고 할까?

화살에 박힌 새가 떨어졌다고 해서 명명된 ‘살곶이’라는 고유명사가 붙은 살곶이다리 근처는 겨울이면 많은 새가 찾는다. 새의 언어와 인간의 언어가 서로 소통할 수 없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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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다양성이 풍부한 합수부

달이든 행성이든 탐사할 때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게 물이다. 물이 있어야 생명이 살 수 있으니까. 강을 흔히 생명의 젖줄이라 표현하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모든 문명의 발상지는 강을 끼고 있다. 강은 그 지역에 사는 사람뿐만 아니라 수많은 생물, 나아가 기후에도 영향을 끼칠 만큼 중요한 환경이다. 서울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한강은 중간중간 지천에서 흘러드는 여러 물길과 섞이며 유장하게 흐른다. 넓고 길게 흐르는 한강 어디서든 새를 만날 수 있으나 그 가운데에서도 다양한 새를 볼 수 있는 곳 하나가 중랑천이다. 범위를 좀 더 좁혀보면 살곶이다리를 중심으로 동쪽으로 청계천이 중랑천과 만나는 지점부터 서쪽으로 성동교를 지나 응봉교 근처가 특히 새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청계천은 중랑천과 만나 중랑천으로 흐르다 한강과 만나고, 마침내 서해로 나아간다. 강이 흐르는 지역의 환경에 따라 수서생물의 종류도 조금씩 다르기에 서로 다른 물이 만나는 합수부는 생물다양성이 풍부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청계천이 중랑천으로 스며드는 곳에 새들이 많이 찾는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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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의 싱싱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중랑천

중랑천 살곶이다리를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범위를 넓히며 새를 만난다. 살곶이다리 위에 서면 북쪽에서 날아온 새들의 싱싱한 에너지가 좌우에서 뿜어져 나와 중랑천의 겨울 풍경을 활기차게 느낄 수 있다. 자맥질하며 먹이 활동을 하는 오리의 꽁지깃이 유난히 뾰족하고 길다면 고방오리다. 다른 오리류에 비해 긴 꽁지깃이 고방오리의 특징이다 보니 영어로 pintail(pin은 핀, tail은 꼬리를 뜻한다)이라 불린다. 자맥질을 마친 오리가 물속에서 쑥 올라오는데 머리에서 뒷목까지 어두운 밤색이고 앞목과 가슴이 흰색인 오리가 눈에 띈다면 고방오리 수컷이다. 같은 고방오리여도 암컷은 완전히 다른 생김새다. 새는 암수 구분뿐만 아니라 계절에 따라 모양과 색이 달라지는 변환 깃도 있고 어린 새와 어른 새의 모양이 다르기도 해서 알아갈수록 어렵다. 그렇지만 모르던 것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즐거움이 크기에 탐조가 흥미로운 취미인 것은 틀림없다. 겨울 강에서 많이 보는 새 가운데 물닭이 있다. 몸 전체가 검고 통통한데 부리와 이마판(물닭이나 쇠물닭의 윗부리부터 이마에 걸쳐 있는, 깃털이 없는 딱딱한 부분)만 흰색이어서 멀리서도 눈에 잘 띈다. 물닭이 헤엄을 치거나 잠수 실력이 뛰어난 건 유난히 큰 발과 발가락 사이사이에 붙어 있는 얇은 막 덕분이다.

이 막을 판족이라 부르는데, 일종의 물갈퀴다. 이렇게 물속 생활에 적합하도록 진화한 물닭의 신체 구조는 물 밖으로 나오면 영 부자연스럽다. 뭍에서 어기적어기적 걷는 물닭을 볼 때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있어야 할 곳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회갈색 겨울에 새들이 건네는 생기

올겨울은 기온이 높은 날이 많다. 눈이 내려야 할 계절에 봄비 같은 비가 흠뻑 내리는 날도 있다 보니 기후 위기가 바싹 다가왔다는 걸 실감한다. 어느 하루 포근한 날, 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는 지점부터 응봉교에서 조금 더 욕심을 내어 용비교까지 걸으며 탐조를 했다. 가장 많은 개체는 원앙과 민물가마우지 그리고 물닭이었다. 바위 위나 다리 교각 아래 또는 흐르는 강물 위에 떠 있는 원앙 무리는 수컷의 화려한 깃으로 회갈색 겨울 풍경에 생기를 불어넣어준다.

원앙 사이에 조금 다르게 생긴 새가 있어 쌍안경으로 살피는데, 몸집이 작은 데다 언뜻 얼굴에 태극무늬가 살짝 보이는 것 같아 쇠오리인가 했더니 중랑천의 겨울 진객인 가창오리였다. 해마다 보인다는 소식을 들어 알고 있지만, 내 눈으로 확인하는 일은 느낌이 남다르다. 수컷 한 마리만 있을까 싶어 주위를 살피다 암컷도 한 마리 발견했다. 가창오리 수컷은 부리가 검고 얼굴에는 노란색, 녹색, 검은색의 바람개비 모양 무늬가 있다. 암컷은 쇠오리와 비슷한데, 부리 기부(사람이나 동물의 몸을 싸고 있는 살이나 살가죽) 양쪽에 동그란 흰색 점이 있다. 새에게 만약 보조개가 있다면 가장 잘 어울릴 부분이다. 올해도 가창오리 암수 한 쌍을 만났다. 가창오리는 수만 마리가 함께 날면서 펼치는 군무로 유명하며, 주로 금강과 근처 순천만 일대에서 만나곤 하는데 한두 마리는 따로 떨어져 모험을 떠나는 것 같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흘러 외따로 떨어져 지내던 가창오리는 어떤 진화의 경로를 밟게 될지 상상해본다.

겨울 철새 가운데 흰죽지와 넓적부리도 반가운 단골손님이다. 흰죽지는 잠수해서 먹이 활동을 하는 대표적 잠수성 오리로,.흰죽지 수컷의 머리는 적갈색이고 가슴은 검은색 그리고 몸은 회색이고 옆구리와 물 위에 떠 있는 배 부분만 흰색이다. 그런데 이름은 흰죽지다. 마치 흰뺨검둥오리의 뺨이 희지 않은데도 붙여진 이름처럼, 흰죽지 암컷은 수컷과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탐조할 때 도감은 필수품이다. 눈에 보이는 새와 도감 속 새가 같은 새였을 때 느끼는 쾌감은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 비슷한 종류로 댕기흰죽지, 붉은부리흰죽지, 적갈색흰죽지도 있고 아주 드물게 발견되는 미국흰죽지도 있다. 댕기흰죽지는 머리 뒤쪽에 댕기 모양의 깃이 달려 있고 회색 부리 끝에 검은 점이 있으며, 머리는 방향에 따라 보랏빛 광택이 있다. 수컷은 댕기가 암컷보다 길고 흰색 옆구리와 배를 제외하고 몸 전체가 검은색인데, 암컷은 옆구리도 어두운 갈색이다. 방금 물속에서 나온 댕기흰죽지의 댕기가 찰랑거리는 걸 발견하고는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물에 들어갔다 나왔는데도 댕기의 존재감이 눈부셨다. 넓적부리는 넓적한 부리를 지닌 오리로, 생김새에 잘 어울리게 지은 이름이다. 잠수하지 않고 물 위를 떠다니는 수면성 오리로, 물속 먹이를 걸러서 먹는다. 넓적부리 수컷은 청록색의 금속광택이 나는 머리와 흰색 가슴, 붉은색 배가 특징이다. 암컷은 여느 오리와 비슷하게 평범한 갈색인데, 넓적한 부리로 쉽게 구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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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의 안녕을 바라는 살곶이다리

하천에 눈을 고정한 채 열심히 새를 찾는 와중에 강가 갈대와 억새 덤불 사이에서 ‘짯 짯’ 하는 굴뚝새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가는 부리에 몸은 작고 둥글며 꼬리를 위로 살짝 치켜올린 굴뚝새는 무척 재빨라 눈보다 귀로 먼저 만나는 새다. 강변을 깔끔하게 정리해서 예쁜 꽃과 나무로 꾸미는 것은 사람들 눈에는 아름답게 보일지 몰라도 새들에게는 전혀 반갑지 않은 변화다. 우거진 덤불은 새가 둥지를 짓고 알을 품어 새끼를 기르고, 천적으로부터 몸을 숨기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생물들의 생태를 알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은 새들이 깃들어 사는 덤불을 우리는 한 가지 잣대로만 바라보는 것 같아 아쉽다. 하천 변에 자전거길이 생기면서 새들과 아주 가까이에 사람들의 발길이 닿고 있다. 대체 새들은 어느 곳에서 마음 놓고 지낼 수 있을까.

단 2시간 동안 중랑천 살곶이다리 근처에서 본 새는 흰죽지, 댕기흰죽지, 넓적부리, 고방오리, 알락오리, 원앙, 물닭, 쇠오리, 홍머리오리 암·수컷, 가창오리 암·수컷, 갈매기, 재갈매기, 민물가마우지, 할미새, 왜가리, 참새, 직박구리, 까치, 까마귀, 쇠백로, 굴뚝새였다. 내 눈에 띄지 않은 얼마나 많은 새가 중랑천에 깃들어 있을지 그저 짐작할 따름이다. 모두 겨우내 잘 지내길 온 마음으로 빌어본다.

‘역지사지’라는 말이 있다. 생김새도, 가치관도 다른 이들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아가려면 지혜가 필요한데, 입장 바꿔 상대의 처지를 헤아리는 태도가 곧 지혜가 아닐까 한다. 날아가는 새를 떨군 태조의 입장에서 보면 새 사냥은 흐뭇한 일이었겠지만, 난데없이 날아든 살에 꽂힌 꿩의 입장은 어떠했을까? 살곶이다리는 서울에서 특히 겨울에 탐조하기 좋은 장소다. 살곶이다리 위에 서서 중랑천을 찾은 수많은 새를 바라보며 당시 꿩의 입장을 생각해본다. 비록 이름은 살곶이다리이지만 그 다리 위에서 탐조하는 모든 이는 마음으로 새들의 안녕을 빌 것이다. 역지사지하는 귀한 마음이 아닐 수 없다.

최원형
생태·에너지·기후변화와 관련해 여러 매체에 글을 쓰고 강의를 하며, 시민 교육에 힘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사계절기억책>,
<달력으로 배우는 지구환경 수업> 등이 있다.

일러스트 김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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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품은 서울] ‘역지사지’를 생각하게 하는 살곶이다리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원본시스템 서울사랑 제공부서 시민소통담당관
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24-01-04
관리번호 D0000049829918 분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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