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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도시] 50년 전 어머니의 등하굣길을 함께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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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아버지를 여읜 상실감에 하릴없이 옛 가족사진을 뒤적거리다가 부모님의 결혼식 사진을 발견했다. 처음 본 사진이 아니었음에도 젊은 시절 두 분의 모습뿐 아니라 예식장 내부 모습, 예를 들어 봉황 두 마리가 양각된 벽체라던가, ‘이화예식장’이라 쓰인 붓글씨 입간판까지 찬찬히 살펴보았다. 돌연 그 예식장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며칠 뒤, 종로구 연건동이란 주소만 가지고 집을 나섰지만 결국 나는 그 예식장을 찾을 수 없었다. 이미 여러 해 전, (2012년) 예식장은 철거되고, 대신 그 자리엔 대형 오피스텔이 들어선 것이었다. 단지 오래된 건물 하나가 사라진 것뿐인데, 나는 마치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혼이 없던 일이라도 된 것처럼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되돌아 걸어가는 대학로 거리가 무척이나 매정하게 느껴졌다.

이듬해 어머니와 처음으로 한양도성 낙산 구간을 함께 걸었다. 혜화문이 얼마 남지 않은 곳에서 어머니는 북쪽 방향 성북동 언덕을 가리키며 저기 보이는 D여상고가 당신이 다녔던 학교라 일러줬다. 창경궁로 지점에서 순성을 마치고 대학로 방향 혜화로터리를 지나, 마로니에 공원에 이르기까지 어머니는 지난 시절 이야기를 마치 여고생으로 돌아간 듯, 신이 나서 들려주었다.

시골에서 자란 어머니는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상경을 하며 (1968년) 처음으로 서울살이를 시작하였다. 거처는 먼저 서울에 자리를 잡은 종로 6가 큰 외삼촌댁이었는데, 고등학교까지 약 3km, 걸어서 다니기엔 조금 먼 거리였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서울, 특히 낭만의 거리, 대학로를 매일같이 걸을 수 있음에 자부심을 느꼈다. 어떤 날은 가톨릭대와 서울대 문리대(현 마로니에 공원 자리, 1975년 관악캠퍼스 이전으로 사라짐)의 멋진 수목을 둘러보았고, 어떤 날은 보성고등학교와 이화장 주변을 서성였으며, 또 다른 날은 창경원까지 우회하여 귀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여고생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흐드러지게 핀 넝쿨 장미가 황홀하게 담장을 뒤덮고 있던 혜화동의 주택들이 었다. 당시 어머니는 등하교라기보다 매일같이 대학로 산책을 했다고 보는 편이 나았다. 50년이란 시간이 지난 뒤 우리가 걷고 있는 장소가 비록 어머니의 추억 속 모습과는 사뭇 다를지라도, 어머니는 마치 그 시간, 그 공간 속을 거닐고 있는 것처럼 행복해 보였다.

기억과 장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쌍이다. 살아 있는 동안 사람은 필히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며 존재한다. 그렇기에 기억에 의해 소환된 특정 시간은 반드시 그것에 대응하는 공간을 갖고 있다. 추억을 떠올릴 때 자연스럽게 장소가 함께 생각나거나, 반대로 고향에 가면 장소에 얽힌 기억들이 떠오르는 것만 보더라도 기억과 장소의 강한 연관성을 알 수 있다. 뇌과학자들은 기억과 장소, 특히 행복한 경험을 할 때 기억과 장소의 연결이 강화되는 현상을 뇌세포와 화합물의 작용으로 설명한다. 우리가 행복한 감정을 느끼면, 즉 뇌 속에 행복감을 유발하는 화합물이 생성되고, 그 화합물은 장소 기억을 담당하는 뇌 영역에 분포한 뇌세포와 결합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신경세포 신호 전달과 장기 기억 형성이 강화된다. 쉽게 말해 행복할 때 머물렀던 장소가 더욱 오래 기억되는 것이다.

어머니와 함께 마로니에 공원 벤치에 앉아 있노라니, 나 역시 대학로에 떨군 추억의 장소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건축학도 시절 학우들과 대학로 곳곳을 돌아다니며 둘러본 대한민국 근현대 주요 건축물들(서울대학교 본관, 아르코 예술극장, 미술관), 인연이 닿지 못한 옛사람을 기다리던 은행나무 아래 벤치, 그리고 연인이 되기 전 아내와 함께 찾았던 인근 소극장들…. 어떤 곳은 그대로이고 어떤 곳은 새롭게 변했으며, 어떤 곳은 기억조차 희미하다. 이렇게 대학로에 대한 기억은 그것이 품고 있는 장소에 의해 그 의미를 상실하기도, 보존하기도 한다. 또한 내가 아닌 다른 이의 기억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기도 한다. 벤치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할 때 즈음, 지난해 그토록 매정하게 느껴졌던 대학로는 어느새 나에게도 애정이 서려 있는 장소로 바뀌어 있었다. 물론 어머니와 함께한 대학로 산책 역시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이종욱 건축사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십수 년째 건축사로 일하며 국내외 기업들의 산업시설 건축설계를 맡아 진행했다.
평범함 속에 숨은 비범한 서울의 이곳저곳을 찾아 걷고, 쓰고, 그려 <걸으면 보이는 도시, 서울>을 펴냈다.

글·그림 이종욱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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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23-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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