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울] 단지 사랑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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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없는 사랑, 토포필리아

사랑의 대상에는 수많은 종류가 있지만, 나를 가장 편안하게 해주는 사랑은 ‘장소에 대한 사랑’ 이다. 토포필리아, 장소에 대한 사랑. 그것은 장소(Topos)와 사랑(Philia)이라는, 내가 너무도 아끼는 두 단어의 조합이다. 사람을 사랑할 때는 ‘저 사람도 나를 사랑할까’라는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장소에 대한 사랑은 그렇지 않다. 내가 그 장소를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단지 그 사실만으로도 좋은 일이 일어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저 사람이 제발 나를 사랑했으면 좋겠다며 노심초사할 필요도 없다. 장소에 대한 사랑은 늘 이긴다. 권태를 이기고, 피로를 이기고, 삶에 대한 무기력증을 이겨낸다. 우리가 사랑하는 장소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의 두뇌에서는 스트레스를 떨쳐내는 호르몬이 생성되는 것만 같다. 내가 사랑했던 장소들, 뮌헨·피렌체·베를린·런던·부다페스트 같은 곳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운이 샘솟는 느낌, 삶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행복한 예감이 든다.

그런데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서울에서 거의 모든 일을 겪어낸 내 서울 사랑은 너무도 복잡한 애증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 사랑은 피렌체나 베를린에 대한 내 ‘거리를 둔 사랑’과는 근원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여행지로서 만난 머나먼 장소들을 바라보는 내 눈은 이방인의 시선이었지만, 삶의 터전으로서의 서울을 바라보는 내 눈은 거주민의 시선, 내부자의 시선이었던 것이다. 다른 나라의 도시들, 다른 지방의 도시들에서 오래오래 헤매다 보니 비로소 ‘내가 살던 서울, 나의 살던 고향’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깊은 사랑은 깊은 애정을 숨기고

이제는 장소에 대한 사랑이 깊을수록 더 깊은 애증으로 얼룩져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서울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서울의 일부였기에 서울을 사랑의 대상으로 바라볼 수 없었던 것이다. 내 이마에는 서울의 햇살이 5000만 리터쯤 깃들어 있고, 내 정수리에는 서울의 빗물이 100만 리터쯤 스며들어 있지 않을까. 나는 서울의 햇살을 머금고 자라났고, 한강수를 먹고 무럭무럭 자라났고, 서울의 후미진 골목길들을 걸으며 유년 시절을 보냈고, 첫사랑과 함께 서울의 어느 골목길들을 걸었고, 친구들과 함께 운동화 뒤축이 다 닳도록 홍대거리를, 녹두거리를, 아현역에서 아현시장을 거쳐 우리 집으로 오는 길을 걷고 또 걸었다. 너무 오래, 너무 많이, 너무 깊이 걸어 서울을 감상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서울의 일부였고, 서울의 햇살이 내 세포와 적혈구 속에 깃들어 있었고, 서울과 나를 분리해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미 오랫동안 사랑하면서도 사랑을 표현하지 못했던 것이다. 서울을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는 거리가 생길 때, 비로소 사랑 또한 탄생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서울에 대한 나의 사랑은 내 삶에 대한 사랑과 맞물려 있는 것이었다. 내가 걸었던 길, 내가 사는 동네, 나와 내 친구들이 뛰놀던 골목길에 대한 사랑. 그것은 주어진 삶에 대한 사랑이고, 자연스러운 삶의 조건에 대한 사랑이었다. 힘들게 서울에 입성한 우리 부모 세대의 기록과 기억을 살펴보면 서울에 대한 사랑은 이런 자연스러운 삶의 조건에 대한 애착이 아니라 ‘너무도 어렵게 쟁취해낸 삶의 조건’에 대한 필사적인 집착이었음을 알게 된다. 우리 부모님은 신혼 시절 상경하셨는데, 그때 아직 나를 낳으시기 전 ‘새댁’이었던 우리 어머니의 유일한 소원이 ‘서울로 가는 것’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아내의 유일한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1975년 단돈 5000원을 들고 서울로 와서 가난한 신혼살림을 차리셨다고 한다. 그런 타지에서 온 젊은이들로 가득한 곳이 당시 서울이기도 했다.

서울이 주는 위로의 힘

나에게는 서울이 동경의 대상을 넘어, 고향을 넘어 이제 ‘장소에 대한 사랑’의 대상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서울의 온갖 길을 더 오래, 더 천천히 걷고 싶다. 심리치료 기법 가운데 ‘장소를 통한 치유(Geographic Cure)’라는 개념이 있다. 나는 서울의 구석구석 골목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아픈 마음을 위로받곤 했다. 그런 아름다운 추억이 모여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건강함과 강인함이 싹튼 것 같다. 장소에 얽힌 아름다운 추억들은 심리적 면역력이 되어 우리의 상처 입기 쉬운 마음을 다스려준다. ‘사회적 거리’를 두어야 하는 요즘, 서울의 매력을 마음껏 즐길 수 없어 안타까워하는 이가 많다. 우리들의 서울은 꼭 돌아올 것이다. 걸으면 걸을수록, 바라보면 바라 볼수록 더욱 아름다운 서울은 다시 우리의 품으로 돌아올 것이다. 서울은 더욱 향기롭고 풍요로운 도시가 되어 다시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정여울

정여울
정여울은 자신의 상처를 솔직하고 담담하게 드러내며 독자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작가다.
문학과 여행과 심리학을 통해 치유의 글을 쓰고 있으며, 네이버 오디오클립에서 <월간 정여울>을 진행한다.
심리 테라피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산문집 <마음의 서재>, 청춘에게 건네는 다정한 편지 <그 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등 다양한 저서를 집필했다.

글·사진 정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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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울] 단지 사랑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좋아 - 문서정보
관리번호 D0000040104523 등록일 2020-06-05
분류 기타
원본시스템 서울사랑 제공부서 시민소통담당관
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20-03-31
라이선스 CC BY-NC-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