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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울] 서울의 삶과 펭귄의 삶, 제 갈 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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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친구 하던 그때 그 시절

초등학교 시절 우리 가족은 청량리에 살았다. 역 근처에는 큰 시장이 모여 있었고, 강원도 방향으로 가는 기차가 출발하는 철도역이 있는 데다 서울 지하철 1호선이 지나는 곳이라 늘 사람들로 붐볐다. 부모님은 역 근처에서 음식점을 하셨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침 일찍부터 문을 열고 밤늦은 시간까지 일하셨다. 학교가 끝나 집에 오면 할 일이 없었다. 따로 학원을 다니지도 않아서 남는 게 시간이었다. 그땐 매일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게 일이었다.

학교 앞엔 나무가 많았다. 서울 복판이었지만 숲이 울창했다. 우리는 매일같이 메뚜기와 잠자리를 잡으러 다녔다. 학교 정문을 나와 조금만 걸어가면 수목원이 있었다. 홍릉수목원은 100년 넘게 숲이 보존된 임업 연구원이 있는 곳인데, 1993년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되었다. 우리는 누구보다 먼저 수목원을 찾았다. 수목원 안으로 들어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 머릿속까지 상쾌해졌다. 다람쥐와 두더쥐가 살았고, 오색딱따구리가 나무에 구멍을 만들었다. 길을 따라 가장 높은 곳에 오르면 숲이 보였다.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의 정수리만 보였고, 그 정수리 잎이 한데 모여 부드러운 초록색 곡면을 만들었다.

수목원 건너엔 고종의 후궁 묘가 있는 영휘원이 자리했다. 사람이 많지 않은 한적한 능은 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뛰어놀기 좋았다. 우리는 잔디밭에서 씨름을 하거나 술래잡기를 했다. 방아깨비를 잡아 뒷다리를 손가락에 쥐기도 했다. 내 손가락보다 더 큰 초록 곤충은 연신 다리를 움직이며 방아를 찧어댔다.

관찰자의 길로 인도해준 추억

초등학교 6학년 때 부모님의 가게가 있던 건물이 헐렸다. 동네 곳곳이 재개발되었다. 아파트가 들어섰고, 누군가는 떠나야 했다. 우리 가족은 용산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몇 년 뒤, 용산 역시 재개발에 들어갔다. 빌딩이 숲을 이뤘고, 누군가는 떠났다. 나는 서울에 남아 학교 근처에 혼자 살았다. 작은 자취방에 누워 가끔 어린 시절을 회상하곤 했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나무껍질에서 나는 흙냄새와 방아깨비가 뱉어내던 갈색 액체가 떠올랐다. 숲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데이비드 헨리 소로의 책 <월든>에 나오는 것처럼 깊은 산속에 통나무집을 짓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최진실과 박신양이 나온 영화 <편지> 속 남자 주인공처럼 수목원에서 금강초롱을 관찰하는 연구자도 멋져 보였다. 자연 속에서 동식물을 관찰하며 살 수 있는 직업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운이 좋게도 지금 그런 일을 하고 있다. 비록 숲은 울창하진 않지만, 얼음이 가득한 남극과 북극을 오가며 펭귄과 바닷새를 연구하고 있다.

기후변화를 맞닥뜨린 남극과 북극

매년 극지 동물을 관찰하는 일은 분명 즐거운 일이지만, 출장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올 때면 늘마음이 무겁다. 지구 어느 곳보다 온난화가 빠르게 진행 중인 극지에서는 온난화로 인한 결과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남극세종과학기지 옆 마리안 소만 빙하는 매년 30m씩 경계선이 후퇴해 해마다 지도를 다시 그려야 할 정도였다. 급속한 환경 변화로 생태계가 파괴되면서 펭귄은 그 결과를 고스란히 떠안았다. 서울에 살고 있는 사람들만큼이나 힘겹게 버텨내는 모습을 보며 내가 펭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온난화를 멈추는 일이 시급하다는 생각에 고기를 먹지 않기로 다짐했다. 한 덩이의 고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나오는 탄소 배출량은 곡물을 만들 때 나오는 양에 비해 수십 배나 높다. 그리고 멕시코 열대우림을 파괴하며 재배되어 비행기를 타고 온 아보카도 대신 집 근처에서 생산된 토마토를 골랐다.

환경 파괴와 신종 감염병의 시대

최근 코로나19로 인간의 활동이 위축되면서 역설적이게도 자연은 회복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요즘 보도되는 동물 관련 뉴스를 보면 너구리와 캥거루가 도로를 뛰어다니고, 늑대와 코요테도 거리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동안 인간이 홀로 점거하고 있던 도시에서 동물들도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다. “원래 여기는 내 영역이었다고! 이제 좀 살 만한 세상이 되었네.”

내가 극지방에서 펭귄과 북극곰을 관찰하는 이유는 그들과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꾸기 때문이다. 코로나19가 언젠가 끝나면 다시 사람들은 거리를 빼곡하게 채우고, 자동차는 도로를 메울 것이다. 거리로 나왔던 동물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우리가 조금 양보한다면 같이 살 수도 있지 않을까? 인간과 동물이 공존하는 세계를 떠올려본다. 그리고 부자와 서민이 같은 공간에서 사는 도시를 생각해본다. 그리 머지않은 과거엔 그랬다.

이원영

이원영
극지연구소에서 동물의 행동 생태를 연구하고 있는 선임 연구원.
팟캐스트 <이원영의 새, 동물, 생태 이야기>, 네이버 오디오클립 <이원영의 남극 일기> 등을 운영하며,
<펭귄의 여름>, <여름엔 북극에 갑니다>, <펭귄은 펭귄의 길을 간다> 등의 저서가 있다.

글·사진 이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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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20-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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