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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소식] 골목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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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의 미래



어떤 거리는 아무 기억도 소환하지 못하지만, 어떤 거리는 무거운 기억 때문에 가볍게 걷기 위한 용기가 필요하다. 가장 미세한 기억들이 호출되는 장소는 골목이다. 유년의 공간적 기억 가운데 희미하게 남아 있는 이미지는 60년대 지방 대도시의 수동식 펌프가 있던 시멘트로 덮인 마당, 그리고 그 집 앞의 좁다란 골목과 몇 걸음 나오면 흐르던 작은 도랑이었다.

어린 시절 떠나온 뒤 한 번도 그 유년의 집 근처를 가본 적은 없지만, 그 희미한 이미지들은 왜곡과 착각을 뒤집어쓰고 고유한 시간의 이미지를 머금고 있다. 기억의 이미지는 절대로 정확할 수 없기 때문에 자족적이며 조금씩 불우하다. 그 이미지는 푸른빛이나 화사한 색감과는 무관했으며, 밋밋한 시멘트 바닥과 거칠고 울퉁불퉁한 벽들이 주는 폐쇄적인 느낌, 동네 친구의 닫힌 대문에 던지던 돌과 같은 어린 날의 히스테리 같은 느낌을 품고 있다.

장소의 기억들은 다소간 남루하며 허위와 환상에 물들어 있으며, 골목의 기억들은 조금 더 부끄럽고 은밀한 순간을 감추고 있다.

무력한 세월이 지나 어디에서 살아야 하는지가 비로소 중요한 질문이 되었을 때, 나를 다시 매혹 시킨 곳은 골목의 공간들이었다. 아파트와 오피스텔 같은 거대한 공간들을 전전하다가 문득 장소에 대한 감각을 되살려주는 골목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골목의 시간으로부터 오래 떨어져 살았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주거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식과 태도의 문제이다. 골목이라는 장소는 골목이 만들어주는 삶의 시간이 보존되는 곳이다. 거리가 빌딩과 빌딩 사이의 큰 도로들이 구축하는 수직과 수평이 만드는 소실점을 향한 이미지라면, 골목은 작은 집들 사이에서 한 사람의 뒷모습이 비로소 보이는 장소이다. 거리에서 소음과 인파 가운데 사람을 마주치는 것과, 골목에서 굽어진 골목 저편으로 언뜻 사라지는 사람의 이미지를 보는 것은 다른 감각의 세계이다. 서로 기대어 있는 골목의 작은 집들은 쾌적함과 견고함이 아니라 방치된 것들의 아름다움을 호출한다. 골목은 거리의 원근법을 무력하게 만들고 공간과 공간 사이의 내밀한 시간을 상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원근법이 무의미해지는 자리에 예기치 않은 굴곡과 방치의 시간이 흐른다. 골목에서 시선의 주체는 그 권능을 내려놓아야 하며, 비로소 공간과 접촉한다.

용산이라는 곳에 살게 되었을 때, 나를 매혹시킨 것 중의 하나는 무서운 수직성으로 올라가는 대형 건물들 사이에서 여전히 낡고 남루한 시간을 보존하고 있는 골목들이었다. 청파동과 해방촌의 골목들은, 미군부대의 높은 담이 가로막혀 있고 한편으로는 무서운 속도로 개발이 진행되는 용산에서 다른 시간의 잔해가 남아 있는 장소였다. 어떤 계획도 없이 시간의 우연과 왜곡이 만들어낸 휘어진 청파동 골목길들은 돌발적인 아름다움을 만든다. 지붕과 담이 비뚤어진 주택들은 쇠락함과 무기력의 느낌을 자아낸다. 어떤 골목길은 낡고 비밀스러우며, 어떤 집들은 때로는 공중에 떠 있거나 섬처럼 고립되어 있다.

‘하숙’이라고 쓰여 있는 작은 간판들이 무수히 붙어 있는 다세대주택들 사이로, 골목 안에 아무렇지도 않게 숨겨져 있는 어두운 적산 가옥들은 그곳이 청파동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용산을 거쳐 세종마을이라 불리는 서촌에 살게 된 것은 이 거리 안에 숨겨진 골목들 때문이다. 용산의 미군부대가 주변 개발을 제한한 결과 골목과 녹지들이 보존된 것과 같은 아이러니가 발생한 서울의 또 다른 지역. 조선 후기의 ‘위항인’이라 불렸던 역관 등 중인 계층의 삶의 터전이었고, 위항문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근대초기 문인 예술가들의 삶의 무대이기도 했던 곳. 여기 골목들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은 좁은 골목들 사이의 낡은 한옥들과 금천교시장, 통인시장의 조밀한 번잡함이 함께 만드는 예기치 않은 미학이다. 그 골목들 위로 어디에서나 보이는 인왕산과 북악산의 위압적이지 않은 능선은 그 미학을 소리 없이 완성한다.

이 거대한 도시에서 대규모 빌딩과 아파트 단지를 찾아볼 수 없는 거의 유일한 지역에 속할 이곳의 골목 안쪽의 내밀한 풍경은 산그늘 아래 숨겨져 있다. 주차 공간이 부족하여 거주지에 차를 두는 것을 포기한 대가로 마주치게 되는 것은, 걷는 자에게만 나타나는 골목들 의 비밀, 그 공간과 시간의 굴곡과 반쯤 가렸다가 문득 다시 눈을 뜨는 골목의 얼굴들이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보면 그 골목들이 만드 는 시간은 오래되고 해명되지 않는 과거라기보다는 여전히 가닿을 수 없는 미래의 편에 가깝게 된다.

삶에 대한 원근법적 시선의 오만을 포기하는 자에 대해 골목들은 예기치 않은 사소한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골목에서 내가 지금 보는 것은 그 작은 미래의 실루엣이다.

 글 이광호(서울예술대학교 교수, 문학평론가) 사진 남승준(AZA 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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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소식] 골목의 미래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원본시스템 서울사랑 제공부서 시민소통담당관
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16-07-19
관리번호 D0000028036990 분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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