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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울] 오래된 미래_민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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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우연히 구겨진 도시가스 독촉 고지서를 발견했다. 이미 두 달이나 연체됐고, 3일 후까지 납부를 하지 않으면 도시가스가 끊어진다는 섬뜩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자동이체를 해 놓았는데 왜 그렇게 됐을까 살펴보니, 세 달 전 이사하면서 도시가스를 이전 신청해서 잘 쓰고 있었기에 그대로 연결될 거라고 생각했던 게 실수였다. 편지라고 오는 게 거의 고지서들 밖에 없으니 늘 시큰둥하게 대했기에 뒤늦게나마 발견한 걸 다행으로 여기며, 자연스레 도시가스 사이트에 들어가서 이체 신청을 시도하는 지극히 순진한 선택을 했다.


그런데 각종 정보를 기입한 후 마지막 확인 단계에서 아무리 버튼을 눌러도 내용이 진행되지 않는 것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갸우뚱하며 처음부터 다시 몇 번을 반복하다 끝내 지쳐 그 영업소에 전화를 걸었다. 그랬더니, 자동이체 신청이 되더라도 당월에 바로 실행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숨을 내쉬며 바로 이체를 할 수 있는 지로 사이트를 방문했다. 다시 요구하는 정보를 다 기입하고 결제를 하려 하니, 그때서야 액티브 X 관련 설치 요구들이 이어졌다. 생각해보니, 얼마 전 새로 하드를 교체하면서 무수히 깔려 있던 그 액티브 무리들이 다 사라졌던 것이다.


겨자를 삼키는 마음으로 이것저것 시키는 대로 설치했다. 답답한 건 하나를 설치하면 창이 초기화 되면서 각종 정보들을 다시 또 기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끓어오르는 걸 누르며 진행하다 본인 확인 절차를 맞닥뜨렸다. 휴대전화 검증은 최근 스팸에 대한 급증한 노이로제 탓에 대신 아이핀 검증이란 걸 택하기로 했다.

아이핀의 계정을 이용하려면 새로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만들어야 한다. 기존 아이디보다 훨씬 길고 어려운 조건이라 낯선 아이디와 비밀번호 하나를 또 탄생시켜야 했다. 외울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며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억지로 조합했다. 하나, 허탈하게도 이미 만들어놓은 계정이 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고, 돌고 돌아 다시 시작해야 했다. 잊어버린 비밀번호를 겨우 찾아내고, 그것이 끝인가 싶었지만, 막판 결제 시도 중에 예상하지 못한 공인인증서 문제를 또 마주하게 됐다. 어느새 만기가 지난 것이다. 평소 쓰던 은행 사이트로 들어가 공인인증서를 새로 발급받았다. 그런데 웬걸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이다. 혹시 과정에 실수가 있었나 해서 또다시 반복 시도했지만 안 되는 것이다. 미칠 노릇이었다. 뒤지고 뒤져 보니 공인인증서를 그 사이트에 등록해야만 그 인증서를 쓸 수 있었다.

하늘 꼭대기 어지러운 무중력 상태에서 인공위성의 날개를 수리하는 심정으로 냉정한 사이버 공간에 혼자 버려진 채 1시간의 사투를 벌여 결국 내가 얻어낸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그냥 운동 삼아 동네 은행에 마실 다녀오는 선택으로 단순히 넘어갈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플로피 디스크로 부팅을 하던 286 컴퓨터 시절부터 시작해서 변덕 심한 윈도 95를 정말이지 95번 넘게 다시 깔며 새로운 기종을 누구보다 빨리 소화해냈던 자존심 강한 얼리 어댑터였기에, 최신 방식이라 떠오르는 것들은 거리낌없이 흠뻑 받아들이고 그 새 시스템이 존재하는 이유를 뜨겁게 변호해주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실상 이런 시스템은 타인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스템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구나, 하는 깨달음이 피어 올랐다. 그러자 부모님 세대는 이렇게 급변하는 시스템 앞에 아예 저항조차 불가능하겠구나, 라는 탄식과 동시에 아직은 꽤 적응력도 있고, 남다른 전투적인 의욕도 있지만,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이 든 구세대가 되어 이런 순간마다 갈팡질팡 방황하며 좌절할 막막한 내 가까운 미래의 두려운 풍경이 쓰나미처럼 밀려들었다.

얼마 전 120년 전의 런던과 서울의 변모를 비교해 놓은 사진을 보았다. 과거와 미래가 놀랍도록 아름답게 공존하는 모습으로 속 깊은 감탄을 자아내는 런던과 달리, 완전히 포맷되고 새롭게 설치된 신도시 프로그램 같은 서울이 안쓰러울 뿐이었다. 창경궁이 30년 전엔 창경원이었고 그 궁의 주인이 원숭이들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광속으로 세상이 바뀌고 있고, 기억도 망각도 제자리를 찾을 틈도 없이 우리의 터전은 새로운 정보로 덮여 씌어지고 있다. 결국 미래엔 무엇이 남게 되는 걸까. 욕조에서 물이 넘치는 이유가 있고, 하늘색이 파란 이유가 있고, 과일마다 색깔이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낡고 세속적인 것의 장엄함을 잊지 말자고 꾹꾹 다짐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미래는 결국 오래된 것들일 테니.







글 민규동(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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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울] 오래된 미래_민규동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원본시스템 서울사랑 제공부서 시민소통담당관
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16-07-19
관리번호 D0000028036814 분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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