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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서울 기행] 대한민국 최고의 교육 특구, 관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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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옛날 선비들은 관악산에 들어가 공부하면 과거에 급제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관악산은 벼슬산이라는 애칭이 붙었다.
1970년 관악산 자락에 서울대학교가 들어섰고, 신림동을 중심으로 고시생의 발길도 이어졌다.
이후 관악구는 명실공히 대한민국 최고의 교육 특구로 자리매김했다.



관악산에서 시작하는 관악구


해발 632m의 관악산(冠岳山)은 한양 도성의 남주작(南朱雀), 즉 법궁(法宮)인 경복궁(景福宮)의 조산(祖山) 또는 외안산(外案山)에 해당한다. 주산(主山)인 삼각산과 더불어 서울을 조응하는 2개의 큰 산 중 하나인 것이다.

예부터 개성의 송악산(松岳山), 가평의 화악산(華岳山), 파주의 감악산(紺岳山), 포천의 운악산(雲岳山)과 함께 경기오악(京畿五岳)의 하나로 산봉우리와 바위가 빼어난 명산으로 꼽혀왔다. 산봉우리는 불 모양이므로 풍수상 형세(形勢)는 화성(火星)으로, ‘왕도남방지화산(王都南方之火山)’이라 하여 화기(火氣)의 산으로 보았다.

관악구는 관악산을 등지고 북쪽으로 누워있는 형국이다. 관악구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관악산부터 올라보는 게 순서일 것 같다. 관악산에 오르는 길은 여럿이다. 과천쪽에서 올라오는 길도 있고 안양 쪽에서 올라오는 길도 있다. 그러나 가장 보편적인 산행길은 역시 서울대에서 시작하는 길이다.




임금 그리는 사연 담긴 연주암


서울대 정문 옆 관악산 입구에서 시작해 제1광장(호수공원), 제2광장을 지나 철쭉동산을 거쳐 제4야영장에서 잠시 쉰 후, 깔딱고개를 넘어 연주암(戀主庵)에 다다른다. 산행을 시작한 지 1시간 반쯤 지났다.


연주암은 신라 문무왕 17년(677년)에 의상 대사(義湘大師)가 관악산에 와서 연주봉 절벽 위에 의상대를 짓고 수행하기 위해 골짜기에 절을 건립한 후 관악사라 이름 지은 데서 비롯됐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관악사가 폐사되다시피 했는데, 충녕(세종대왕)에게 보위를 양보한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관악사를 현 위치로 옮기고 이름 또한 연주암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따라서 연주암은 임금을 사랑하는 두 형의 고귀한 뜻이 담긴 암자라 할 수 있다. 연주암 인근의 효령각(孝寧閣)에 효령대군의 영정을 모신 것으로 보아 연주암이 왕위를 양보한 후 불가에 귀의한 효령대군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찰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법당 앞에 들어선 3층석탑이 고려 후기 석탑 양식을 보여주고 있어 연주암이 그 이전에 창건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해 고려 말 충신이던 강득룡·서견·남을진 등이 고려 왕조가 멸망하자 관악산에 올라 의상대에 숨어 살면서 멀리 고려의 도읍이던 개경을 바라보며 통곡했는데, 이 때문에 ‘주군을 그리워한다’는 의미로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다.

연주암에선 불자가 아니어도 점심 공양을 무료로 제공해 산행객의 발걸음이 잦다. 비록 국수 한 그릇이지만 부처님의 너른 자비심이 담긴 공양이라 생각하면 먹기도 전에 배부터 불러온다. 정상 부근의 거대한 기상청 레이더를 바라보며 연주암을 떠나 연주대에 오른다. 너른 바위 위에 관악산 정상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우뚝 서있다. 큰 바위기둥을 세워놓은 듯한 꼭대기는 ‘갓뫼’ 또는 ‘관악(冠岳)’으로 불리는 이유를 웅변하고 있다. 북으로 서울대 관악 캠퍼스를 필두로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고, 남동쪽으로 과천 시내가, 남서쪽으로 안양 시내가 펼쳐졌다. 정상에 오른인증샷을 찍는 이들의 표정은 다들 동심으로 돌아간 듯 즐겁다.




사적(史蹟),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


2004년 9월 2일 개관한 이 미술관은 구(舊) 벨기에 영사관 건물로, 고전주의 건축양식의 이오니아식 실내 기둥과 벽난로 등 기존 건축물을 그대로 유지한 채 꼭 필요한 보수만 해 1900년대 초의 고전적 건축물과 현대미술이 소통하는 전시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사적 제254호로 지정된 구 벨기에 영사관은 1905년 서울 회현동에 준공했으나 도심 재개발사업으로 1983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해 복원했고, 1970년 우리은행 (당시 상업은행)이 불하받아 소유하다가 2004년 5월 문화 예술 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서울시에 무상 임대해 공공 미술관으로 꾸민 것이다.

총 면적 1천570m2로, 지하 1층·지상 2층 규모이며 다락방도 있다. 지하는 미술교육장, 1층과 2층은 전시실·사무실 공간으로 사용하며, 건물 외부에 잔디와 수목을 심어 야외 조각 공원을 조성했다. 기획 전시 위주로 운영하며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어린이 미술 교실과 방학 미술 특강 등의 미술교육 강좌도 진행한다. 이제 지하철 2호선 사당역에서 전철을 타고 낙성대역으로 향한다. 낙성대역 4번 출구로 나와 서울대 후문을 향해 올라간다.

강감찬 장군 유적지, 낙성대(落星垈)


약 500m쯤 가면 3만3천60m2 규모의 거대한 공원이 나온다. 이름 하여 낙성대공원(落星垈公園). 고려 시대 명장 강감찬(姜邯贊, 948∼1031년) 장군이 태어난 곳에 그를 기리기 위해 조성한 공원이다. 서울시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된 낙성대는 강감찬 장군이 태어날 때 출생지에 큰 별이 떨어졌다는 전설에 따라 붙은 이름이다.

낙성대공원으로 들어서면 탐방객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은 강감찬 장군의 기마 청동상이다. 말을 탄 채 칼을 빼 들고 앞으로 돌진하는 형상의 이 동상은 장군의 용맹스러운 기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 공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은 강감찬 장군의 사당인 안국사(安國祠)로, 사당 외에 안국문(외삼문), 3층석탑, 내삼문, 고려강감찬장군사적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강감찬낙성대(姜邯贊落星垈)’라는 글씨가 새겨진 3층석탑은 근처 강감찬 생가 터에 있던 것을 옮겨놓은 것으로, 원래 석탑이 있던 자리인 낙성대 유지(落星垈遺址, 관악구 봉천동 218-14)는 서울특별시기념물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인 사당 내부에는 강감찬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해마다 10월엔 강감찬 장군의 호국 정신을 기리는 추모제인 ‘낙성대인헌제(落星垈仁憲祭)’를 연다.

울창한 숲을 이루는 공원은 가을에는 단풍으로 곱게 물들어 풍광이 빼어나다. 자작나무 숲, 소나무 군락지, 참나무 숲, 사시나무 군락지, 전나무길, 버즘나무 숲이 형성되어 있으며 산책로 길이는 총 3km다. 토요일과 일요일 오전에는 ‘낙성대 숲 속 여행’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분수 시설을 갖춘 연못과 야외 놀이마당, 야외 예식장도 있다.



서울시 영어마을과 과학전시관


약 500m쯤 가면 3만3천60m2 규모의 거대한 공원이 나온다. 이름 하여 낙성대공원(落星垈公園). 고려 시대 명장 강감찬(姜邯贊, 948∼1031년) 장군이 태어난 곳에 그를 기리기 위해 조성한 공원이다. 서울시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된 낙성대는 강감찬 장군이 태어날 때 출생지에 큰 별이 떨어졌다는 전설에 따라 붙은 이름이다.

낙성대공원으로 들어서면 탐방객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은 강감찬 장군의 기마 청동상이다. 말을 탄 채 칼을 빼 들고 앞으로 돌진하는 형상의 이 동상은 장군의 용맹스러운 기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 공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은 강감찬 장군의 사당인 안국사(安國祠)로, 사당 외에 안국문(외삼문), 3층석탑, 내삼문, 고려강감찬장군사적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강감찬낙성대(姜邯贊落星垈)’라는 글씨가 새겨진 3층석탑은 근처 강감찬 생가 터에 있던 것을 옮겨놓은 것으로, 원래 석탑이 있던 자리인 낙성대 유지(落星垈遺址, 관악구 봉천동 218-14)는 서울특별시기념물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인 사당 내부에는 강감찬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해마다 10월엔 강감찬 장군의 호국 정신을 기리는 추모제인 ‘낙성대인헌제(落星垈仁憲祭)’를 연다.

울창한 숲을 이루는 공원은 가을에는 단풍으로 곱게 물들어 풍광이 빼어나다. 자작나무 숲, 소나무 군락지, 참나무 숲, 사시나무 군락지, 전나무길, 버즘나무 숲이 형성되어 있으며 산책로 길이는 총 3km다. 토요일과 일요일 오전에는 ‘낙성대 숲 속 여행’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분수 시설을 갖춘 연못과 야외 놀이마당, 야외 예식장도 있다.


▲ 서울대학교 관악 캠퍼스 / 서울대 캠퍼스에 있는 규장각



대한민국 대표 대학, 서울대


이제 국립서울대학교를 돌아볼 차례다.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대표 대학인 서울대는 1946년 8월 대학원과 9개 단과대학으로 구성한 국립대학교로 개교했다. 1950~1960년대 6개 대학과 3개 전문대학원을 설립하는 등 확장기를 거쳐 1968년 서울대학교 종합화 10개년 계획을 수립해 오늘의 관악 캠퍼스를 조성했다.

일본 도쿄대도 부러워할 정도로 광활한 캠퍼스를 보유한 서울대지만, 관악 캠퍼스 조성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비화가 있다. 박정희 정권은 1970년대 중반 대학로와 공릉동(공대 : 현 서울과학기술대 자리), 종암동(상대), 평화시장 뒤 을지로6가(음대), 용두동(사대와 가정대), 수원(농대) 등에 흩어져 있던 단과대학을 관악산 밑으로 통합하는 조치를 취한다. 이에 앞서 박정희 대통령은 1960년대 중반 관악산 북면 기슭에 위치한 관악컨트리클럽 골프장 부지 66만1천200m2와 주변 토지 264만4천630m2를 합한 약 330만5천800m2의 부지를 서울대의 새 둥지로 직권 결정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등장한 것이 음모론이다. 서울대 각 단과대를 중심으로 도심에서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각종 반정부 시위를 막고, 학원 사찰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서울에서 가장 외진 관악산 밑으로 토끼몰이를 하듯 몰아버렸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음모론은 한동안 그럴싸하게 세간에 퍼졌다. 그도 그럴 것이 1975년 봄 관악 캠퍼스가 문을 엶과 동시에 정문 입구엔 전투경찰 병력 1개 대대를 지휘하는 세계 최대 파출소가 들어선 것이다. 그렇다고 반독재 투쟁의 기가 꺾일 리도 없었고, 민주화를 막을 수도 없었다. 1980년대까지 수다한 젊음이 분신 등의 의사 표시로 혹은 구호와 화염병으로 조국의 민주화를 외쳤고, 그 토대 위에 우리는 마침내 민주화를 쟁취했다.



규장각, 박물관, 미술관


2학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관악 캠퍼스는 부산하다. 강의실을 찾아 종종걸음을 치며 분주한 학생들 사이로 캠퍼스 투어를 해보자. 관악 캠퍼스에서는 일반인이 꼭 가봐야 할 곳이 최소 세 곳 있다.

먼저 정문에서 법학전문대학원 가는 길 오른편에 위치한 규장각(奎章閣). 조선 시대 숙종 20년(1694년)에 역대 왕의 친필과 저술을 보관하는 건물로 지은 규장각은 일제강점기에 운영권이 경성제국대학으로 넘어간 후, 서울대가 지속적으로 관리해오고 있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 세계기록유산 4종, 국보 7종 7천125책(冊)과 보물 26종 166점을 보유하며 한국학연구원도 겸한 기록물의 보고다. 학구열 높은 청소년에게는 좋은 탐방처가 아닐 수 없다. 대학본부 옆 건물인 박물관 역시 보고 배울 거리가 많은 곳으로 대지 6천165m2, 총면적 3천767m2에 소장 유물은 2만8천200여 점에 이른다. 소장 유물은 발굴과 구입·기증 등을 통해 수집한 것으로, 크게 역사 미술품·민속품·발굴 유물·현대미술품·자연사품으로 나뉜다.

역사 미술품에는 1930년 만주의 발해 유적에서 수집한 소조 불상·와당·도자 편 등의 유물과 박영철이 기증한 서화류가 있다. 이 중 발해 유물은 국내 유일의 고고 미술 자료로 학술 가치가 높고, 서화류 중에는 조선 시대 회화를 모은 <근역화휘> 3책과 글씨를 모은 <근역서휘> 37책, <겸현신품첩>, 단원 김홍도의 ‘수원성 실경 산수도’, 오원 장승업의 ‘십루병풍’ 등 명품이 많다.

민속품으로는 양주별산대놀이 가면, 파푸아뉴기니 민속품, 국내 유일의 만주·몽골·에스키모 민속품이 있고, 발굴 유물로는 연천 전곡리 구석기시대 유물, 양양 오산리 신석기시대 유물, 여주 흔암리 청동기시대 유물, 서울특별시 강동구 일대의 백제 시대 유물이 있다. 이 밖에 현대미술부 소장품으로 회화·판화·서예·사진·공예 등 국내외의 미술 작품과 자료가 있으며, 자연사부 소장품으로 동식물·암석·광물·화석 등의 표본이 있다. 특히 이번 학기엔 매주 수요일 오후 ‘문화와 과학으로 본 조선’이라는 강좌를 개설해 시민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정문 왼편에 있는 미술관도 안 보면 서운한 곳. 본격적인 대학 미술관으로는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는 서울대 미술관(SNUMOA)은 상설 전시와 수준 높은 기획 전시로 일반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 순대곱창볶음이 유명한 순대촌 / 신림동 고시촌



고시촌, 순대촌, 녹두거리


관악구의 특별한 먹거리에는 무엇이 있을까? 지하철 2호선 신림역 3·4번 출구 근처에 가면 답이 나온다. 바로 순대다. 먹성은 좋으나 주머니가 가벼운 인근 고시촌 청년들을 상대로 1980년대 초부터 생기기 시작해 현재 300여 개의 크고 작은 상가가 모여 ‘원조민속순대타운’으로 조성한 이곳은 각종 순대 요리를 착한 가격에 맛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대표 메뉴는 순대곱창볶음. 특유의 매콤한 맛 때문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다고.

상권의 급속한 발전에도 20여 년 동안 방치돼 칙칙한 분위기를 연출했으나, 최근 가로를 정비하고 야간 조명등을 설치하는 등 리모델링을 마치고 화려한 모습으로 재단장했다. 인근에 롯데시네마 등 갖가지 문화 시설이 들어서 젊은이의 명소로 거듭났다. 관악구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요충지로 각축의 대상이었다. 1963년 서울시 행정구역이 확장돼 경기도 시흥리, 독산리, 가리봉리, 신림리, 봉천리를 영등포구에 편입하고 새로 편입된 지역의 행정을 처리하기 위해 설치한 관악출장소가 모태다. 1968년 1월 영등포구 직할로 편입된 관악출장소는 1973년 7월 1일 영등포구 일부 지역과 함께 현재의 동작구·서초구 일부를 편입해 관악산 이름을 따 관악구로 신설됐다.





글 윤재석(언론인) 사진 나영완 일러스트 문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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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서울 기행] 대한민국 최고의 교육 특구, 관악구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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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1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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