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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서울 기행] ‘한강 기적’의 산실, 영등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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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작가 이호철이 동아일보에 연재한 <서울은 만원이다>엔 당시 서울 인구가 300만 명으로 나온다. 그중 3분의 1인 100만 명이 영등포구에 살았다. 더 중요한 건 영등포구가 서울 시민의 주요 일터였다는 점이다.



이곳엔 일제강점기부터 광복을 거쳐 한국전쟁 후 대한민국을 먹여 살린 각종 제조업체가 포진해 있었다. 이른바 경인공업지대 영등포지구로 불린 이 일대는 기계·섬유 (면·모방직, 의류)·화학(고무·화학 제품, 피혁, 약품)· 유리 제품 등 각종 제조업을 망라한 종합 공업지대였다. 당시 쌍벽을 이루던 오비맥주와 조선맥주(크라운맥주) 공장도 영등포에 있었다. 심지어 가발 공장과 철공소까지 즐비했다. 


여기에 1965년 구로동·가리봉동 일원에 수출을 겨냥한 한국수출산업공단(구로공단) 1단지를 착공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최대 공장 지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구로구 편 참조). 그러니 사람이 꼬이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지금은 민자 역사로 화려하게 단장한 영등포역. 하지만 개발 연대에 그곳은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한 소년·소녀들이 난생처음 서울이라는 땅에 발을 디딘 생경한 공간이었다. 입 하나라도 덜기 위해 집을 나온 우리의 형제와 누이들은 영등포에만 가면 먹고살 수 있는 직장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로 서울행 열차에 올랐고, 영등포역을 꾸역꾸역 빠져나와 공장을 찾았다. 


그들은 하루 종일 밀가루를 뒤집어쓴 눈사람이 되어야 하는 동립산업(1948년 설립)에서, 후각을 자극하는 달콤함과는 거리가 먼 제일제당(1953년 설립)에서, 섬유 먼지가 폐부에 쌓이는 방림방적(1962년 설립)에서 청춘을 소진해야 했다. 사람이 많이 꼬이다 보니 자연스레 생겨난 게 숙박 시설과 유곽. 숙박 시설이라고 해봐야 500원 정도 주면 하룻 저녁 쉴 수 있는 냄새나는 여인숙이 대부분이었고, 그보다 낫다고 해도 여관이 고작이었다. 서울역 인근 양동, 청량리역 부근 588번지 일대, 종로3가(일명 종삼), 동대문 기동차 종점 근처와 함께 영등포역 근처가 당시 서울의 5대 사창가였다.


경제 여건 변화로 역할 축소

이처럼 많은 사연을 간직한 영등포는 가요사에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1962년 오기택은 데뷔곡 ‘영등포의 밤’(김부해 작사·작곡)으로 혜성과 같이 나타나 한국 가요계를 주름잡았다. 개발 연대에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산실이기도 한 영등포는 그러나 경제성장과 산업구조 개편으로 몸살을 앓았다. 전국 곳곳에 우후죽순처럼 신설되는 공단으로 공장이 옮겨갔고, 영등포 공업지대는 점점 공동화되어갔다.


구(區)의 재정 형편이 계속 나빠지는 상황에서 공룡 같은 몸집을 유지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서울시는 영등포구 다이어트에 들어갔다. 1973년 관악구(현 동작구 포함)를 필두로 1977년 강서구(현 양천구 포함), 1980년 구로구(현 금천구 포함) 등을 차례로 분가시켰다. 그리하여 한때 성동구와 함께 서울 한강 이남을 동서로 양분하면서 거대 행정구역을 자랑하던 구의 영화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영등포엔 쇠락한 공장들과 영등포역 주변을 무대로 웃음을 파는 여인들, 그리고 서울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영등포시장과 청과물 시장 등이 옛 영화를 반추하며 졸고 있을 뿐이었다. 카바레와 나이트클럽이 바람난 부인네와 놈팽이들에게 유혹의 손짓을 하는 가운데, 삶의 질주에서 처진 이들이 하나 둘 여인숙으로 모여들었다. 그것도 모자라 영등포 쪽방촌이라는 한 뼘 공간으로 전락하는 이도 1천 명 가까이나 됐다. 끼니를 제대로 채우나, 아프면 치료를 제대로 받나?



노숙인의 대부와 영등포 슈바이처
이런 버림받은 군상에게 안식처가 나타났으니 바로 광야교회와 요셉의원이다. 타임스퀘어 맞은편 영등포역 6번 출구 근처에 있는 광야교회(담임 임명희 목사)는 1987년부터 이곳 쪽방촌 주민들(현재 500여명)과 끊임없이 모여드는 영등포역 주변의 노숙인들(쉼터 포함 200여명)을 섬기며 이들의 복음화를 위해 애쓰고 있다. 노숙인 쉼터에서 100여 명이 공동체 생활을 하며 재활하기 위해 애쓰고 있으며, 쪽방 상담소를 통해 쪽방촌 주민과 노숙인에게 각종 서비스를 제공한다. 무료 급식(매일 세끼), 진료와 이·미용, 사회 복귀 훈련, 독거노인과 지체장애인을 대상으로 일일 온천 나들이와 매년 5월 무료 합동 결혼식도 거행하고 있다.


광야교회 바로 옆, 역시 쪽방촌 골목 한가운데에 붉은 벽돌로 지은 낡은 3층 건물이 하나 있다. 요셉의원. 이곳엔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아파하는 이들을 보듬으며 살아가는 이가 있다. ‘영등포 슈바이처’ 신완식(61세) 박사다. 요셉의원은 1987년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로 불리던 고(故) 선우경식 박사가 세운 무료 병원이다. 정부나 서울시로부터 어떤 지원도 받지 않는다. 선우 박사가 2008년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 이곳을 지키겠다며 나선 이가 신 원장이다. 신 박사는 감염내과 분야 한국 최고 권위자로 가톨릭의대 교수이자 여의도성모병원 내과 과장, 가톨릭중앙의료원 세포치료사업단장과 가톨릭생명위원회 위원을 겸직하던,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나가던 의사이자 교수였다. 


그런 그가 2009년 2월, 정년이 6년이나 남은 교수직을 내던지고 단 한 푼도 받지 못하는 이곳으로 옮겨왔다. 그리고 지금 노숙인과 행려자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그들과 함께 쪽방촌을 지키고 있다. 건강보험료를 내지 못하거나 주민등록이 말소된 이들이 진료 대상이다. 그는 늘 바쁘다. 필자가 찾았을 때도 근 30분을 기다린 후에 수인사를 나눴다.
“환자들의 상태가 좋지 않고 장애나 치매가 있는 분도 꽤 있어 진료 시간이 많이 걸려요. 하지만 이곳에서 제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입니다. 의사로, 또 교수로 부족한 것 없이 나만을 생각하며 살 때는 좀처럼 꺼내지 않았던 말이지요.”


요셉의원은 밤에도 문을 연다. 신 원장은 100명이 넘는 의사와 간호사, 500여 명의 자원봉사자 모두가 고맙단다. 그동안 50만 명이 넘는 환자가 치료를 받았다. 그들이 받은 건 의술이 아니라 인술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하다. 운영은 어떻게 하나? 2천여 명의 정기 후원자가 든든한 곳간이란다.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듯 이곳 쪽방촌에도 사랑의 아름다운 꽃두 송이가 활짝 피어 있다.


쪽방촌도 아름다울 권리가 있다!
천국 두 곳을 둘러보고 골목을 나오니 저쪽 고가도로 밑에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묘한 구조물이 보였다. 빨강·노랑·파랑의 삼원색으로 화사하게 칠한 컨테이너를 3층 높이로 얼기설기 쌓아 만든 ‘영등포 쪽방촌 임시 거주 시설’이다. 폐컨테이너를 재활용해 얹어 만든 이 구조물은 잿빛 동네에서 도드라지면서도 주변과 잘 어울리며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서울시가 영등포역 부근에 밀집한 쪽방촌 건물을 개선하면서 쪽방에 입주하려는 이들이 공사 기간 동안 머물 수 있는 임시 숙소로 지은 것이다. 컨테이너 17개로 숙소 36실을 배치했으며, 휴게실·샤워실 등 부대시설도 따로 마련돼 있다. 설계자는 젊은 건축가인 위진복(40세) UIA 건축사사무소 소장. 위 소장은 “단순히 컨테이너를 포개고 쌓으면 될 것 같지만 사람들이 편하도록 동선을 내야 하고, 구조적으로 안정적이어야 하며, 또 아름다워야 하기 때문에 시안을 50여 가지나 만들며 고민했다”고 설명했다. 그런 고민의 선물인지 이 가건물은 올해 초 열린 대한민국 공공건축상에서 국토해양부장관상을 받았다. “정식 건물이었으면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심사 위원장의 말처럼 정성과 사랑이 깃든 작품은 영등포 쪽방촌 입주자들에게 천사가 준 보금자리다. 그러고 보니 꽃이 세 송이다.




개발로 화려하게 떠오른 여의도
아름다우면서도 조금은 슬픈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예전에 ‘너섬’, ‘양화도’, ‘나의주’ 등의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 여의도로 출동하자! 영등포라는 단어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공간, 여의도. 지금은 섬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육지에 인접해 있지만, 샛강을 사이에 둔 8.35km2 크기의 엄연한 하중도(河中島)다.


모래땅으로 된 범람원으로 조선 시대에 말을 방목하기도 한 이곳은 1916년 일제가 간이 비행장을 건설하면서 용도가 달라졌다. 광복 석 달 뒤인 11월 23일 김구 선생이 중국 충칭(重慶)에서 입경(入京)한 곳도 여의도 비행장이었다. 미군과 우리 공군이 잇따라 기지로 쓰다가 1968년에 서울시가 상업·금융 업무·주거 지구로 개발하기 위해 윤중제(輪中堤) 공사를 착공하면서 대변신했다.


섬을 가로지르는 활주로 자리엔 독재의 상징인 23만m2 규모의 5·16광장(여의도광장)이 들어섰다. 이곳에선 국군의 날 퍼레이드나 각종 관제 궐기대회, 대규모 종교 행사 등이 열렸고, 평소엔 남녀노소가 뒤섞여 자전거를 탔고, 데이트를 하기도 했다. 여의도광장 서편에는 국회의사당·KBS 본관·여의도 순복음교회 등이, 동편에는 MBC·TBC(동양방송, 현 KBS 별관)·전국경제인연합회·증권거래소(한국거래소)·LG트윈 빌딩·아파트군 등이 각각 자리 잡았다. 한때 우리나라 최고층 빌딩이던 63빌딩(249m)도 들어섰다. 그런데도 여의도는 한동안 을씨년스러웠다.


1997년 외환 위기는 여의도에 개발의 찬스였다. 그 한해 전 서울시가 여의도광장을 공원으로 만들면서 변화의 기미를 보인 여의도는 IMF 사태 이후 우후죽순격으로 들어온 외국자본에 의해 피동적이나마 개발호기를 맞았다. 자고 나면 수다한 빌딩이 들어섰다.


국내 재벌도 경쟁적으로 사옥을 짓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작년 하반기 여의도 정중앙에 완공한 서울국제금융센터(IFC Seoul, 이하 IFC)는 여의도의 새로운 랜드마크다. IFC는 3개 빌딩 연면적이 무려 26만m2로 여의도공원보다 크다. 그중 IFC 몰은 높이 279m로 현재 국내 최고층 건물로, 요즘 유행하는 다크 블루 글라스 빌딩이다. 하지만 바로 옆에서 올라가고 있는 338m 높이의 파크원 타워가 올해 안에 준공되면 IFC 몰도 1위 자리를 내줘야 한다. 


행정구역상 여의도동에 속한 여의도는 맨해튼처럼 복합 지구다. 국가보훈처와 한국거래소 등 정부 부처와 공공 기관 19개를 비롯해 언론기관 5개, 복지시설 17개, 종교 시설 8개, 체육 시설 2개, 병·의원 60개, 학교 6개, 금융기관 59개, 공원(샛강생태공원 등) 5개가 자리하고 있다. 


필자도 1998~2010년 여의도와 인연을 맺었다. 서소문에 있던 신문사에서 20년 기자 생활을 마치고 이곳에 있는 회사로 옮긴 것이다. 지하철 5호선 여의나루역에서 내려 여의도공원을 가로지르는 출근길은 상큼했다. 점심 식사 후 또는 야근 중에 드넓은 여의도공원을 유유자적거니는 맛은 또 어땠나! 그 또한 지나간 세월이 되어버렸다.


여의도에서 10여 년을 보낸 경험칙상으로 가장 아쉬운 점은 인정미가 미흡하다는 것이다. 뭐랄까, 도회 중에서도 가장 도회적이다(강남보다 더). 그래서인지 정이 잘 가지 않는다. 일터가 있었고, 국제 문제와 환경 이슈 평론을 위해 근 10년 가까이 드나든 KBS와 MBC가 있는 여의도지만 발길이 이쪽으로 잘 향하지 않는다. 오늘 나의 여의도 방문은 그래서 상당한 사건이다.


창작 공간의 본산, 문래예술공장
이제 여의도를 뜬다. 행선지는 영등포역에서 경인로를 따라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문래예술공장. 이곳은 각 지자체가 경쟁적으로 짓고 있는 ‘예술 공장’의 원조 격으로 워낙 유명하다. 다음카페에 ‘상상과 열정을 담금질하는 창작 공간’이라는 다소 도발적인 표현으로 소개된 문래예술공장은 2010년 1월 28일 서울시창작공간으로 문래동 철공소 거리의 옛 철재 상가 자리에 개관했다. 자생적 예술 마을인 문래창작촌을 포함해 공동작업실, 다목적발표장을 비롯해 녹음실, 세미나실 등 국내외 예술가들의 창작 및 발표 활동을 위한 다양한 지원 시설을 갖추고 있다.


예전의 허름한 철재 상가에서 예술 공장으로의 변신은 지역 정서에도 혁명을 가져왔다. 문래동 주민들은 이제 자신들의 동네를 자신 있게 말한다. “나, 문래동에서 살아!”


문래동에서 안 가보면 섭할 곳 또 하나. 바로 ‘대안 공간 정다방 프로젝트’라는 희한한 이름의 장소다. 지하철 2호선 문래역 1번 출구에서 도보로 5분 정도 걸으면 만나는 사거리에서 오른편을 향해 다시 5분 정도 걸으면 공구 상가와 소형 자동차 정비소가 나오는데 그 가운데에 정다방 프로젝트가 자리 잡고 있다. 이름에서 짐작하듯 예전 동네 다방이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의 촌스럽고 쾨쾨하던 분위기는 간데없고 깔끔하고 세련된 레스토랑으로 변신했다. 무대를 갖춰 이따금 공연도 하고 전시회도 연다. 빨간 립스틱 바른 마담의 간드러진 웃음은 없어도 도시의 망중한을 나른하게 느끼기엔 최적의 장소다.



신선이 노닐던 섬, 선유도
또 다른 섬 한 곳을 돌아보는 것으로 영등포 기행을 마치련다. 양화동에 있는 선유도(仙遊島)다. 아니, 섬 전체가 공원이니 선유도공원이다. 우선 선유도로 들어가는 수단부터 독특하다. 먼저 다리. 한강공원 양화지구와 선유도를 잇는 선유교는 날렵한 아치형 다리다. 설계자는 프랑스의 유명 건축가 루디 리치오티(Rudy Ricciotti). 파리 센 강의 미라보 다리를 연상시킨다고 해서 ‘서울의 미라보 다리’로 명명한 보행자 전용 다리로 밤에는 형형생색의 조명을 입고 환상적인 몸매를 뽐낸다. 다른 하나는 양화대교 남측과 연결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것이다. 이 방법 역시 섬으로 들어가는 수단치곤 독특하지 않은가!


2002년 4월 26일 개장한 이 공원은 양화대교 아래 선유정수장 시설을 활용한 재활용 생태 공원으로 부지 면적은 여의도공원의 절반 크기인 11만㎡다. 본래 선유봉이라는 작은 봉우리 섬이던 선유도는 일제 강점기에 홍수 대비와 길 포장용으로 암석을 채취하면서 깎여나갔다. 1978~2000년 서울 서남부 지역에 수돗물을 공급하는 정수장으로 사용하다가 2000년 12월 폐쇄한 뒤 서울시가 공원으로 조성했다. 한강역사관과 동식물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수질 정화 공원, 시간의 정원, 물놀이장 등의 시설이 들어서 있다.


한강 유역의 지질과 수질, 수종, 어류·조류·포유류 등 생태계와 한강을 주제로 한 지도, 시민의 생업, 한강 변 문화 유적 등을 엿볼 수 있다. 수생식물원에는 물봉선과 쇠뜨기·수련·검정말 등 각종 수생식물 1만여 본이 심어져 있고, 시간의 정원에는 118종의 수목과 풀·꽃을 여러 개의 작은 정원에 나눠 심어 사계절을 느낄 수 있도록 꾸몄다. 특히 시간의 정원은 세로 41m, 깊이 5m 규모의 침전지 2개를 활용한 곳으로 이곳이 한때 수원지였음을 보여준다. 구조물의 칙칙한 색깔과 거친 표면, 불규칙한 선이 각종 식물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한 느낌을 준다.






글 윤재석(언론인) 사진 나영완 일러스트 문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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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서울 기행] ‘한강 기적’의 산실, 영등포구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원본시스템 서울사랑 제공부서 시민소통담당관
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16-07-19
관리번호 D0000028036714 분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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