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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산책] 북촌에 남은 100년 고택, 백인제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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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전통 한옥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동네, 북촌. 한옥마을이라는외형뿐 아니라 이 동네에 연을 두었던 많은 인물이 있어 더욱 의미 깊은 곳이다. 하지만 궁궐에 인접한 이 가치 있는 동네에 100년 넘는 가옥이 윤보선 전 대통령이 거주하던 집과 해방 전후 장안의 최고 외과 의사이던 백인제 선생의 가옥 두 채뿐이라는 사실은 역사 도시 서울을 논할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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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원을 향한 미닫이문은 유리지만 과거에는 창호지로 되어있었다.- 지붕 합각에 삼태극 문양이 보인다.이 외에도 집 안 곳곳에 보이는 삼태극 문양은 친일파 집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의아해지기 마련인데, 이는 애석하게도 태극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귀족 가문에 많이 쓰는 삼파문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더욱이 데라우치 일본 총독이 직접 내려준 것이다.

이 거대한 집을 처음 구상한 이는 친일파 집안 출신의 한상룡이란 기업인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북촌에 호사스러운 저택을 짓기로 마음먹고 1906년부터 부근의 집 열두 채를 사들여 부지를 조성해나갔다. 그리하여 마침내1913년 오늘날의 백인제 가옥이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작은 언덕 위에 지은 이 집은 완공 당시 집에서 경성 시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로 전망 또한 뛰어났다고 전해오는데, 높은 집들이 즐비한 오늘날에는 쉬이 상상이 가지 않는 풍경이다. 처음부터 100칸이 넘는 큰 집에 말도 많았는데, 그가 이토록 집 자체에 공을 들인 이유는 다름 아닌 사업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의 친일 행위는 성공적인 사업을 위해 필수였고, 일본 관료와 사업가들을 집으로 초대해 사교 범위를 넓힐 계산이었던 것이다. 그에 따른 집 구조는 전통 한옥과의 차별성을 가져왔고, 지금까지도 큰 변형 없이 아픈 역사를 더듬어볼수 있는 귀한 공간으로 남았다.

먼저 조선 시대 양반집을 보면 유교 철학을 바탕으로 내외 구분을 철저히 해 안채와 사랑채가 확실하게 떨어져 있는데, 이 집에서는 사랑채와 안채를 속복도로 연결하고 있다. 또 크게 부각된 사랑채는 분합문으로, 모두 들어 올리면 사랑채를 둘러싼 마루와 합쳐져 확장이 가능하고, 정원을 향한 마루의 문들 역시 모두 열거나 떼어내면 연회에 부족함이 없게 너른 공간이 펼쳐지도록 설계되었다. 전통 가옥에서는 보기 드문 2층 구조도 특이한데, 현재는 마루가 깔려 있지만 예전에는 일본식 다다미방이었다고 하니 여기저기에서 일본인을 고려한 흔적들을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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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인제 가옥의 주 목재는 압록강 흑송을 사용했다. 흑송은 우리나라에서는 울릉도와 압록강 등지에서만 자라는 소나무로, 한양까지 운반하기란 그리 녹록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나무를 건축 재료로 사용한 발상과 능력이 놀랍다. 소나무 중 단단하지 않은 편이라 산지와 먼 중부 이남 지역에서는 잘 쓰지 않았다는 흑송은 일본과 러시아에서는 선호나는 목재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경성 박람회 때 처음 소개되었는데, 이마저도 외국인 초청을 염두에 둔 건축주 한상룡의 생각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오늘날 보수 공사에서 흑송이 아닌 새로운 소나무로 대체하면서 재료적 특성이 많이 훼손된 상태라고 한다.- 건물 사이를 연결하는 속복도는 일본적 요소를 풍기고 있다.- 눈길을 끄는 아름다운 화방벽. 중정에 내리쬐는 겨울 햇살이 포근하게만 느껴진다.

목적에 맞는 집을 완성한 이후에는 무릇 수많은 파티를 벌였음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오죽하면 당시 장안에 소위 ‘명사’라는 호칭이 붙은 사람들 중 한상룡의 집에 초대되지 않은 자가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조선총독과 경시총감을 비롯해 한자리한다는 일본인은 모두 이 집을 다녀갔다. 방문객 중에는 미국의 석유왕 록펠러 가문의 2세도 포함되어 흥미로운데, 당시 일본에서 중국으로 건너가는 도중 길지 않았을 한양 체류 기간에 이곳을 거쳐간 걸 보면 한상룡의 수완은 실로 대단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친일을 바탕으로 한 전성기는 영원할 수없었다. 오히려 친일 행위는 그를 몰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일본은 조선 정부가 경쟁 상대이던 러시아로부터 들여오려는 차관을 막기 위해 민족 자본 은행이라는 한성은행을 내세워 차단했고, 한상룡은 훗날 한성은행의 은행장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한성은행의 몰락은 일본인의 경영 참여로 이어졌고, 부실 은행의 정리와 함께 그의 대저택도 처분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친일로 쌓은 그의 친분은 이러한 몰락으로부터 아무런 구원이 되지 못했다. 결국 모든 친분은 허울뿐임을 깨달은 그에게 돌아온 건 조선인으로서의 한계였다. 그렇게 저택이 은행 소유로 넘어가면서 조선 상류층의 사교 공간은 막을 내렸다. 이후 조선중앙일보 부사장이던 최선익을 거쳐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수이던 백인제 선생에 이르기까지 자세한 기록 없이 조용히 자리를 지켜온 이 집은 2009년 서울시가 매입해 보수와 복원을 거쳐 개방하면서 현재 다시금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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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마루가 있는 별당채- 안국역에서 직진하여 왼쪽에 있는 헌법 재판소를 지나 계속직진하다가 오른쪽 재동초교를 지나 계속 직진하다가 왼쪽 길로 들어가면 오른쪽에 위치해있는 백인체 가옥 지도 그림. 

백인제 가옥을 찾아가는 북촌길은 늘 아기자기하고 분주한 느낌이다. 옹기종기 빽빽하게 들어찬 북촌 한구석에서 백인제 가옥으로 들어서면 과연 이곳이 북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고즈넉한 여유에 새삼 놀랍기만 하다. 정원 한편에 앉아 즐기는 여유는 과거 이 자리에서 펼쳐진 열강 인사들의 사교 연회에 대한 또 다른 역설의 시간들이다. 이토록 넓은 공간이 지금까지 존재하는 이유가 쓰라린 역사로 다가오는 것이다. 손등에 내려앉은 따뜻한 겨울 햇살이 아직은 멀게만 느껴지는 봄을 그립게 만든다. 추운 겨울이 봄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듯, 많은 이가 스쳐 지나간 소모적인 웃음 뒤의 이 고요가 조국의 소중함을 말해주는 것만 같아 가슴이 먹먹해질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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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솢을대문, 사랑채, 안채, 별당채를 그린 그림- 별채와 별당채는 후에 새로 지은 것으로 여러 번의 증·개축으로 처음보다 땅은 줄어들고 건물은 더 많아졌다. 사실 가옥의 이름을 남긴 백인제 선생은 한국전쟁 때 환자를 돌보겠다며 피란길에 오르지 않았다가 납북을 당했기에 실제 그가 이 집에서 거주한 기간은 몇 년 되지 않았다. 오히려 한상룡 가족이 더 와 닿는 이름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한 때 시장 공관으로 사용하려 한 시도가 친일파(한상룡은 이완용의 조카였다)의 집이었기에 무산되었던 걸 생각하면 또 다른 이름을 찾아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장희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 <사연이 있는 나무 이야기>의 저자.다양한 매체에 글과그림을 기고하고 있다.


글·일러스트 이장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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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16-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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