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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로 서울] 우리를 키운 건 8할이 대중음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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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와 1990년대는 우리나라 대중문화가 꽃을 피운 시기였다.
대중문화의 중심에 음악이 있었던 그 시절에 감수성을 키운 한 문화인이 대중음악을 들으며
성장했던 청춘들의 이야기를 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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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1990년대 청춘에게 ‘워크맨’이라고 불렸던 작은 카세트 플레이어와 LP 음반은
‘생필품’이자 하나의 로망이었다.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1980~1990년대를 지나온 청춘에게 가요는 단순한 음악적 취향이 아니었다.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뿐 아니라 저마다의 일상에서 성장과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소년 소녀들은 밤마다 라디오에 귀 기울이며 알 듯 모를 듯한 사랑의 감정을 가르치던 이문세와 변진섭의 선율에 빠져들었고, 수업 시간이 끝나면 교실 뒤쪽에 모여 김완선과 소방차의 춤을 흉내 내며 함께 어울렸다. 더러는 일찌감치 조용필 리사이틀과 들국화 콘서트를 오가며 환호와 반항을 배우기도 했다. 그 시절 서울의 길목마다 카세트 플레이어에서 울려 퍼지던 노래들은 그렇게 청소년들을 한 뼘씩 자라게 했다. 라디오를 듣는 것은 일종의 의식이었다.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더 좋아하거나, <황인용의 영 팝스>를 보다 애정하거나 ,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 쇼>를 좀 더 자주 듣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밤마다 DJ의 남다른 선곡과 사연을 듣는 행위는 말초적 재미를 뛰어넘는 세상과의 진지한 교감이었다. 유튜브와 OTT·SNS가 없던 시절에는 라디오와 DJ가 가장 친근한 친구이자 깊이 있는 상담가였으며, 절대적인 메신저였던 셈이다.

라디오 프로그램에 사연이 소개되기 위해 엽서를 보내곤 했다. MBC 라디오에서는 매년 <예쁜 엽서전>을 개최했다. 중학생 때 서툰 솜씨로 어린 왕자를 그려 넣고 엉터리 짝사랑 사연을 적어 보냈던 내 엽서가 뽑혀 전시된다기에 친구와 여의도백화점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건물 입구부터 끝 간 데 없이 길게 늘어선 관람객 줄을 보고 놀랐던 기억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서울의 골목길과 번화가에서 크고 작은 음반 가게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길보드’라 불리던 리어카 간이 상점에서 저렴하게 카세트테이프를 구할 수도 있었지만, 고등학생 시절부터 나와 친구들은 시험이 끝나는 날이면 종로의 ‘뮤직랜드’를 찾곤 했다. 공간 가득 음반으로 채워진 그곳에선 진짜 빌보드 메인 차트를 열람하고, 마돈나와 너바나의 최신 팝 CD까지 직접 꺼내 들어볼 수 있었다 .

성지 순례를 하듯 강남의 ‘타워레코드’를 찾는 친구도 많았다. 용돈을 아껴가며 카세트테이프와 CD를 구입하는 것은 음악을 향한 애정의 표현이었다. 음반을 고르는 순간의 두근거림, 그리고 더블덱 카세트 플레이어나 CD 플레이어로 처음 음반을 듣는 순간의 감동은 그 시절의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1992년 난데없이 등장한 ‘서태지와 아이들’은 단순한 인기 가수 이상의 문화 현상을 몰고 다녔다. 이전의 댄스음악과는 차원이 다른 음악과 춤 그리고 패션으로 젊은이들의 마음을 빼앗더니 대중적 멜로디 안에 사랑과 추억 말고도 세상에 대한 철학적 메시지를 담아내며 기성세대마저 감탄하게 만든 것이다. 결국 가요 사전 심의 제도를 폐지하도록 만든 팬덤의 영향력까지 일궈내며 서태지는 ‘문화 대통령’이라는 수식을 무심하게 얻지 않았던가.서태지가 살던 연희동 자택 사방을 수시로 둘러싸던 소녀들과 1996년 공식적인 은퇴식이 거행(?)됐던 성균관대 유림회관 안팎을 가로막던 팬들의 함성은 어느덧 역사가 되었다.

이후 H.O.T.와 젝스키스 등 1990년대의 대표 아이돌 그룹은 팬클럽 활동을 통해 적극적으로 음악을 향유하는 시대의 문을 열기도 했다. 콘서트는 음악 감상을 위한 무대가 아니라 하나의 성대한 축제였다. 같은 색 풍선을 흔들며 응원하고, 목청껏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일상에서 벗어나 특별한 순간을 경험하는 공감과 공유의 장이었다. 그 시절 대학생이 된 젊은이들은 당연하다는 듯 록카페를 찾았다. 라디오나 음반으로만 음악을 즐기는 것이 못내 아쉬웠던 것일까. 신촌을 중심으로 포진한 록카페는 음악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어둡고도 매력적인 장소였다. 최신 대중가요와 록 음악이 뒤엉켜 흐르는 사이사이 음악에 몸을 맡기고 마음껏 춤을 추는 청춘은 그 시절의 자유와 열정을 대변했다.

1990년대를 제법 흥미롭게 살아왔다면 그룹 에이스 오브 베이스의 노래 전주에 어깨가 들썩이는 관성을 거부할 수 없지 않을까. 그즈음부터 홍대의 클럽에서도 다양한 인디 밴드의 공연이 열렸고, 젊은 음악가들은 자기만의 색깔을 가진 신선한 음악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1980~1990년대 젊은이들에게 대중음악은 시간을 소비하는 취미나 공간을 채우는 배경음악이 아니었다. 노래는 우리의 감정을 표현하고, 서로를 연결하는 중요한 매개체였다. 친구들과 함께 모여 좋아하는 가요를 따라 부르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웃고 떠들던 시간은 모두에게 흐뭇한 추억으로 존재하고 있다. 서울의 거리와 상점, 카페와 클럽 곳곳에는 언제나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그 안에서 청춘은 꿈을 키우고 사랑을 나누며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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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8월 가요계 컴백을 위해 김포공항으로 입국하는 서태지를 기다리는 팬들. ©연합뉴스

정명효(전 파람북·베가북스 출판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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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시스템 서울사랑 제공부서 시민소통담당관
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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