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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도시] 서울을 가장 꼼꼼히 향유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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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가장 꼼꼼히 향유하는 법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을 때가 있다. 산 정상에서 먹는 컵라면은 맨날 먹던 그것과 전혀 다른 맛이고, 긴 여행 후 집으로 돌아가는 공항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서울 풍경은 수십년을 살아왔단 게 무색할 만큼 낯선 감정을 남긴다. 매일 하는 출근이지만 월요일 발걸음은 조금 더 무겁기 마련이고, 특히 연휴 다음 날의 회사 가는 길은 억장이 무너진다는 게 이런 것임을 온몸으로 체감케 한다. 관점의 차이가 빚어내는 생경함이다. 모든 게 그대로라 할지라도 어느 관점에서, 어떤 환경에서, 또 어디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는 확연히 다르게 인식한다. 심지어 여러 번 본, 그래서 도통 새로울 게 없을 무언가마저 아주 조금만 시점을 비틀면 낯선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달리기를 시작하고 그 생경함은 일상이 됐다. 달리며 도시를 누빈다는 건 걸어서는 닿을 수 없던 거리를, 차로는 들어설 수 없던 골목을,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와 전혀 다른 속도로 향유하는 일이다. 익숙한 도시를 완전 새롭게 인식하는 방법이랄까. 그리고 그건 8년 전 막 달리기를 시작한 내게 큰 즐거움이었다.

서울시 성동구 사근동. 이름부터 살가운 그곳은 H대학교를 다니던 시절 내 보금자리이자, 러닝의 역사가 시작된 동네다. 사근동에서 자취하며 처음 러닝을 접했고, 자연스레 그 근처를 자주 뛰곤 했다. 그중에서도 단골 코스는 사근동 뒤편, 용답역을 건너편에 둔 채 위아래로 쭉 뻗은 산책로였다. 머리 위로 웅장하게 자리한 내부순환로와 역시나 널찍한 규모로 흐르는 도심천 덕에 꽤 달릴 맛이 나는 코스다. 늦가을에 시작한 달리기는 겨울, 봄까지 이어졌다. 사근동 산책로 의 극히 일부만 쓰던 초보 러너는 차츰 거리를 늘리며 발자취를 넓혀갔다. 그러던 어느 날, 먹고사는 고민에 반환점조차 잊고 계속 달리던 나는 익숙한 무언가와 조우하게 됐다. 시야에 들어온 건 동대문 밀리오레 간판이었다. 뭐 보러 왔냐는 옷 가게 형들의 말발에 지갑과 영혼이 탈탈 털리던 20년 전 기억이 엄습한 걸 보니 내가 아는 그곳이 맞았다. 그런데 잠깐, 내 출발지는 사근동이었는데 왜 갑자기 밀리오레가 나타난 거지? 그제야 알게 됐다. 매번 달리던 산책로에서 딱 한 뼘만 더 나아가면 동대문으로 이어진다는 걸. 그뿐만이 아니었다. 조금 더 가니 평화시장이, 잠시 뒤에는 을지로가, 심지어 얼마 지나지 않아 청계천의 출발점인 고깔 조형물이 등장했다. 그건 산책로 옆 도심천의 정체가 다름 아닌 청계천이란 걸 말해줬다.

그 순간은 지금까지도 선명히 남아 있다. 상관없어 보이던 두 세계를 나의 두 다리로 이어 붙인 최초의 경험이었다. 더불어 서울 사람에겐 익숙하다 못해 이제 별 감흥조차 없는 청계천의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모든 게 신기했고, 생경했다. 그리고 그런 아이 같은 마음은 곧장 두 다리의 동력으로 이어졌다. 그날 나는 청계천을 넘어 광화문 앞까지 8km가 넘도록 달렸다. 당시 내가 5km도 겨우 헐떡이며 뛰는 사람이던 걸 감안하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힘들다는 느낌마 저 잊을 만큼 내 앞에 펼쳐진 서울의 조각들을 처음 상경한 사람처럼 하나하나 눈망울에 주워 담았다. 종착지인 광화문 앞에서 가쁜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어쩌면 달린다는 건이 도시를 가장 새롭고, 또 꼼꼼하게 들여다보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고. 이후 러너로서의 세계관이 확장되며 경험의 폭 또한 넓어졌다. 한강 다리를 두 발로 건너고, 남산 꼭대기를 달려서 정복하고, 퇴근 시간이 지나 한적해진 직장가를 쏘다녔다. 그렇게 서울 구석구석을 달리며 러닝이 없었다면 결코 만나지 못했을 도시의 낯선 얼굴과 연달아 마주했다. 동시에 익숙한 서울을 전혀 다른 각도와 관점에서 바라보게 됐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지만 앞선 수십 년보다 러너로 살아온 지난 8년간 이 도시의 진짜 모습을 더 많이 알게 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당장 내일부터 러닝을 시작한다면 여러분이 살고 있는 동네는 여러분이 알고 있던 곳과 조금 다를 수 있다. 이 도시 역시 내가 알지 못하는 면면이 이토록 많음을 깨달을 것이다. 러너가 된 지 어느덧 8년, 지금 나는 30년 넘게 산 서울이 익숙하면서 낯설다. 알 것 같으면서도 여전히 모르겠다. 그래서 이곳이 좋다.

함께 뛰며 친구 되는 ‘7979 서울 러닝크루’

매주 목요일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광화문광장 육조마당과 반포한강공원 달빛광장에서 서울 시민 누구나 참여 가능한 ‘7979 서울 러닝크루’를 운영한다. 도심을 달리면서 평소 보지 못한 아름다운 도심 야경을 눈에 담고 건강도 증진시키는 생활체육 프로그램으로, 10월 19일까지 진행한다. 공식 인스타그램(@7979_surc)과 동마클럽(dongma.club)을 통해 신청 가능하다.


김상민
낮에는 마케팅을 하고, 밤에는 글을 쓴다. <아무튼 달리기>, <낯가림의 재능> 등을 썼다.

김상민 일러스트 이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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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시스템 서울사랑 제공부서 시민소통담당관
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23-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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