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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소식] 고가도로, 달리기를 멈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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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7017 프로젝트


서울의 첫인상은 고가도로를 달리며 본 풍경이었다. 1996년 여름날 밤, 부산발 새마을호를 타고 온 대학교 4학년 학생무리에 내가 끼어 있었다. 언론사 시험을 준비하는 선배들과 함께 처음으로 서울에 발을 디뎠다. 우리는 결의에 찬 눈빛으로 대합실을 지나 서울역 광장으로 걸어 나왔지만 이내 길을 잃고 망연한 기분이 되었다. 나와 일행의 뒤로 붉은 벽돌로 된 서울역이 어둠의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우리를 태운 택시는 누군가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주소대로 달렸다. 서울역에서 길을 달려 고가도로를 지나 신촌 부근의 누구네 하숙집에 몰려가 쪽잠을 자고, 다음 날 새벽같이 빠져나와 도로를 달려 다시 고가도로를 지나고 또 지난 뒤 수험장인 성균관대학교에 이르는 여정. 오르내리는 도로를 달리는 택시에서 서울이라는 도시를 처음으로 부감했다. 어스름한 새벽이 도시의 굴곡을 따라 펼쳐지고 있었다. 고층 건물의 굳게 닫힌 문과 창문들이 눈앞을 스쳤다. 곳에서는 아침이 시작되고 있으나 우리는 밤의 그림자를 쫓아 달려가고 있는 듯했다. 타인의 도시, 타인의 풍경에서 나는 벌써 외로움을 느꼈다. 이 낯설고 거대한 도시를 그 후로도 오랫동안 바라보게 될 것임을 예감했던가.서울은 길의 도시였고, 무엇보다 도로의 도시였다. 이 도시의 속도는 내가 살아온 그 어느 도시보다 다급했다. 재빨리 이동하기 위해서 이 도시는 땅 아래에는 지하철을, 땅 위에는 고가도로를 설치했던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상의 도로들은 원활하게 흐르지 않았다. 오랜 서울 생활 동안차들이 점거한 도로들을 늘 경험해왔다. 그리고 차를 타고 도로를 달려갔고 또 달려왔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도로 위에서 인생을 보내고 있었다. 모두 도로를 달리고 있다. 다 어디로 가는 걸까? 헤아릴 수 없이 까마득한 인생들이 도로에 촘촘하게 박혔다. 서울의 별은 검은 하늘이 아니라 아스팔트 위에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토록 촘촘한 인생들이 내뿜는 빛이 내 눈에는 그리도 찬연했다.



도로 위에서 본 서울의 풍경은 화려하고 소비적인 환상물을 비춰주는 아주 긴 환등기, ‘판타스마고리아’라고 하면 옳을까? 언제부터인가 나는 도로에서 내려와 골목을 걷기 시작했다. ‘걷는다’는 것은 풍경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풍경 속으로 스며드는 과정이다. 좁은 골목이 살아있는 오래된 동네와 수백 년 된 나무들이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공원과 고층 건물 사이의 비좁은 틈에서도 오밀조밀 조성된 도시의 작은 조직들은, 걷는 과정을 통해서 인간의 자연스러운 시선과 속도로 보아야만 파악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틈새들은 서울이라는 지리와 역사의 문맥을 깊고 촘촘하게 연결하고 있었다.


서울이 도로의 도시라는 것은 자동차의 도시라는 말과도 같다. 사람보다 자동차가 인상적으로 다가온다는 뜻이며,느린 걸음보다 재빠른 속도가 이 도시에 더욱 필요하다는 뜻이다. 걷기 좋은 거리와 둘레길을 일부러 만들지 않으면 자동차에 내어준 길을 되찾지 못한다. 사람은 도시의 표면에서 점점 소외된다. 산업화가 한창이던 70~80년대는 도시의 속도가 빨라야만 했다. 서울에 세워진 고가도로의 대부분은 물류와 산업 발달의 산물들이다. 서울은 물류와 산업이 이동하는 통과 도로였던 것이다. 서울의 밑그림은 빠른 도시, 그리고 그 속도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전략들에 천착했다.



당시로부터 한 세대가 흐른 지금, 고가도로는 다른 운명을 맞이하고 있다. 심각하게 노후되어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거나 변화된 도시구조에서 필요성이 현저히 떨어진 것이다. 내게 서울의 첫인상을 선물해준 아현고가도로와 혜화고가도로, 청계고가도로는 모두 사라졌다. 그 위에서 바라보았던 서울의 산과 언덕, 집들의 아스라한 선들만 기억 속에 남겨두고서 말이다. 거대한 서울역 일대를 조망할 수 있었던 만곡의 고가도로인 서울역 고가도로도 갈림길에 서있다. 마치 은퇴를 앞둔 노인을 보는 것 같다. 뜨거운 시대를 함께한 도시의 혈관들.


노후 시설로 판명되어 자동차가 다니지 못하게 된 서울역 고가도로를 꽃나무가 만개하는 사람 길로 바꾸는 계획이 발표되었다. 총 938m에 이르는 도시의 중심을 관통하는 고가도로의 활용 계획은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힌 단계다. 자동차를 위한 도로가 아니라, 사람이 걷고 이야기할 수 있는 길이 많아진다는 것은 분명 반가운 일이다. 여기에 서울의 미래라는 그림을 투영할 실험이 다채롭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시대의 유산을 되살리는 과정에서 빠른 발전으로 융성하고자 했던 지난 시대의 목표와는 분명 달라진 청사진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도시는 끝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서울은 계속 움직여야 한다. 여전히 많은 실험과 시행착오가 이루어져야 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을 두루 경험하지 못하면, 좋은 것을 이해하지도 좋지 않은 것을 방어하지도 못한다. 아름다운 도시와 그렇지 못한 도시를 판가름하는 방법은 우리의 도시 역시 많은 시도와 실험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달리는 삶에서 벗어나 걷기 시작한 것처럼 이 도시의 한편 또한 달리기를 멈추고 심호흡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도시에는 멈추고 반추하고 긴 숨을 내쉬고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누고 또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공간이 더더욱 많아져야 한다. 인간적인 호흡의 공간, 그 동안 소외된 걸음이 환영 받을 수 있는 공간 말이다.


최예선 걸으며 보고 이해하고 깨닫는 것들에 대한 글쓰기를 즐긴다. 프랑스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고 돌아온 뒤에는 예술과 문화에도 폭넓게 관심을 두고있다. <오후 세시, 그곳으로부터 - 서울의 풍경과 오래된 집을 찾아 떠나는 예술신보>, <밤의 화가들>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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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소식] 고가도로, 달리기를 멈추다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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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1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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