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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둘레길] 낮은 길이 나를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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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둘레길



인류 최초로 히말라야 14좌를 모두 오른 라인홀트 메스너는 그의 책 <나는 살아서 돌아왔다>에서 8,000m가 넘는 곳에서 ‘단지 우리는 행운을 필요로 할 뿐’이라고 말했다. “신들이 승리했다!”고 하면 자신은 오직 ‘살아서 돌아왔다는 것’만이 자랑스럽다고도 했다. 실제로 고산등반에 나선 이들 10명 중 한 명 꼴로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다. 지난 2010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히말라야 14좌를 모두 등반하고 ‘살아서 돌아온’ 오은선. 그와 서울둘레길 수락산 구간을 함께 걸었다.

세계의 지붕을 지나 둘레길을 걷다


서울에서 가장 높은 북한산을 열 개 이상 겹쳐 놓은 높이의 산들을 오르내렸던 산악인 오은선(블랙야크 소속). 그가 오늘은 북한산보다 낮은 수락산에서, 정상도 아닌 숲길을 따라 걷는다.

“제가 서울시 홍보대사가 되고 별로 한 일이 없었는데 둘레길 같이걷자는 소리에 너무 설레었어요.”

오은선과 함께 걷기로 한 일행들은 수락·불암산 코스가 서울둘레길가운데 가장 난이도가 높다는 소리에 출발 전부터 긴장을 하면서도, 히말라야를 오르내린 사람에게는 너무 무료한 곳이 아닐까 내심 궁금해 했다. 하지만 그는 산의 낮은 자리를 돌아가는 고즈넉한 오솔길에서 내내 “아, 정말 너무 좋다!”며 탄성을 질렀다.

발아래는 젖은 황토길 위로 바람에 흩어진 벚꽃잎이 빛나고 있었다.짝짓기를 준비하는 새들의 노랫소리는 젖은 대기 사이로 숲 속 가득울려 퍼졌다. 그는 히말라야 고산지대 에서는 고막을 찢는 칼바람 소리가 아니면 까마귀 울음소리가 전부였다며 새소리를 반겼다. 꽃과 새들이 어우러진 숲으로 작고 가벼운 여자가 앞장서 사뿐히 걸어갔다.

사람들은 오은선의 작은 체구 때문에 먼저 놀라고 함께 걷는 동안 이십대 청년도 숨을 헐떡이는 데서 평지처럼 편안해 보이는 그를 보고 다시 한 번 놀랐다.


“예전에 히말라야 원정 훈련할 때 ‘불수도북 종주’하며 수락산 왔던 생각이 나요. 그땐 밤낮없이 앞사람 뒤꽁무니만 쫓아가느라 뭘 봤는지 기억도 없어요.”


불수도북 종주란 불암산에서부터 수락산, 도봉산, 북한산 정상을 연속으로 종주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일상에서 만나는 낮은 길의 위로


“둘레길은 정상으로 가지 않아도 된다니… 너무 좋은데요.”


걷는 동안 갈림길마다 수락산 정상으로 가는 안내 표지판이 여러 번 나타났을 때, 그가 흘리듯 한 말이다. 5년 전, 히말라야 14좌 등반을 모두 마친 그가 칸첸중가 등반에 대한 등정 시비로 세간의 논란에 휩쓸렸던 일을 떠올리면 가슴아픈 소리였다. 그 시절 누구보다 먼저 오은선의 귀환을 축하하고 지지해준 사람도 라인홀트 메스너였다. 참다운 등산의 기술이란 살아남는데 있다는 것을 먼저 증명한 사람의 응원이었다.

인터뷰가 있던 날도 이틀 전 히말라야 트레킹 도중 고산병으로 사망한 여성의 사고 소식이 화제가 되었다. 4,800m 지점에서 호흡곤란을 느껴 하산했지만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는 뉴스였다. 사람들이 이에 대해 묻자, 오은선은 직접 그곳에 있던 당사자가 아닌 이상 함부로 말할 수 없다며 안타까운 일이라고만 했다. 고산지대로 떠나는 사람들에게 위험은 늘 함께 한다. 세상 사람들은 그가 신들의 영역이라 부르는 8,000m 위에서 살아 돌아왔을 때, 그 산의 꼭짓점을 정확히 밟았는지부터 증명하라고 다그쳤다.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복잡할 때마다 집 근처 숲이나 천변을 따라 계속 걸었어요.”


높고 험한 산정에서 내려온 그는 혼자 조용히 낮은 곳으로 걸었다.히말라야에서의 걷기란 한 걸음 한 걸음이 악천후와 희박한 공기,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와의 고독한 싸움이다. 그는 살아 돌아오기 위해 걸었던 높고 험한 길 위에서 영광과 상처를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낮은 일상의 길 위에서는 온전히 위로받았다.

“엄마 모시고 다시 와야겠어요. 어르신들이 같이 걷기에도 좋네요. 힘들면 중간 중간 마을로 바로 내려갈 수도 있고.”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면목동에서만 40여 년 가까이 살고 있다고 했다. 평소 집 근처에 있는 용마산과 아차산 코스의 일부 둘레길에는 가보았지만 제대로 걸어볼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이미 1천 명이 넘는 시민들이 서울둘레길을 완주했다는 소식에 놀라며, 자신도 차근차근 다걸어보고 싶다고도 했다. 완주를 하면 시청에서 인증서를 발급해 준다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라며 웃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세상이 요구하는 증명서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다.

오은선은 현재 고려대학교 체육학과 박사 과정 준비를 하고 있다. 이제는 자신이 등산을 통해 배운 경험과 지혜들을 후배들에게 나누는 일에 힘을 쏟는 것 외에 다른 거창한 목표는 없다고 했다.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는 산처럼,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일상이 소중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비싼 수업료를 내고 깨달은 이가 오은선이다.





글 김선미(작가) 사진 나영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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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시스템 서울사랑 제공부서 시민소통담당관
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16-07-19
관리번호 D0000028037010 분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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