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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600년 역사 기행] 물과 바람과 사람이 하나 되니, 이 아니 즐거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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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사람들에게 서울에서 가장 가볼 만한 명승지를 꼽으라면 어디라고 답할까? 아마도 많은 사람이 북악산, 인왕산, 남산, 한강 등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이어서 좀 더 외곽으로 나가 아차산이나 관악산을 꼽지 않을까 생각한다. 실제로 이들 지역은 모두 산과 물이 어우러져 옛사람이나 현대인이나 똑같이 명승으로 여기는 곳이다.


서울 곳곳에 명승, 명승 곳곳에 누정 조선 시대 사람들은 명승지에 작은 누정을 짓고 그곳에서 풍류를 즐기는 것을 좋아해 서울 명승지 곳곳에는 많은 누정이 있었다. 그곳에서 술을 마시고 시문도 읊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연의 삼라만상을 즐기면서 자연과 인간이 하나 되는 것을 최고의 풍류 문화로 여겼다.


서울에 있던 누정 가운데 궁궐에 있는 누정을 제외하면 조선 시대 모습 그대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누정은 사실상 하나도 없다. 산업화를 겪으면서 많은 누정이 파괴되거나 소실되었으며, 그나마 있는 것도 최근에 복원한 것이거나 일부만 남아 있는 상황이다. 이렇게 서울 명승지의 누정이 사라진 일차 원인은 전국의 인구가 서울로 모여들면서 그들이 살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수많은 문화재가 파괴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전쟁을 겪으면서 대부분 잿더미로 변했다. 그나마 창덕궁 후원의 누정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정도다. 이에 더해 해방 이후 서울로 모여든 인구는 도성 안뿐 아니라 도성 밖 한강 변으로까지 거주지를 넓혔고, 이 과정에서 한강 남북 연안에는 온갖 아파트와 단독주택이 들어섰다. 또 한강 강안을 따라 남쪽과 북쪽에 시원하게 뚫린 올림픽대로와 강변북로는 마침내 한강 변의 경관을 바꾸어놓았고, 강변에 있던 다양한 문화 유적의 흔적도 없애버렸다. 자연히 한강 변에 즐비해 있던 누정도 모두 사라졌다.


그렇다면 전근대 서울 지역에 있던 누정은 역할이나 입지 조건 등에서 다른 지역의 누정과 어떻게 달랐을까? 먼저 서울 누정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궁궐 누정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은 조선의 수도이자 왕이 거주하던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에 궁궐에 많은 누정을 건립했다. 이런 궁궐의 누정은 주로 후원에 건립했으며, 서울에 궁궐 누정이 있다는 점이야말로 전국의 다른 지역과 비교할 때 가장 큰 차이점일 것이다.


궁궐 누정은 언뜻 매우 화려할 것 같지만,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우 소박한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궁궐 누정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창덕궁 후원의 누정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궁궐 누정 가운데 가장 화려한 누정은 경회루이며, 그다음이 향원정과 부용정, 주합루 등이다. 이 중 경회루와 주합루는 왕이 쉬면서 즐기는 공간이라기보다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정치 공간으로 의미가 더 컸다. 이 밖에 후원에 위치한 대부분의 정자는 숲 속 계곡에 물 흐르는 수로를 따라 배치되어 있으며, 놀랍게도 전혀 화려하지도 초라하지도 않은 정제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최고의 권력을 소유한 조선의 임금이 놀던 정자치고는 오히려 검소하다고 보는 편이 맞을 정도다. 이는 조선의 왕이 근검절약하며 신하에게 모범을 보이는 성리학적 사유 체계를 가지고 자연을 돌아보았기 때문이다. 또 자연과 어우러져 동화되는 삶을 살면서 그 속에서 인간 본연의 참모습을 깨닫고자 노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누정은 단순 전망대가 아닌 복합 문화 공간
궁궐 누정 이외에 서울에는 한양 도성을 연결하는 내사산(한양을 둘러싼 4개 산) 계곡과 한강 유역에 정자가 집중해 있었다. 내사산 중에서도 북악산과 인왕산, 남산 자락에 누정이 특히 많았으며, 대부분 도성 안쪽에 위치했다. 누정 주인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세력이었기에 궁궐과 가까운 도성 안쪽에 정자가 있어야 편했을 것이다. 이 밖에도 비교적 통금에서 자유롭고, 치안을 유지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며, 내사산에서 청계천으로 모여드는 물줄기가 있는 곳은 대부분 경치가 뛰어났다.


한강에서는 남쪽보다는 북쪽 언덕 높은 곳에 주로 지었는데, 이처럼 한강 북쪽에 정자가 많은 이유는 도성이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에 한강을 건너려면 배가 필요했기에 강남에서 빠른 시간에 도성에 당도하기는 쉽지 않았다. 따라서 한강 남쪽에 누정을 짓는다는 것은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벼슬에서 물러난 후 여유롭게 머무는 장소라는 인식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한강 이남에 있던 대부분의 정자를 소유한 사람은 모두 퇴임한 관료였다.


내사산 중에서도 인왕산에, 한강에서는 서호에 정자가 집중되어 있었다. 특히 서호에 누정이 집중된 것은 조선 후기 서울 인구가 마포, 용산, 서강 일대로 확산된 것과 관련이 있다. 서울에 누정을 지은 사람은 왕족이나 중앙 관직에 있던 양반 관료가 대부분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특히 왕과 왕족의 정자가 한강 변에 많이 들어섰고, 후기로 갈수록 사대부의 정자가 늘어났다. 왕들이 한강에서 군사훈련도 하고, 외국 사신을 대상으로 각종 연회를 베풀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왕과 왕족이 누정을 많이 지었다. 그뿐 아니라 최고의 신분을 상징하는 용, 봉황, 호랑이 등이 정자 이름에 들어간 것도 서울 누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다. 일반 사대부가 지방에서 용이나 봉황 이름을 따서 정자를 지었다면 아마도 역적으로 몰렸을 것이다.


산에 있는 누정에서는 대부분 나무와 꽃 그리고 계곡물과 암반 등을 감상 대상으로 삼았다. 한강의 경우 도도하게 흐르는 물과 멀리까지 보이는 시야가 최고의 경관이었다. 오늘날에도 한강 변에 유흥업소와 별장이 많이 들어서고, 강변에 위치한 아파트 중에서도 강을 바라볼 수 있는 집이 다른 집들에 비해 가격이 비싼 것을 보면 옛사람이나 현대인이나 탁 트인 자연을 바라보고 싶은 욕망에는 큰 차이가 없는 모양이다.


서울의 누정은 기능 면에서 다른 지역과 비교할 때 왕실이나 국가 행사와 관련한 역할을 많이 했다. 모든 누정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특히 제천정, 망원정, 낙천정, 화양정, 용양봉저정 등은 외국 사신 접대 장소이자 왕이 군사훈련을 점검하는 장소로, 왕실 가족의 휴식처 등 다양한 기능을 하는 중요한 정자였다. 또 다른 지역에 비해 활 쏘는 장소로 주로 이용한 사정(射亭)이 가장 많은 지역이 서울이다. 왕을 비롯한 문무 관리가 정기적으로 활쏘기 행사를 개최했고, 나라에서도 활 쏘는 문화를 장려했기 때문에 선비들이 모여 시문을 짓다가도 활을 쏘는 것이 풍류 문화로 자리를 잡아갔다.



다산이 기록한 세검정의 풍경
종로구 신영동 세검정에는 조선 시대 누정에서 즐기던 풍류 문화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남아 있다. 조선 시대 세검정 최고 풍경은 여름철 폭우가 쏟아진 후 누정에서 바라보는 폭포 같은 물줄기였다. 이에 관해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자신의 경험을 자세하게 기록해놓았다. 1791년 5월, 30세가 된 정약용은 한치응(韓致應), 홍약여(洪約汝), 이휘조(李輝祖), 윤무구(尹无咎) 등과 함께 세검정으로 놀러 갔다. 정약용은 1789년 식년시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아간 후 정조의 총애를 받아 당시에는 주교를 완성하고 수원 화성 설계 작업을 준비하던 때였다. 또 천주교 신자로서 처음 대신들의 비판 대상자에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하던 때이기도 하다. 어느 날 벗들과 함께 명례방(明禮坊)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마른하늘에 천둥이 치고 뜨거운 열기가 나더니 먹구름이 사방에서 일기 시작했다. 그는 세검정의 뛰어난 풍광은 바로 소나기가 쏟아질 때의 폭포 모습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비가 막 쏟아질 때는 사람들이 교외로 나가려 하지 않고, 비가 갠 뒤에는 산골짜기 물도 그 기세가 줄어든다. 이 때문에 세검정 정자는 근교에 있으나, 성안의 사대부 중 이 정자의 뛰어난 풍광을 제대로 만끽한 사람은 드물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다산은 술병을 차고 벌떡 일어나면서 함께 술을 마시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는 폭우가 쏟아질 징조다. 제군들은 세검정에 가보지 않겠는가? 만약 가려고 하지 않는 자에게는 벌주로 열 병을 한꺼번에 주겠다” 하니 모두 “이를 말인가?” 했다. 이리하여 마부를 재촉해 술집을 나와 창의문을 나서자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졌는데, 크기가 주먹만 했다. 말을 달려 정자 밑에 이르자 수문 좌우 산골짜기에서는 이미 물줄기가 암수 고래가 물을 뿜어내듯 했고, 빗방울에 옷소매가 얼룩졌다. 정자에 올라 자리를 펴고 난간 앞에 앉아 있으려니 수목은 미친 듯이 흔들리고 차가운 기운이 뼈에 스며들었다. 이때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더니 산골짜기 물이 갑자기 흘러내려 눈 깜짝할 사이에 계곡이 가득 차고 물 쏟아지는 소리가 아주 요란했다. 모래와 돌이 물과 뒤섞여 마구 쏟아져 내리면서 정자의 초석을 할퀴고 지나갔다. 그 형세는 웅장하고 소리는 맹렬해 서까래와 난간이 진동하니 오들오들 떨려 편안하지 못했다.


다산이 묻기를 “어떻소?” 하니 모두 말하기를 “이루 말할 수 없이 좋다”고 했다. 술과 안주를 가져오게 하고 익살스러운 농담을 하며 즐겼다. 조금 있으니 비가 그치고 구름도 걷히며 산골짜기 물도 점점 잦아들었다. 석양이 나무에 걸리니 붉으락푸르락 천태만상이었다. 서로를 베고 누워서 시를 읊조리는데, 한참 지나자 심규로(沈奎魯)가 이 얘기를 듣고 뒤쫓아왔으나 물은 이미 잦아진 뒤였다. 처음에 심규로에게 같이 오자고 했는데 그가 오지 않았으므로 여러 사람이 함께 조롱하고 욕을 해댔다. 마지막으로 그와 함께 술을 한 순배 마시고 돌아온 정약용은 이를 회상하며 기록을 자세히 남겼다. 이 기록은 정약용의 《다산시문집》 제14권에 ‘세검정에서 노닌 기록(遊洗劍亭記)’이라는 제목으로 남아 있다. 당시 세검정 앞을 흐르는 홍제천 계곡의 모습을 아주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어 마치 눈앞에서 그 풍치를 보는 것만 같다.


*10월호에는 조선 시대 최고의 교육 시설인 성균관과 4부학당을 찾아가봅니다. 정치에도 관여한 조선 시대 최고 학부인 성균관과 4부학당의 교육 목표와 교육과정, 유생의 생활 모습을 싣습니다.





글 이상배(서울시사편찬위원회 전임연구원) 사진 제공 서울시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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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600년 역사 기행] 물과 바람과 사람이 하나 되니, 이 아니 즐거운가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원본시스템 서울사랑 제공부서 시민소통담당관
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16-07-19
관리번호 D0000028036727 분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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