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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600년 역사 기행] 국립 한양공단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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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 입국(工業立國)의 기치가 한창이던 시절, 서울에는 여러 공단이 조성되어 있었다. 동대문 인근의 청계천이나 구로의 공단이 대표적인 곳으로, 이들 공단은 한강의 기적을 문자 그대로 선두에서 이끌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서울은 더 이상 공업도시가 아니며 생산도시라고 하기에도 어려운 실정이다. 각 지역과 지방에 공업도시나 공단이 조성되어 국가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으며, 서울은 이제 이들 지방 공단에서 생산하는 물자에 기대어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선 시대의 서울은 어땠을까?


▲ 조지서 : 조선 시대 정부에서 사용하는 종이를 만들던 곳이다.


조선 시대 최고의 공업도시
오늘날 서울이 아닌 여러 지방에 분산되어 공단이 조성된 것은 편리한 교통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상황이 달랐다. 궁궐이며 모든 관아가 한양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 한양과 여타 지방들 사이의 물류는 한계가 있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한양에서 필요한 모든 물품, 곧 궁궐과 관아와 양반가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은 모두 한양 안에서 조달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상공업의 발달이 미미했으므로 궁궐이나 관아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 가운데 민간에서 쉽게 조달할 수 없는 물자가 많았다. 이런 물품들은 나라에서 직접 생산하는 수밖에 없었고, 조선은 실제로 한양에 각종 공업 관련 기관을 배치해 이런 물품들을 생산하고 조달했다. 심지어 배와 수레를 비롯한 일종의 기간산업 시설까지 모두 설치했고, 이로써 한양은 자연스럽게 조선 시대 최고의 공업도시가 되었다.


▲ 공조 표석 : 서울시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뒤에 조선 시대 육조 중 하나인 공조가
있었음을 알리는 표석이 놓여 있다


종로 일대가 한양공단의 중심
공업과 관련한 관청이나 시설들은 한양 중에서도 특히 오늘날의 종로구와 중구 일대에 집중되어 있었다. 대표적으로 궁궐 안에 상의원(尙衣院)과 사옹원(司饔院)이 있었고,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는 당시의 공업 담당 부처인 공조(工曹)가 있었으며, 창의문 밖에는 조지서(造紙署)가 있었다.
궁궐 안에 있는 상의원에서는 왕실의 의복을 만들었으며, 때로는 궁중 보물 등을 관리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587명의 장인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직군이 무려 68종으로 세분화되어 각 장인마다 전담하는 일이 달랐다. 그만큼 전문화와 분업이 철저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사람 머리에 쓰는 모자부터 신발에 이르기까지 물건마다 만드는 사람이 달랐을 뿐 아니라, 옷만 해도 겉옷·속옷·외투·저고리·바지·치마 등의 제품을 담당하는 사람이 각기 달랐다. 또 옷감을 재단하는 사람, 바느질만 하는 사람, 다림질만 하는 사람, 옷에 무늬를 놓는 사람 등이 각기 정해져 있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조선 시대의 전반적 상공업 발달 수준은 매우 저급한 편이지만, 몇몇 분야에서는 이처럼 철저한 분업화와 전문화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 오늘날의 기술자들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사옹원은 궁궐 안에서 음식과 음식 담는 그릇을 만드는 일을 담당했다. 당연히 최고의 음식을 만들고 최고의 그릇에 담아내는 것이 이들의 임무였다. 이를 위해 사옹원에서는 경기도 광주에 그릇을 전문으로 만드는 분원(分院)을 만들고, 이곳에 사기를 전문으로 만드는 장인 350명을 파견해 왕실에서 필요한 그릇을 만들게 했다. 조선 시대의 분청사기나 백자 같은 최고의 작품을 대부분 이곳에서 만들어 왕실이나 관아로 납품했다. 이런 이유로 광주분원에서 만든 그릇은 오늘날에도 최고의 골동품으로 인정받으며, 경기도 광주시는 이런 역사를 되살려 새로운 도자기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조선 시대의 공업 담당 부처인 공조에서는 우선 궁궐이나 도성을 새로 쌓는 업무 등 국가의 공공건물을 신축하고 관리하는 일을 담당했다. 또 산하에 공야사(攻冶司)를 두어 왕실이나 관리들이 사용하는 각종 물품의 생산을 담당하게 했다. 공야사에서는 초립이나 망건 등 모자류, 가죽신 등 신발류, 금·은·옥 등 세공품, 궁궐에서 사용할 각종 가구 등을 주로 만들었으며, 역시 국내 최고의 전문 장인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종이를 만들던 조지서는 창의문 밖 탕춘대에 있었다. 지금의 종로구 신영동 세검정초등학교 건너편으로, 여기에는 모두 91명의 장인이 소속되어 있었다. 종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닥나무를 가마에 쪄서 껍질을 벗겨 흑피를 만들고, 이를 물에 불려 껍질을 제거해 백피를 만든 다음, 끓는 잿물에 담가 백피를 표백하고, 표백한 섬유를 방망이로 다듬질한다. 그런 다음 다듬질한 원료를 녹조에 넣고 거기에 풀을 첨가해 종이의 원료를 만든다. 마지막으로 이를 대발 위에 일정한 분량으로 옮겨 종이를 뜨는데, 처음 만든 종이를 한 장씩 떼어낸 뒤 건조판에 붙여 말리면 종이가 완성된다. 당연히 여러 공정마다 전문가가 별도로 있었고, 이러한 분업화와 전문화의 성과로 조지서에서는 당대 최고 품질의 종이를 생산했다. 탕춘대 옆에 흐르는 홍제천의 맑은 물도 좋은 종이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이 밖에 궁궐 안의 토목과 건축물을 담당하는 전문 기술자 346명이 소속된 선공감(繕工監)이 지금의 종로구 신문로1가에 있었고, 왕이 외국 사신이나 국내 관리에게 선물로 주기 위한 의복과 옷감의 염색이나 제조 등을 담당한 제용감(濟用監)이 지금의 수송동 종로구청 자리에 있었다.



중구에는 기술 집약적 산업 시설이 밀집
지금의 중구 지역에는 대표적 관영 작업장인 군기시(軍器寺)·교서관(校書館)·주자소(鑄字所)·예빈시(禮賓寺)·장악원(掌樂院) 등이 있었다.


군기시는 전쟁에 필요한 군사 무기인 창·칼·검·활·화살·화포·갑옷·군기 등을 만드는 곳으로 644명의 전문 장인이 있었으며, 지금의 시청과 서울신문사 자리에 위치했다. 최근 서울시 신청사를 지으면서 군기시 건물터와 무기들을 발굴했는데, 서울시에서는 이를 보존하고 시민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발굴 현장을 보존해 역사 문화의 교육 현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조선 시대 최초의 군기시 책임자로 임명된 사람은 고려 말의 왜구 소탕에 공을 세운 최무선(崔茂宣) 장군이다. 이후 그의 아들 최해산(崔海山)이 계승해 82칸의 청사를 건립하고 무기를 본격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만든 군사 무기를 바탕으로 조선은 유구한 역사를 지켜낼 수 있었으니, 가히 의미 있는 역사 공간이라 하겠다.


교서관은 서책의 출판을 담당한 곳으로 일종의 국영 인쇄소다. 오늘날의 중구 예관동에 있었으며, 인쇄 기술 전문 장인 146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곳에서도 거대한 나무를 다듬는 사람, 다듬은 나무에 활자를 새기는 사람, 나무 활자에 구리를 녹여 글자 형태를 만드는 사람, 글자의 주형을 이용해 금속활자를 만드는 사람, 주조한 활자를 다듬어 최종으로 완성하는 사람, 활자를 골라 배열하는 사람, 동판 위에 올려놓고 조판하는 사람, 종이를 재단하는 사람, 인쇄하는 사람 등이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활자 주조부터 서책 인쇄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이 이처럼 전문화되고 분업화되어 유기적으로 진행됨으로써 오늘날의 자동화·기계화된 기술로는 따라가기 어려운 최고 수준의 명품 서책이 탄생할 수 있었다. 컬러 도판을 중심으로 하는 각종 의궤(儀軌)와 <조선왕조실록> 등이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조선이 남긴 최고의 기술 가운데에는 금속활자를 만드는 주자(鑄字)의 기술도 있는데, 이를 담당한 기관이 주자소다. 다양한 활자가 있어야 인쇄하기 쉬웠기에 조선은 여러 종류의 활자를 만들었는데, 태조 때의 계미자(癸未字), 태종 때의 경자자(庚子字), 세종 때의 갑인자(甲寅字) 등이 대표적이다. 이렇게 만든 활자가 큰 것 19만 개, 작은 것 14만여 개에 이르렀고, 이는 훗날 다양한 책자를 인쇄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무(武)가 아니라 문(文)으로 세상을 다스리기를 꿈꾼 조선은 활자 주조와 인쇄에 많은 투자와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런 국가적 사업에서 가장 핵심인 활자 주조 임무를 담당하던 기관이 바로 주자소다. 오늘날의 중구 주자동은 그곳에 바로 이 주자소가 있었기 때문에 생긴 지명이며, 지금도 충무로에 인쇄 골목이 형성되어 많은 인쇄소가 성업을 하고 있는 것도 이런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이 밖에 중구에는 외국에서 온 손님의 접대를 전담하던 예빈시가 있어 전문 요리사들이 배속되어 일했으며, 음악과 관련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인 장악원이 있어 전문 장인들이 그곳에서 악기 만드는 일을 했다.


대형 기간산업 시설은 외곽에 배치
종로와 중구 일대에 기술 집약적 산업 시설이 밀집해 있었다면, 대규모 장치산업에 해당하는 기간산업 시설은 한양 외곽에 포진해 있었다. 먼저 한강이 가까운 용산에는 와서(瓦署)가 있었는데, 이곳은 기와를 만드는 공장으로 지금의 한강로3가 용산공업고등학교터에 자리했다. 여기에서 구운 기와는 일반인에게도 판매했으며, 기와뿐 아니라 벽돌도 이곳에서 구웠다. 이곳에서 구운 벽돌로 명동성당을 건축했으며, 한강로3가 일대를 속칭 ‘왜새’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와서’가 변음된 것이다.


용산에서 한강 하류로 내려오면 마포구 하수동(지금의 상수동 일부) 강변에 전함사(典艦司)가 있었다. 여기서는 전국의 선박을 관리하는 한편,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병선(兵船)이나 조운선(漕運船) 등의 선박을 만들었다. 태종 때는 이곳에서 조운선 251척과 병선 185척을 건조했고, 세조 때는 조운선 100여 척을 만들었다. 나아가 세곡을 운반하면서도 외적의 방어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두 가지 목적을 충족시키는 병조선(兵漕船)을 이곳에서 처음 만들기도 했다.


이처럼 서울은 조선 시대부터 이미 최고의 공업도시였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사실은 서울이 조선팔도의 내로라하는 전문 장인이 가장 많이 모여든 곳이었다는 점이다. 이런 전통과 역사를 이해하고 이를 보존하려는 노력이 오늘날의 서울시와 시민 모두에게 절실하다. 또 서울시가 진정한 역사 도시이자 문화도시로 세계 속에 우뚝 서기 위해서도 과거의 잊힌 전통 기술과 문화를 복원하는 일은 가장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 7월호에는 조선 시대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서울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50년간 크고 작은 전쟁을 겪은 조선 시대 서울은 인적으로나 물적으로 수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환향녀와 백성의 민심 이반, 이를 극복하기 위해 조선이 취한 노력들을 재미있게 담을 예정입니다.





글 이상배(서울시사편찬위원회 전임연구원) 사진 제공 <서울 역사 2000년>, 서울역사박물관, 청계천문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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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600년 역사 기행] 국립 한양공단을 아시나요?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원본시스템 서울사랑 제공부서 시민소통담당관
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16-07-19
관리번호 D0000028036678 분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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