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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600년 역사 기행] 300년 전에 시작된 서울의 인문학 열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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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 피폐하고 공동체가 위기를 맞았으며, 이를 해결할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요즘, 인문학의 중요성이 새롭게 대두되고 있다. 사람과 사람살이의 근본을 다시금 돌아보고, 새로운 기운을 통해 공동체의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자는 인문학 열풍은 조선 시대에도 강하게 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에 서울을 중심으로 불어닥친 일련의 인문학 바람은 그 위용과 수용자의 열기가 다른 어느 바람보다 거세고 왕성해서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실학이 태동하다
조선 시대의 사회는 성리학이라는 학문 질서 속에서 유지, 발전해왔다. 유럽의 중세를 지배한 것이 가톨릭이었다면, 조선을 지배한 것은 주로 성리학이었다. 그러나 성리학이 처음부터 가톨릭처럼 일체의 반대와 도전을 거부하는 폐쇄적인 체제는 아니었다. 조선 전기에는 성리학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이 가능해 중기에 이르러 율곡이나 퇴계 같은 대학자가 배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17세기 중반 이후로는 송시열을 중심으로 성리학적 세계관에 배치되는 학설을 내놓거나 비판적 토론을 할 경우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리는 풍토가 조성되면서 더 이상 학문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효종과 효종 비의 장례 절차를 놓고 벌어진, 이른바 예송논쟁(禮訟論爭)은 성리학을 더욱 명분론으로 치닫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성리학적 세계관에 따른 지배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려는 움직임이 일면서 성리학은 시대 변화에 더욱 뒤떨어졌다.


이처럼 성리학이 명분론에 빠져 시대 변화를 담아내지 못하고 현실과 동떨어지자, 조선 후기에는 새로운 학풍인 실학이 싹트기 시작했다. 실학은 새롭고 실용적인 학문을 일컫는 말로 이용후생(利用厚生), 경세치용(經世致用), 실사구시(實事求是)를 구호로 삼았다.


주로 서울의 젊은 지식인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17세기 초에 이수광이 처음으로 이론적 토대를 세웠다. 이수광은 종로구 창신동 낙산 기슭에 ‘비나 막으면서 청렴하게 살겠다’는 뜻을 담아 비우당(庇雨堂)이라는 작은 집을 짓고 살았는데, 거기서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지봉유설>이 탄생했다. 지금은 작은 초가집을 복원해 그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이수광이 비우당을 지은 낙산 터전은 본래 그의 외가 쪽 5대조인 하정 유관이 살던 곳으로, 유관은 정승까지 지냈지만 비가 새는 집에서 우산을 받치고 살 정도로 청빈한 인물이다. 지금 서울시가 청렴한 공무원들에게 수여하는 ‘하정상’은 바로 이 하정 유관의 호에서 그 명칭이 비롯된 것이다.



북학파, 서울을 주름잡다
17세기 후반에는 반계 유형원과 성호 이익 등 서울 근교에 살던 남인 학자를 중심으로 실학사상이 발전했다. 이때는 병자호란 이후 숭명반청(崇明反淸)의 북벌 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노론이 주도한 소중화론(小中華論)이 사상계의 대세를 이루었다.


이어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맹목적인 소중화론에 반발하면서 시대 변화를 보다 능동적으로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로 서울에서 활동하는 학자를 중심으로 이른바 이용후생학파가 형성되었는데, <열하일기>로 유명한 연암 박지원이 대표적 인물이다. 연암은 서대문에서 살다가 27세 되던 해에 종로 재동으로 옮겨 유득공, 이덕무, 박제가 등과 교유했다. <발해고>를 쓴 유득공은 교서관동에서 오래 살았고, <북학의>를 쓴 박제가는 남산 밑 필동 부근에서 살다가 연건동으로 옮겨 살았다. 이들은 조선 후기 정조가 개혁 정치를 야심 차게 추진하기 위해 설립한 규장각의 외각인 교서관(校書館)에서 일하기도 했다.


이들은 비록 서얼 출신으로 중인 계급이었지만 사대부가의 연암과도 자연스럽게 우정을 나누었다.
박제가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종로구 탑골공원 백탑을 중심으로 가깝게 살면서 자주 만났다. 그 가운데 박제가가 가장 어렸는데, 신혼 초야에 처가에서 빠져나와 탑골로 말을 달려 선비들의 집을 돌아다니며 술을 마시고 탑을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는 것만 보아도 이들이 얼마나 끈끈하게 교유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이들이 바로 북학파다.


청나라에서 앞선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출신 성분은 빈부귀천이나 직업을 가리지 않고 다양했다. 묵사동에 살던 <허생전>의 주인공 허생, 갑부 김홍연, 바둑을 좋아하던 누각동의 김첨지 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이들은 신분을 뛰어넘어 수시로 만나 교유하면서 현실적인 학문을 논하고 토론하길 즐겼다. 이들은 또 서울을 북경과 견주면서 도시를 개조함으로써 조선이 변해야 하고, 상공업을 장려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또 동대문에서 남대문까지 시전을 건립하고, 도심 내에 산재한 인분이나 동물의 분뇨·재 등을 모아 농사에 사용함으로써 도심을 깨끗이 하며, 농업 생산성을 높이자는 주장도 제기했다.


연암 박지원의 실학사상은 그의 손자 박규수, 관철동의 유대치, 청계천 건너편에 살던 역관 오경석 등으로 이어지면서 개항기의 개화사상으로 발전했고, 이후 독립협회를 주축으로 한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종로와 청계천 일대는 한 시대를 고뇌하며 살던 사상가들의 중심지로서도 큰 의의가 있는 지역이다.



우리의 문학과 역사에 대한 관심
이 시기 조선의 문학도 많은 변화를 거쳤다. 17세기에 활동한 이정구, 신흠, 장유, 이식은 조선 시대 한문학의 4대가로 불리는데, 이들은 양반 사대부로서 성리학적 문학관을 바탕으로 당나라의 시문과 고문을 주로 연구했다. 이에 반해 허균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중시해 당대의 정치 부패와 사회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한 한글 소설 <홍길동전>을 집필하면서 성리학적 문학관에 반기를 들었다.
이와 유사한 작품으로 작자 미상의 <전우치전>, <윤군평전>, <곽재우전> 등이 있다.


18세기에는 성리학에 바탕을 둔 고문 중심의 문학에 반하는 새로운 체제의 문학이 등장했는데, 그 중심에는 실학의 대가인 연암 박지원이 있었다. <열하일기>는 그가 중국 청나라 사신으로 파견되어 가는 과정에서 북중국과 남만주 일대를 견문하고, 그곳 문인이나 명사들과 교유한 과정과 소회를 소상하게 기록한 연행 일기다. 이 책은 비속한 언어까지도 그대로 썼을 정도로 사실적 표현을 담고 있으며, 화이사상(華夷思想)의 허구성과 무위도식하는 양반들의 위선을 거침없이 토로하는 등 비판적 시각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문학작품은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것이어서 개혁 군주로 일컫던 정조마저도 이 책이 지나치게 품위를 상실했다며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일으켜 새로운 문풍을 억압하고 과거로 회귀하고자 할 정도였다. 당시 정조는 문장이란 화려한 기교보다는 질박한 옛 문풍을 유지하면서 순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복고적 문학관을 가진 정조는 조선 초기의 최항과 서거정을 문학가의 가장 뛰어난 모범으로 여겼다.


한편 양반 사대부들의 전유물로만 여기던 문학 분야에서 중인이 활발하게 활동을 시작했다. 18세기 후반 무렵, 재력을 바탕으로 신분 상승을 이룬 중인과 서얼이 위항인(委巷人)으로 불리면서 ‘중인 문학’을 태동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서울의 인왕산, 삼청동, 청계천, 광교 일대에서 시사(詩社)를 결성해 문학 활동을 전개하면서 그 위상을 높여갔다. 학문적으로는 실학자들인 기호남인이나 북학파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사대부 문학을 모방하기도 하고, <열하일기> 같은 새로운 형태의 문학적 추이를 따르기도 했다. 이들이 시사를 통해 읊은 시문을 모아 발간한 책으로 홍세태의 <해동유주>, 고시언의 <소대풍요>와 <풍요속선> 등이 있다. 또 영조 때 서리 출신인 김천택은 <청구영언>을 발간했고, 김수장은 우리나라 역대 시조와 가사를 모아 <해동가요>를 펴냈다.



서민이 문화의 향유자로 나타나다
그 밖에 서민의 인생관이나 세계관이 담긴 설화집을 발간했으며, 민중이 자연 발생적으로 창작한 국문소설도 유행했다. 이러한 소설들은 널리 대중의 사랑을 받았고, 청계천 일대에는 거적을 깔아놓고 지나가는 행인이나 어린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사람도 등장했다. 당시의 소설은 남녀 간의 애정 문제와 사회문제를 함께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시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어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처럼 300년 전에 시작된 인문학 열풍이 오늘날 서울에서 다시 재현되고 있는 것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행복마저 돈의 포로가 된 시대인지라 힐링 또한 언제 어떻게 상술의 노예로 전락할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불안감을 완전히 떨쳐내기는 어렵다. 아무래도 돈과 시간을 상대로 한 싸움이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은지를 깨닫는 게 먼저일 듯하다.

* 9월호에는 ‘조선 시대 서울의 명승지와 풍류문화’를 소개합니다. 지금의 강북 일대 한양 도성을 중심으로 조선 사람이 가장 많이 찾던 명승지와 정자를 중심으로 한 풍류 문화를 살펴봅니다.





글 이상배(서울시사편찬위원회 전임연구원) 사진 제공 서울시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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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600년 역사 기행] 300년 전에 시작된 서울의 인문학 열풍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원본시스템 서울사랑 제공부서 시민소통담당관
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16-07-19
관리번호 D0000028036715 분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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