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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600년 역사 기행] 익선관에 곤룡포는 왕이 즐겨 입는 근무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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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누가 청와대에 들어갈 것인지에 국민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한편으로는 외부와 단절된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측근들은 과연 어떤 일상을 보내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 특별한 사람들이 어디서 자고 무엇을 먹으며 소일하는지 궁금한 것이다. 이런 궁금증은 조선 시대의 백성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실제로 조선 시대의 궁궐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모여 어떤 일을 하며 어떤 일상을 보냈을까?



조선 시대의 궁궐은 하루 유동 인구가 최대 3천 명이었다.
물론 그 중심에 선 인물은 왕과 왕비였다.
여기에 왕의 가족과 이들을 보좌하기 위한 궁녀 및 내시 등이 궁에서 함께 생활했다.
또 궁궐에도 정부의 일을 담당하는 각 관청이 있었는데 이를 궐내각사(闕內各司)라 불렀다.
오늘날의 청와대 비서실을 생각하면 되겠다.
궐내각사에는 관리가 배치되어 낮에 업무를 보고 밤에 숙직도 했다.
이외에 궁궐을 지키는 군인이 있었고, 궁궐 안의 의식주를 책임지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이 뒤섞여 살고 있었다.


▲ 상궁은 조선 시대 내명부에 속하는
여성 관리였으며, 내시는 임금의 시중
을 들거나 숙직 등의 일을 맡아 보았다.


구중궁궐의 여인들
궁궐 안에 사는 여인들은 크게 내명부(內命婦)와 외명부(外命婦)로 나뉜다. 다만 왕비나 대비·세자빈 등은 이에 포함되지 않는다.
내명부란 우선 왕의 후궁들로 내관(內官)이라 했으며, 1품인 빈(嬪)부터 4품인 숙원(淑媛)에 이르기까지 직급이 나뉘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보필하고 궁중의 모든 일을 분담하여 처리하는 정5품 이하의 상궁(尙宮)들이 있었다. 후궁들은 종친의 잔치나 왕비의 친잠례(親蠶禮)에 참여하고, 때로는 왕비가 낳은 왕자와 공주를 양육하기도 했다. 또 왕의 총애 정도와 공로에 따라 예우를 받았으며, 그 친족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외명부는 왕의 유모, 왕비의 어머니, 왕과 왕세자의 딸, 종친의 처, 문무백관의 처 등이며, 궁궐에 출입할 자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왕의 유모인 대전유모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아버지와 남편의 신분 및 관직에 상응하는 봉작을 받았다. 공주·옹주·부부인·정경부인 등이 외명부에 속했다.
상궁은 왕비를 수행하고, 궁궐 안에서 문서와 장부의 출입 등 중대한 임무를 수행했다. 이들은 요즘으로 치자면 나라에서 월급을 받는 여성 전문 직업인이었다. 먹고사는 것은 궁에서 해결했으므로 이들이 받는 월급은 부모나 친인척에게 상당한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따라서 딸을 상궁으로 보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상궁 중 왕의 총애를 받아 후궁으로 올라가는 사례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죽을 때가 되면 궁궐에서 물러나 비구니 생활을 했다.
가장 품계가 높은 상궁은 왕의 명령을 받들고 내전의 재산을 관리하던 제조상궁(提調尙宮)이었다.
이어 아릿고[阿里庫]상궁으로도 불리는 부제조상궁이 내전의 창고 물품을 관리했으며, 지밀상궁으로도 불리는 대령상궁(待令尙宮)은 왕의 측근에서 항상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면서 시위(侍衛)를 담당했다. 왕자나 왕녀의 양육을 담당하는 보모상궁(保姆尙宮)이나, 궁녀들의 잘잘못에 따라 상이나벌을 주는 감찰상궁(監察尙宮) 등이 있고, 그 아래에는 요리, 청소, 막일 등을 담당하는 나인[內人]이 있었다.


내시, 왕의 남자들
내명부가 주로 궁궐에서 평생을 사는 여인들이었다면, 왕의 측근에서 왕을 모시는 남성들로 내시(內侍)가 있었다. 이들은 궁에 머물면서 왕이 먹는 각종 음식을 감독하는 일, 왕의 명령을 각 부서에 전달하는 일, 궐문을 수직하고 청소하는 일 등을 담당했다. 내시부의 정원은 140명이고, 내시 전체를 통솔하는 사람은 종2품의 상선(尙膳)이었다.
내시에는 항상 궁에서 거주하며 생활하는 장번내시(長番內侍)와, 궁궐 밖에서 생활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출퇴근을 하는 출입번내시(出入番內侍)가 있었다. 출입번내시들은 오늘날 경복궁 옆인 종로구 효자동 일대와 창덕궁 앞 봉익동 일대에 집단 거주하기도 했다. 언제라도 왕이 부르면 달려가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궁궐 가까이에 살았던 것이다.
이들 내시들은 관리로서의 자질 향상을 위해 매달 교육을 받고 시험을 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성적은 매년 네 차례 행하는 근무 평가에 반영되어 승진 또는 좌천이 결정되었다. 이들은 궐내에 상주해야 하는 특수성 때문에 남성의 상징을 제거해야만 임명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왕의 측근에서 생활하는 만큼 일정한 권력도 가지고 있었다. 후손을 생산할 수 없었던 내시들은 양자를 들이는 방법으로 가계를 이어나갔으며, 현재 서울에는 은평구와 도봉구, 노원구에 내시들의 무덤이 남아 있다.


권위와 예술성을 간직한 왕실 의복
왕실의 복식 문화는 매우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면서도 절제의 미학을 보여주는 것이 조선 왕실 복식 문화의 특색이다. 먼저 일반 서민은 주로 무명옷을 입었지만 왕실은 상의원(尙衣院)에서 만든 비단옷을 입었다. 옷감이나 염료는 최상품을 사용했으며, 옷을 만드는 일 역시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장인에게 맡겼다.
왕의 의복은 때와 장소에 따라 달랐는데, 먼저 즉위식이나 혼인식, 종묘·사직의 제례, 중국 사신 접견 등 국가적인 중대한 의식 때는 면류관(冕旒冠)에 구장복(九章服)을 입었다. 신하들의 조회, 일본·여진·유구 등의 사신 접견 때는 원유관(遠遊冠)에 강사포(絳紗袍)를 입었다. 편전에서 신하들과 함께 국정을 의논할 때는 익선관(翼善冠)에 곤룡포(袞龍袍)를 입었다. 이 가운데 왕이 평상시에 근무복으로 가장 많이 입은 옷은 익선관에 곤룡포다.
왕비의 의복은 왕의 그것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왕비가 입는 최고의 의복은 적의(翟衣)였는데, 오색실로 수를 놓고 테두리에 금가루를 뿌려 장식한 꿩 무늬의 의복이다. 이런 적의는 국가의 각종 의례와 연회 때 입었다. 여기에 화려한 문양을 조각한 비녀와 각종 머리 장식이 더해졌으며, 이로써 조선 시대 왕비의 복식은 그 권위를 드러내는 동시에 예술적 아름다움의 최고봉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수준에 도달했다.


▲ 왕이 먹던 궁중음식을 요즘은
일반인도 쉽게먹을 수 있다.


대장금으로 유명한 왕실 음식
왕실의 음식 역시 최고의 미각을 자랑하는 솜씨 있는 요리사들에 의해 매우 정갈하고 우아하며 맛깔스럽게 차려졌다.
왕실에서 사용되는 모든 음식의 재료는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것으로 충당되었다. 그렇다고 항상 떡 벌어지는 밥상이 차려진 것은 아니다.
조선 시대 임금의 수라상(水刺床)은 접시 열두 개에 반찬을 담아 차리는 12첩 반상을 기준으로 했다. 밥과 국을 비롯한 밑반찬을 제외한 열두 가지 반찬을 차렸는데, 이런 12첩 반상은 왕과 왕비만 받을 수 있었다.
신하들의 경우 9첩 반상 이하만 가능했다. 왕의 수라를 만드는 일은 수라간의 생과방(生果房)과 소주방(燒廚房)에서 담당했다. 생과방은 주로 찬음식을, 소주방은 더운 음식을 맡았는데, 모든 음식은 최고의 제품으로 만든 은그릇에 담겨 상에 올랐고, 왕의 수저도 은으로 만들었다.
왕이 식사를 할 때는 음식에 독이 들어갔는지 확인하는 기미상궁과, 음식 시중을 드는 수라상궁이 자리를 함께했다.
기미상궁이 먼저 음식을 맛보아 검사했고, 이상이 없으면 그때부터 왕이 음식을 들었다.
왕실 음식은 최고의 재료를 엄선하여 최고의 요리사가 만들었고, 최고의 장인이 만든 그릇에 담겨둥근 상에 올랐다. 이러한 음식은 오늘날 궁중 음식으로 불리며 일반인의 미각을 돋우고 있으며, 조선 시대 왕의 수라상에 오른 음식으로 인기가 높다.


▲ 강녕전은 왕이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왕의 건강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왕실의 주거 공간
왕실의 주거 공간은 궁궐이다. 궁궐 안에서도 국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은 따로 있었다. 경복궁의 경우 왕이 국정을 수행하는 공간 이외에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침전으로 강녕전(康寧殿)이 있다. 왕의 건강을 기원한다는 의미다. 인근에는 연생전(延生殿)과 경성전(慶成殿) 등의 보조 건물을 두어 국왕이 편의에 따라 사람을 만날 수 있게 했다.
경복궁에서 왕비를 위한 내전의 중심 건물은 교태전(交泰殿)이다.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 경희궁의 회상전(會祥殿), 경운궁의 함녕전(咸寧殿) 등이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다. 특히 왕비의 내전에는 여인들을 위해 건물 뒤에 작은 후원도 꾸며놓았다. 꽃 계단과 각종 무늬를 수놓은 굴뚝으로 장식하고, 여인들이 함께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을 조성했다.
구중궁궐에 갇혀 지내면서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왕비와 궁녀들이 여가를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한 공간 구성이다. 경복궁 교태전 후원에 꾸며진 아미산(峨嵋山)과 자경전(慈慶殿) 뒤의 십장생굴뚝 공간 등이 대표적인데, 모두 감탄이 절로 나오는 품격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조선 시대 궁궐의 의식주와 생활 문화는 예술의 경지에 이르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하나같이 뛰어난 품격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조선 왕실 사람들의 생활 문화는 하늘이 내린 솜씨를 지닌 장인들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당대 최고 수준의 예술적 안목과 기술, 과학과 철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 5월호_북촌과 남촌 그리고 청계천의 문화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을 예정입니다.
현재 서울은 한강을 중심으로 강북, 강남으로 나뉘며 경제적·문화적 차이도 존재합니다. 반면 조선 시대에는 청계천을 중심으로 북촌, 남촌으로 나뉘었으며 지금처럼 경제적·문화적 차이가 존재했습니다.





글 이상배(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전임연구원) 사진 <서울 역사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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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600년 역사 기행] 익선관에 곤룡포는 왕이 즐겨 입는 근무복이었다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원본시스템 서울사랑 제공부서 시민소통담당관
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16-07-19
관리번호 D0000028036648 분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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