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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생활사 ⑦] 호떡집에 불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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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떡집에 불났다
신문에서도 호떡을 설명했다.
“호떡이란 중국 사람이 만든 밀가루 떡이다.
모양은 둥글납작하고
그 속에는 거무스름한
설탕을 살짝 발라가지고 누릇누릇하게 구워놓은
가장 값이 헐한 요리품인데 5전이다.”
서울에 유학 온 지방 학생들이 방학 때 선물로
가져가는 것 가운데 호떡이 빠지지 않았다.
서울 떡과 오랑캐 떡
곡식 가루를 찌거나 삶아 익힌 것이 떡이다. 쫄깃하고 달아 서 밥보다 떡을 더 챙기는 ‘떡보’도 있다. 일제강점기의 한 잡지는 서울 떡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봄에는 쑥송편· 개피떡·송기떡·빈대떡이고, 4월 8일에는 느티떡, 5월 단오 에는 취떡, 6~7월에는 증편과 깨인절미, 8월 추석에는 송 편, 겨울에는 온갖 시루떡과 두텁떡 등이 유명했다. 서울 떡 가운데 색절편은 시골에서 볼 수 없는 찬란한 떡이다.” 알 듯 모를 듯 한 떡이 많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서울에 호 떡 바람이 불었다. 특히 겨울 호떡이 인기가 치솟았다. 어떤 이가 적었다. “밤에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호떡을 두어 개 사서 신문지에 싸가지고 돌아와 이불 속에서 먹는 것은 별미다.” ‘호(胡)’라고 하면 오랑캐를 뜻하며 중국을 나쁘게 부른 말 이다. 내가 어릴 적만 해도 시골에는 호떡이 없었다. 읍내에 가면 풀빵·국화빵·붕어빵 등이 있었지만, 호떡은 서울로 전학 와서야 먹어볼 수 있었다. 하물며 일제강점기에야 더 말할 나위 없다. 호떡은 중국인이 사는 곳에서부터 퍼져나갔다. “호떡집에 불났다”는 말이 있을 만큼 호떡이 인기를 끌었다. 호떡에도 여러 종류가 있었다. 설탕 넣고 구운 것과 찐 것, 팥 넣고 구 운 것과 찐 것, 아무것도 안 넣고 찐 것 등. 사람들은 흔히 중국 사람과 일본 사람을 낮잡아 부를 때 ‘호떡 장사하는 중국인’, ‘빙수 가게 하는 일본 사람’이라고 했다.
화교 또는 장궤
다른 나라에 사는 중국인을 일컬어 화교(華僑)라고 한다. 화교는 중화(中華)의 ‘화(華)’와 객지 생활 또는 임시 거주 를 뜻하는 ‘교(僑)’를 합친 말이다. 중국에서 재외 중국인 정 책이 필요해서 1883년에 화교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고도 하고, 1898년 일본 요코하마에 살던 중국 상인이 자녀 교 육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학교 이름을 ‘화교학교’라고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사실이야 어떻든 화교의 기원 을 따지자면 멀리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겠지만, 그들 이 집단을 이루어 이 땅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1882년 ‘조청 상민수륙무역장정’부터다. 그 뒤부터 들어온 중국인은 ‘비 단 장수 왕 서방’처럼 상업을 하거나 농사를 짓고, 음식점과 이발소를 차리거나 쿨리[苦力]가 되었다. ‘쿨리’는 본디 인도 어 ‘kuli’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날품팔이라는 뜻이다. 이 쿨 리라는 말이 음역되어 ‘고력(苦力)’이 되었다. 가난한 쿨리가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호떡이다. 중국인 음식업 가운데 ‘청요릿집’도 있었지만, 대부분 호떡집을 했다. 호떡집 주인 은 돈을 모아 언젠가는 2층 벽돌집에 중국 음식점을 차리 는 것이 꿈이었다. 사람들은 호떡집 주인을 ‘장궤’라고 불렀 다. 장궤란 중국어로 ‘가게 주인’이라는 뜻이다. 뒷날 장궤 가 중국인을 비하하는 말인 ‘짱깨’가 되었다.
예사롭지 않은 호떡
호떡집은 하류 계급이 많이 찾는 곳이었다. 날품팔이 노동 자는 잘해야 하루 50~60전의 돈을 받았으니 5전짜리 호떡 도 마음껏 먹기 힘들었다. “막걸리 한 잔에 지게를 지고, 호 떡 한 개로 빨래품을 판다”는 말은 그래서 생겼을 것이다. ‘아침에 호떡 두 개로 끼니를 잇고 점심때 국밥집에 가서 15전~20전짜리 국밥 한 그릇을 먹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값 싸고 배부른 호떡을 즐겨 먹는 ‘호떡인’은 돈 없는 사람만이 아니었다. 호떡은 학생 요리이기도 했다. 군것질로 남학생은 호떡, 여학생은 군고구마를 즐겨 먹었 다. 남학생은 점심시간이면 몇십 명씩 무리 지어 호떡집으 로 갔다. 그들은 호떡집을 단골로 정해놓고 무슨 호텔, 무 슨 호텔 하며 날마다 다녔다. 시래깃국 아니면 두붓국이나 먹는 기숙사 학생에게 호떡은 더없는 은인이었다. 학생만 군것질하라는 법은 없다. 호떡은 점심에는 점심 추렴, 밤에 는 밤참 추렴, 길 가다가 시장할 때 어느 때고 값싸고 간단 하게 이용할 수 있는 군것질감이다. 육당 최남선도 호떡을 즐겨 먹었다. 중국인만 호떡을 판 것은 아니었다. 길가에서 호떡을 구워 파는 조선 사람이 생겨났다. 가난한 여인네들이다. 학생과 노동자가 호떡집을 자주 이용하는 것을 눈여겨보던 노동 운동가들도 있었다. 그들은 아예 호떡집을 만들어 학생, 노 동자와 접촉하고 독립운동의 발판을 만들려고도 했다. 중국인 호떡집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바람을 탔다. 전쟁 이 터지면서 많은 중국인이 조선을 떠났다. 그러자 우동, 탕 수육, 잡채는 그만두고 그렇게 흔하고 천하던 호떡조차 맛 보기 힘들게 되었다. 긴 전쟁 끝에 쌀이 귀해지자 길가에서 호떡을 파는 조선 사람이 늘어나는가 싶더니 호떡이 아기 주먹만큼 작아졌다. 전쟁 막바지에는 밀가루와 설탕을 구 하기 힘들어 아예 호떡이 자취를 감추었다. 내 호떡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그 밖에도 호떡에는 고향을 등지고 떠난 고단한 중국인의 삶, 중국인을 무시하고 배격 하는 속 좁은 조선인, 전쟁 속의 음식 문화 등 훨씬 더 많고 묵직한 이야기가 남아 있다. 그래서 영웅호걸만이 아닌 호 떡도 역사가 된다.
최규진 연구교수는청암대학교에서 한국 근현대 일상생활사를 연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경성부민의 여가생활>, <쟁점 한국사–근대편>, <제국의 권력과 식민의 지식>, <일제의 식민교육과 학생의 나날들> 등 다양한 저서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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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시스템 | 서울사랑 | 제공부서 | 시민소통담당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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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책임자) | 한해아 | 생산일 | 2019-01-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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