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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인문학 살롱] 취직이 아닌 창직으로 도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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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에는 창업을 지원하고 돕는 43개의 창업 관련 시설이 있다.
그중 창업지원센터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고있다.

창업하기 좋은 도시 서울,
과연 서울에서는 어떤 직업이 인기를 끌었고 또 사라졌을까?
그리고 창업하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알아본다.




“새침하게 흐린 품이 눈이 올 듯하더니 눈은 아니 오고 얼다가 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이날이야말로 동소문 안에서 인력거꾼 노릇을 하는 김 첨지에게는 오래간만에 닥친 운수 좋은 날이었다. 문안에 (거기도 문밖은 아니지만) 들어간답시는 앞집 마나님을 전찻길까지 모셔다 드린 것을 비롯하여 행여나 손님이 있을까 하고 정류장에서 어정어정하며 내리는 사람 하나하나에게 거의 비는 듯한 눈길을 보내고 있다가 마침내 교원인 듯한 양복쟁이를 동광학교(東光學校)까지 태워다 주기로 되었다.”

서울 하층민의 비참한 삶은 그린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의 주인공 김 첨지는 인력거꾼이다. 김 첨지는 오랜만에 돈을 많이 벌게 되어 아픈 아내에게 설렁탕 한 그릇 사줄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지만, 막상 집에 들어와보니 아내는 이미 목숨을 잃은 뒤였다.

일제강점기 서울은 근대화가 시작되어 신식 학교, 전차, 병원, 카페, 호텔 등 화려한 신문물이 등장했지만 하층민의 삶은 고단하기 짝이 없었다. 인력거꾼, 물장수, 나무장수, 하녀 등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는 김 첨지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집배원

벙거지를 쓰고 다녀 벙거지꾼으로 부른 초기의 집배원

물장수, 전차 운전사는 1950년대까지 지속

1934년에 발간한 <각정동직업별호구조서>(서울역사박물관 소장유물자료집 8)에 따르면 당시 전국 조선인의 직업 분포는 농·임·목축업이 75.1%로 대다수를 차지했다. 반면 서울에 사는 조선인은 상업·교통업 종사자가 31%로 가장 많고, 기타 유업자(有業者) 22.8%, 공업과 공무·자유업이 각각 12.9%와 12.5%로 뒤를 이었다고 한다.

그중 물장수는 협동조합까지 결성하며 위세를 떨치던 장사꾼이었다. 상수도 시설이 미비하고 도시 전체의 위생 상태가 열악해 깨끗한 물을 마시려면 물장수에게 물을 사야 했다. 서울에 특별한 연고가 없는 지방 출신 물장수들은 대개 고향 출신끼리 어울려 생활했고, 함경도 출신 물장수 가운데 북청(北靑) 사람이 가장 많아 ‘북청 물장수’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집배원, 전보 치는 사람, 전화 교환수, 전차 운전사 등 신문물을 다루는 새로운 직업도 등장했다. 집배원은 벙거지를 쓰고 다닌다 하여 벙거지꾼이라 불렀다. 전화가 도입되던 초기에는 남자가 전화 교환수로 근무했다. 1920년대 이후 전화 보급과 함께 여자 전화 교환수가 등장했고, 여성의 신종 직업으로 각광받았다. 전화가 없는 경우 급한 일이 생기면 전보를 쳤는데, 당시 전보 치는 사람은 엄격한 시험을 거쳐 선발했다. 시험에 합격한 후에도 전보 보내고 받는 법, 전보 치는 규칙, 외국어, 유학(儒學) 등을 3년간 배운 후에야 겨우 전보를 칠 수 있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화이트칼라 인텔리나 종사할 수 있는 직업이었다.

1989년 5월, 동대문과 홍화문 사이에 최초로 전차가 개통되면서 인력거와 자전거가 대부분이던 우리나라 대중교통에 새로운 혁신을 일으켰다.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며 가장 호황을 누린 1930년대에는 전차 수가 250여 대, 하루 이용 승객도 48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 이 전성기는 버스가 등장하기 전인 1950년대까지 이어졌다.

쓰레기산업

전쟁의 폐허 속에서 서울에는 구두닦이와 넝마주이가 수두룩했다. 잠재적 범죄자로 분류된 넝마주이는 1960년대부터 ‘근로재건대’에 등록해야만 넝마주이 활동을 할 수 있었다. 1990년대 이후 쓰레기 산업을 비롯한 폐품 산업의 성장과 함께 사라졌다.

은행과 무역회사 직원이 최고의 신랑감

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에는 미군의 영향으로 서구 문화가 본격적으로 들어오고 도시와 산업을 일으키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면서 전차 운전사, 전화 교환수, 군인, 경찰 등이 선망의 대상이었다. 미군 부대에서 일하는 타이피스트도 유망 직업으로 떠올랐다. 미군 부대에서는 신문물을 빠르게 접하고, 월급이 끊길 염려도 없었다.

직업이 한층 다양해진 것은 1960년대 이후 급속한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부터다. 그 당시에는 경공업이 주력 산업이었기 때문에 섬유, 합판, 신발 분야의 기능공이 인기 직업이었다. 또 버스가 주된 교통수단으로 등장하면서 버스 안내양이라는 새로운 직업이 각광받기도 했다. 1961년 버스 안내양제도를 도입하면서 도시로 상경한 젊은 여성의 주요 직업군으로 부상했다. 월급도 적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버스 회사에서 숙식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삥땅’, ‘알몸 수색’ 등 인권유린도 상당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버스 안내양이 요금을 받았기에 몸 수색은 기본이고, 도둑 취급을 받는 일도 허다했다. 그러나 1982년 요금을 직접 요금함에 넣고 승차하는 ‘시민자율버스’가 등장하면서 버스 안내양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60~1970년대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졌다고는 하나 봉제사·식모·버스 안내원·화장품 판매원·호스티스 등 대접받지 못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보따리 하나 들고 무작정 상경한 시골 처녀들에게 서울은 결코 녹록지 않은 도시였다. 1975년 공전의 히트를 친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는 주인공 영자의 삶을 통해 산업화 물결을 타고 대도시로 온 시골 처녀들의 인생 행로가 다큐멘터리처럼 펼쳐진다. 시골에서 상경해 부잣집의 식모가 된 영자는 집주인 아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비참하게 쫓겨난 후 기술을 배워 떳떳하게 살겠다는 꿈을 안고 봉제 공장 여공, 버스 안내양 등의 직업을 전전한다. 그러나 만원 버스에서 사고로 한쪽 팔을 잃고 결국 ‘창녀’로 전락하고 만다는 내용이다.

정작 자신은 도시 빈민의 삶을 살면서도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영자’는 그 시대 이농민 여성을 대표하는 이름이었으며, 그들 덕분에 대한민국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 무역이 활성화되면서 대기업 상사(商社)가 선호하는 회사로 떠올랐고, 무역업 종사자는 최고의 결혼 상대로 꼽혔다. 무역업 종사자와 함께 1969년 대한항공이 출범하면서 여승무원도 ‘하늘의 꽃’이라 불리며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증시가 활황을 맞으면서 증권사 전성시대가 도래했다. 이 때문에 증권, 금융업이 성장하면서 외환 딜러나 펀드 매니저가 선호 직종으로 부상했고,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이 분야 관련 직종도 인기를 끌었다.

버스 안내양

서울로 올라온 시골 처녀에게 인기 직업이던 버스 안내양

영자의 전성시대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여성이 생계를 위해 전전했던 직업과 삶을 다큐멘터리처럼 그린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

IT 분야 벤처기업이 국가 경제 발전 견인

1990년대는 정치적으로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사회적·경제적으로 세계화를 외치며 금융과 정보 통신 등 IT 분야를 중심 산업으로 육성했다. 특히 인터넷의 등장은 IT 분야 벤처기업의 설립을 촉진했다. 그러나 1997년에 불어닥친 IMF 외환 위기로 직업 선택 시 안정성이 우선순위로 꼽혔다. 이후 외환 위기를 극복하면서 직업관도 바뀌어 평생직장에서 평생직업으로 인식이 전환되어 전문 자격증에 대한 인기가 높아졌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스마트폰의 대중화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이용자 수 증가로 SNS 마케팅 전문가, 빅데이터 전문가, 소셜 미디어 전문가 등 새로운 직업이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외환 위기 이후 지속되는 경기 침체로 취업 시장은 난항을 겪고 있다. 과연 해법은 없는 것일까?

서울시는 그 해법을 서울창업허브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창업을 지원해 일자리를 늘리고 실업률을 줄이겠다는 것이다. 물론 창업이 쉬운 일은 아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5년 이상 창업 기업 생존율은 27.3%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취직이 아니라 창직(創職)이 답’이라며 젊은이들에게 창업을 권하는 이유는 실업률을 낮추는 효과뿐 아니라, 크고 안정적인 직장만 바라보는 젊은 세대에게 창의력을 발휘해 새로운 대안을 생각해볼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창업, 특히 벤처 창업은 현대사회에서 국가의 경제 발전을 이끄는 첨병이다. 이스라엘이 대표적 사례. 1990년대 높은 실업률로 고민하던 이스라엘은 기술 인큐베이터를 이스라엘 26개 지역에 설립해 과학자, 기술자, 기업인뿐 아니라 창조적 아이디어를 가진 국민이라면 누구나 창업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그 결과 이스라엘 스타트업은 자율 주행, 인공지능(AI) 분야에서 최고의 기술력을 인정받으며 글로벌 기업에 인수되는 성공 신화를 써나가고 있다. 현재 이스라엘의 1인당 벤처 창업률은 세계 1위에 달하며 나스닥 상장 수는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 3위다. 작지만 강한 벤처기업들이 국가 경제 발전을 견인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 창업허브

서울창업허브에 입주한 창업 기업들은 성장 단계별 보육 지원을 받으며 성공의 꿈을 키우고 있다.

창업하기 좋은 도시, 서울

지난해 7월 개관한 서울창업허브는 서울시 창업 컨트롤타워로 공간 지원은 물론 멘토링, 교육과 투자가 한곳에서 이뤄지는 창업 허브다. 입주한 기업을 대상으로 성장 단계별로 보육 지원을 진행하며, 특히 기업당 최대 1억 원을 지원해 기술 경쟁력을 갖춘 유망 기업, 스타 기업을 육성하기 위해 해외 현지 보육을 추진하고 있다.

“3D 프린터로 안경테를 제작했어요. AI 기반 안면 인식 시스템을 바탕으로 하는 다양한 사업을 구상하고 있거든요. 내 얼굴형에 맞는 안경테 제작도 그중 하나죠.” 서울창업허브에 입주한 블루프린트랩의 박정은 씨는 제품화지원센터를 이용하면 제품 공장을 찾아가 의뢰하고 제작하는 번거로움 없이 원스톱으로 만들 수 있어 시간·금전적으로도 많은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개관한 지 1년 된 서울창업허브는 현재까지 616개 창업 기업을 육성했으며, 이들 기업은 222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특허나 상표, 디자인 등 지식재산권도 130건 등록했다.

“입주 기업뿐 아니라 투자자, 육성자, 지식재산권과 법률 조언 기관까지 상주해 창업을 하는 분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안성맞춤인 곳이죠. 그래서 입주 경쟁률도 상당히 높은 편입니다.”

창업보육팀 김혜경 팀장은 막연한 아이디어나 기술만으로는 서울창업허브에 입주하기도, 창업에 성공하기도 어렵다고 한다. 창업 정글에서 살아남으려면 아이디어나 기술의 완성도, 철저한 시장조사와 마케팅 분석 등 완벽하다 싶을 정도의 플랜을 짜야 한다고 조언한다.

서울시는 “서울창업허브가 글로벌 창업 생태계의 명실상부한 허브로서, 세계 혁신가들이 창업하기 좋은 도시 서울을 만들어 유니콘 기업의 산실이 되도록 지원한다”고 비전을 밝혔다.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는 창업 정글에서 서울창업허브가 창업의 꿈과 성공의 떡잎을 키울 수 있는 최상의 인큐베이터가 되길 바라본다.

직업의 역사

1910년대

1910년대 석유깡통을 단 물 지게를 지고 있는 경성 물장수

1930년대

1930년대 1950년대까지 인기 직업이던 전차 운전사

1960년대

1960년대 산업화의 주역인 여공

1970년대

1970년대 ‘하늘의 꽃’이라 불리며 선망의 대상이던 스튜어디스

1980년대 초반

1980년대 초반 1982년 프로야구가 개막하면서 운동선수가 인기 직업으로 떠올랐다.

1980년대 후반

1980년대 후반 증시가 호황을 맞으면서 펀드 매니저, 금융계 종사자의 인기가 치솟았다.

1990년대

1990년대 IT 산업 육성으로 벤처 붐이 일었다.

2000년대

2000년대 스마트폰 관련 직종이 블루오션으로 떠오르고 있다.

2018

2018 창업은 새로운 시각과 대안을 제시해준다.

서울창업허브에서 눈여겨볼 공간

서울창업허브

3층키친인큐베이팅

본관 3층에 위치한 키친인큐베이팅은 외식 창업을 희망하는 예비 창업자들이 적은 초기 투자 비용으로 창업을 준비하고 경험하도록 공용 주방을 제공하는 공간이다. 설비와 집기, 교육, 브랜딩, 마케팅, 유통, 멘토링 등 창업을 위한 종합적인 서비스를 제공한다. 구내식당 역할도 하기 때문에 입주 업체는 메뉴를 개발해 점심·저녁 메뉴로 팔면서 판매 경험까지 할 수 있다. 또 상시로 진행하는 메뉴 점검 프로그램인 블라인드 테스트를 통해 자신이 개발한 음식을 검증받을 수도 있다.

문의문의
02-2115-2000

키친인큐베이팅

2층제품화지원센터와 핀테크랩

별관 2층에 위치한 제품화지원센터는 사업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제품을 제작할 수 있는 곳이다. CNC 라우터, 밀링 머신 등 금속 가공 장비와 산업용 3D 프린터, 연마기 등 비금속 가공 장비 총 32대를 구비하고 있다. 제품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전에 100개 미만으로 완제품을 만들어볼 수 있는 것. 전문가가 상주해 제품 설계를 지원하는 것은 물론 하중 적정성, 동작 사양 등 제품 신뢰성 검증까지 도와주며 전자회로 설계안 검토, PCB 보드 샘플 조립, 전자회로 디버깅(debugging)까지 지원받을 수 있다.

문의문의
02-2115-2000

제품화지원센터와 핀테크랩

1층창업정보자료실

본관 1층에 위치한 창업정보자료실에는 창업과 관련한 다양한 서적과 온라인 자료, 데이터를 갖추고 있다. 특히 개학 도서관 등과 유기적으로 연계해 풍부한 자료를 지원하고, 서울시와 정부 발간물 등 정책 자료와 지원 사업 별치서가가 마련되어 있어 지원 사업도 효과적으로 접할 수 있다. 월 ~ 금요일에 관람 가능하며, 운영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문의문의
02-2115-2035

창업정보자료실

이정은일러스트 조성흠사진 홍하얀, 연합뉴스

참고자료 <세월따라 직업따라>(한국정보고용원), <각정동직업별호구조서>(서울역사박물관)

사진 제공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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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인문학 살롱] 취직이 아닌 창직으로 도전하라!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원본시스템 서울사랑 제공부서 시민소통담당관
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18-08-28
관리번호 D0000034348110 분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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