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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서 만나는 인문학] 별유천지, 자문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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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과 계곡, 너른 바위 등 수려한 풍경으로

한양 최고의 명승지로 꼽힌 옛 조선의 비밀 정원, 자하문 밖 이야기.


겸재 정선의 ‘선면 세검정도’

자하문(紫霞門)은 한양도성 사소문(四小門) 중 하나인 창의문(彰義門)의 별칭으로, 창의문보다는 자하문으로 더 많이 불린다. 그래서 자하문 너머 북쪽 동네인 부암동, 구기동, 신영동, 평창동, 홍지동도 자하문 밖 동네로 통칭한다. 종로 사람들은 그마저도 ‘자문밖’으로 부른다.

한양도성에는 동서남북에 사대문(四大門)을 세우고 그 사이에 사소문을 두었는데, 창의문은 서대문과 북대문 사이, 북악산과 인왕산이 만나는 움푹한 고갯마루에 세워졌다. 그러나 창의문은 드나드는 문이 아니었다. 건립한 지 18년 만인 태종 13년, 풍수학자 최양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으므로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올린 상소가 받아들여져 창의문과 숙정문을 폐쇄하고 그 주위에 소나무를 심었다. 이후 숙정문은 계속 닫혀 있었는데, 다만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지내는 시기에만 문을 열었다.

이와 달리 창의문은 왕명에 의해 일시적으로 통행이 가능했다. 세종 4년에는 병사들의 출입 통로로 이용할 수 있게 했고, 광해군 9년에는 궁궐 보수 작업 때 석재를 운반하기 위해 열어주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부암동 산자락에 안평대군의 별장 무계정사가 있었으니, 안평대군은 창의문을 무시로 드나들었을 터. 그 후 인조반정을 계기로 창의문은 쉽게 통행할 수 있었다.

인조반정군에 이어 북한 무장 공비까지 뚫고 들어온 문

인조반정 때 홍제원에 집결한 반정군이 세검정을 거쳐 창의문을 통해 창덕궁을 장악함으로써 반정에 성공했는데, 이때 도끼 한 자루로 창의문을 열었다고 한다. 반정공신들에게는 창의문이 개선문과 같은 의미였다. 창의문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춘 것은 영조 17년 한양도성을 개축할 때였다. 영조는 인조반정 거사를 기념하려고 창의문의 성문과 문루를 개축하고 반정공신들의 이름을 현판에 새겨 걸어놓게 했다. 지금도 그 현판이 문루에 걸려 있다. 본래 창의문의 ‘창의’란 ‘올바름을 밝힌다’는 뜻인데, 인조반정 때 그 이름값을 한 것이다.

창의문의 역사적 사건은 조선 시대에만 있었던 게 아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할 목적으로 31명의 무장 공비를 남파한 1·21사태가 발생한 곳이기도 하다. 무장 공비들은 휴전선을 넘어 수도권까지 잠입하는 데 성공했으나, 자하문을 통과하다가 불심검문을 받게 됐고 정체가 드러나자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다. 그 와중에 최규식 경무관과 정종수 순경이 사망해 두 사람의 순직 기념비가 창의문 바로 아래에 세워졌다. 이후 청와대 보안을 위해 창의문부터 와룡공원까지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다가 1993년에 개방했다. 창의문은 전형적인 성곽 문루의 모습으로, 서울의 사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오랫동안 사람들의 출입이 통제되었고, 도성 주변의 개발에 저해 요인이 없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맑은 물과 너른 바위 덕에 한지 제조에 최적

1950년대에 청운초등학교를 다닌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울 편 2>에서 자문밖은 아무런 볼거리가 없는, 육중한 바위와 세차게 흐르는 계곡 그리고 능금밭과 자두밭 일색인 외진 곳이었다고 회고했다. 그 당시 세검정으로 소풍을 자주 갔는데, 개울가에 있는 엄청 너른 너럭바위에 모두 앉아 김밥 도시락을 먹고 돌아오는 것이 전부였단다. 또 양지바른 미끄럼 바위에서 한 할머니가 하얀 닥종이를 널고 있는 모습이 신기해 오랫동안 바라보았던 기억이 남아 있다고 했다.

그의 기억대로 부암동, 신영동 일대는 한지를 제조하는 곳이었다. 조선 시대 궁중과 조정에서 사용하는 종이와 중국에 공물로 보내는 종이 등을 생산하던 조지서가 신영동 일대에 있었다. 물이 많고 종이를 널 수 있는 너른 바위가 많아 종이 제조에 적격이었던 것. 또 물이 너무 맑아 한 번 사용한 한지의 먹물을 씻어내고 바위에 널어 말려서 다시 사용했다고 한다. 조지서는 1882년 고종의 명으로 문을 닫을 때까지 450여 년간 조선 시대 제지 산업을 이끌었다. 그 때문에 부암동과 신영동은 1950년대까지 전국에서 가장 이름난 한지 생산지였다.

북쪽에서 본 창의문 원경.
문 바로 아래에 옹기종기 모인 집들이 인상적이다.

세도가들의 별장이 그린 진경산수화

자문밖 동네들은 이렇듯 물 맑고 너른 바위가 널려 있는 계곡, 울창한 숲 덕분에 풍류를 즐기려는 선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별장도 많았다. 부암동 주민센터 앞에서 오른쪽으로 큰길을 따라 올라가면 새로 지은 한옥과 잡풀이 우거진 공터가 나오는데, 새로 지은 한옥은 무계원이고 공터는 <운수좋은 날>, <술 권하는 사회> 등의 단편소설을 쓴 빙허 현진건의 집터다. 집터 뒤 오른쪽 언덕 위가 안평대군 별장터. 이 주변을 무계동이라 불러 안평대군의 별장을 무계정사라고 했다. 세종의 셋째 아들인안평대군은 친분이 두터웠던 안견에게 꿈에 본 이상향을 이야기했고, 안견이 이 내용을 3일 만에 그림으로 옮겼는데, 이것이 조선 초 최고의 명화 ‘몽유도원도’다. 한여름 무계동 계곡의 환상적인 모습을 보고 그린 것은 아닐까? 원본이 일본에 있어 아쉽지만 부암동을 거닐며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무계원은 조선 말기 서양화가 이병직의 집이던 오진암을 옮겨놓은 것이다. 오진암은 1970년대 삼청각, 대원각과 더불어 요정 정치의 산실이었으며, 특히 7·4남북공동성명을 도출해낸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종로구 익선동에 있었으나 그곳에 호텔이 들어서면서 종로구에서 무계정사 바로 옆으로 이축하며 무계원이라고 이름 붙였다. 현재는 전통문화 공간으로 시민에게 개방하고 있다. 무계원에서 골목을 따라 언덕길을 조금 올라가면 반계 윤웅렬의 별장이 나타난다. 1906년 건립 당시에는 서양식 붉은 벽돌집이었으나 윤웅렬의 셋째 아들인 윤치창이 상속받아 한옥 건물을 추가로 지었다고 한다. 현재는 주인이 바뀌어 담장 너머로만 구경할 수 있다.

다시 부암동 주민센터로 내려와 세검정 쪽으로 향하면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이 나온다. 수려한 경관과 정교한 정자 건물로 어우러진 이곳은 조선 말기 대표적 별장으로 꼽히는 곳이었다. 원래 영의정을 지낸 김흥근의 별장이었으나,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후 별장을 차지했다. 흥선대원군은 이 집을 차지하기 위해 고종을 이곳에서 숙식하게 한 후 왕이 묵은 집은 신하가 살 수 없다는 왕가의 원칙을 내세워 집을 빼앗았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흥선대원군의 탐욕 때문이었을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는 흥선대원군 자손들이 소유하다 여러 차례 경매를 거쳐 석파문화원 소유가 되었다. 석파문화원은 석파정 앞쪽의 서울미술관도 운영하는데, 서울미술관 야외 전시장에 오르면 오른편으로는 인왕산의 너른 바위에 지은 석파정의 전경이 수묵화처럼 펼쳐지고, 왼편으로는 북악산과 인왕산을 잇는 한양도성과 그 아래 고즈넉하게 안긴 부암동이 수채화처럼 펼쳐진다. 이쪽을 보나 저쪽을 보나 ‘한 폭의 그림’이다.

요정 정치의 산실이던 오진암을 옮겨와 새로 지은 무계원.
전통문화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옛 사대부의 비밀 정원, 도심 속 무릉도원

석파정에서 자하문로를 건너 환기미술관 쪽으로 방향을 틀면 백사실(白沙室)계곡 가는 길이 나온다. 화강암 지형의 북악산 토양이 물에 씻겨 흰모래가 많은 계곡이라는 뜻의 이름이 붙은 것이다. 백사실이라는 이름 때문에 백사 이항복이 살던 곳이라고 오랫동안 오해하기도 했다. 백사실계곡에는 조선 시대 별서가 있는데, 백석동천(白石洞天) 별서라고 한다. 지금은 집도 정자도 사라지고 주춧돌만 덩그러니 남아 있지만 1930년 7월 19일 자 동아일보에 북악8경 중 하나로 ‘백석동 팔각정’ 사진이 실린 것을 보면 그때까지 별서가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21사태 이후 오랫동안 청와대 경호 구역으로 지정되어 조사 자료가 미흡해 누구의 별서인지 추측만 무성한데, 현재로서는 추사 김정희의 별서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백석 동천은 대통령들에게도 감탄의 대상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5·16군사정변을 거사하고 나서 참모들과 백사실계곡에서 막걸리를 통음했다고 하고, 노무현 대통령은 국회로부터 탄핵 소추되었을 때 답답함을 덜려고 산행을 왔다가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나”라며 놀라워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아름다운 곳은 국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며 경호 구역에서 해제했다. 이후 종로구청이 산책길을 정비해 지금은 수많은 서울 시민이 찾는 산책 코스가 되었다. 백사실계곡은 서울에서 보기 드문 자연 생태 지역이다. 도롱뇽·개구리·버들치·가재 등 다양한 생물체가 서식하고 있으며, 특히 1급수 지표종인 도롱뇽은 그 보존 가치가 매우 높다. 이에 종로구에서는 지역 어르신들을 백사실 생태 지킴이로 지정, 백사실계곡 생태 보호에 나서고 있다.

“부암동에서 20년 넘게 살고 있어요.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도롱뇽 잡고 가재도 잡고 그랬지요.”
백사실 생태 지킴이로 활동 중인 유영식 씨는 “아이들에겐 최고의 놀이터였다”며 “싱그러운 녹음이 시작되는 초여름과 가을에 가장 아름답다”고 귀띔했다.

별서터를 둘러보고 계곡을 따라 계속 내려가면 그 산줄기가 끝나는 곳에 홍제천이 있고 세검정과 조지서터, 탕춘대터를 만난다. 탕춘대터에는 원래 신라 시대에 창건한 장의사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연산군이 장의사를 작파하고 탕춘대라는 놀이터를 만들어 기생들과 질펀하게 놀았다. 양반의 풍류지였던 자문밖은 영조 때에 이르러 수도권 북쪽 방위를 담당하는 총융청 사령부가 주둔하면서 군사기지로 변모했다.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국방상 이 지역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새로 들어선 군대를 신영이라고 했는데, 현재 신영동의 유래가 되었다. 2만 명이 주둔하니 군량미를 보관하는 창고가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었다. 군량미를 보관하는 창고를 평창(平倉)이라고 했다. 평창동이란 지명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총융청은 1884년에 친군영제가 성립되면서 폐지되었다. 세검정초등학교 정문 옆 담장 아래 ‘총융청터’라는 표지석이 있고, 평창동 주민센터 뒤 럭키빌라 입구에는 ‘평창의 터’라는 표지석이 있다.

백사실계곡에는 백석동천 별서터가 남아 있다.
추사 김정희의 별서라는 설이 유력하다.

백사실 생태 지킴이로 활동하고 있는 이장춘, 유영식, 정경순 씨

불구경만큼 재미있는 물구경

아쉽게도 조지서, 탕춘대, 총융청, 장의사 등은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지만 세검정은 아직도 의연하게 서 있어 자문밖 역사의 증인이 되고 있다. 세검정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궁궐지(宮闕志)>에 의하면, 인조반정 때 이귀, 김류 등 반정 인사들이 이곳에 모여 광해군 폐위를 논의하고 칼을 갈아 씻었던 자리라고 해서 세검정이라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연산군 시절 유흥을 위해서 수각(水閣)을 세웠다는 설도 있고, 총융청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병사들의 휴식처로 세웠다는 말도 전해진다. 유래야 어찌 됐든 세검정 정자를 세운 뒤 자문밖은 한양도성 밖 명소가 되어 한양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장마가 지면 해마다 도성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물구경을 했다고 한다.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물 기운이 장관이었던 것. 다산 정약용도 세검정으로 물구경을 와서 ‘유세검정기’라는 글을 남겼다.

하지만 지금은 아쉽게도 그런 물구경을 할 수가 없다. 그 시절 모습도 아니다. 1941년 세검정 부근에 있던 종이 공장에 화재가 나면서 세검정도 타고 주춧돌만 남았다. 이를 1977년에 복원했는데, 이때 겸재 정선이 그린 ‘세검정도’를 참조 했다고 한다. 세검정은 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동국여지비고>에는 “세검정은 열조의 실록을 완성한 뒤에는 반드시 이곳에서 세초를 했다”고 전해진다. 세초는 사관들이 제출한 사초를 기밀 누설 방지를 위해 물로 흔적 없이 씻어내는 것을 말한다. 세초를 한 후 왕은 수고한 이들에게 정자 앞 너럭바위에서 술을 내리고 잔치를 열어주었다.

해산 유숙이 그린 ‘세검정도’.
장마철의 세검정을 실감 나게 묘사했다.

자하문 아래 첫 동네, 메주가마골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사람이 살 만한 곳은 네 가지 요소를 갖춰야 한다고 했다. 첫째 지리(地理), 둘째 생리(生利), 셋째 인심(人心), 넷째 산수(山水)다. 산수란 자연경관이 뛰어난 곳을 말하는데, 한양 사람들에게는 자문밖 일대가 산수였다. 그러나 민초는 참으로 살기 팍팍한 곳이었다. 이에 나라에서는 날품을 팔며 근근이 살아가는 백성을 위해 조정에 메주를 납품하는 권리를 주어 마을 공동으로 메주를 쑤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창의문을 지나 세검정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자리한 부암동의 첫 동네를 메주가마골이라고 불렀다. 부암동 주민센터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붙은 작은 가겟방과 주택이 옛 메주가마골의 묵은 분위기를 전해 준다.

그런 부암동이 서서히 변하고 있다. 한적한 곳에서 여유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백사실계곡 부근에 집을 지으면서 고급 주택가가 형성되었다. 또 10년 전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 촬영지로 널리 알려지면서 카페와 미술관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요즘은 문화 관련 방송 프로그램에 자주 소개되면서 평일에도 부암동을 찾아 역사 유적과 문화 예술을 향유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다행히 부암동은 아직까지는 아름다운 자연과 역사 유적, 잃어버린 시간이 머물러 있는 곳이다. 하지만 그 모습들이 쉽게 일그러지는 것을 북촌과 서촌에서 보았기에 걱정이 앞선다. 그런 걱정이 객쩍은 기우이길 바라며 창의문 문루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았다.

광화문 쪽은 마천루가 즐비한 도심이고, 부암동 쪽은 산자 락에 포근히 안긴 나지막한 동네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렇게 다르다니! 도대체 서울의 매력은 어디까지일까? 이 두 모습이 언제까지나 공존했으면 하는 바람이 창의문 문루에 부는 바람보다 더 세차게 밀려들었다.

서울미술관 야외 전시장에 오르면 오른편으로는 석파정이, 왼편으로는 부암동 전경이 펼쳐진다.

이정은사진홍하얀 일러스트조성흠 자료제공국립중앙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한양도성박물관
참고도서<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울 편 2>(창비), <귄기봉의 도시산책>(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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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서 만나는 인문학] 별유천지, 자문밖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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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17-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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