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사랑
[서울의 오래된 것들] 서울의 애환과 꿈을 안고 흐리는 한강 위에 놓인 역사의 흔적들, 한강의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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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은 언제부터 이렇게 역동적인 모습으로 힘차게 흘러왔을까. 태곳적부터 그 흐름을 멈추지 않았을 한강은 많은 인구가 밀집한 수도 서울에는 물을 공급해주는 축복의 젖줄이었으며, 쉴새없는 확장을 이어온 개발 앞에 서는 때로 장애물이 되기도 했다. 1900년 최초로 한강에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 한강을 건너기 위한 수단은 오직 배뿐이었으니, 이제 100년이 조금 더 지난 한강 다리들의 역사는 미래 서울을 생각하면 단지 시작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양화대교
지금 한강은 서울에서 가장 뚜렷하게 눈에 띄는 자연 상징물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이 거대한 강줄기가 서울의 한복판을 가로지르게 된것은 역사적으로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광복 당시만 해도 영등포를 비롯한 한강 이남에 시가지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한강은 여전히 서울의 변두리를 흐르는 위상을 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한국전쟁 이후 급격한 인구 유입으로 도시가 팽창되면서 한강 이남을 잇는 다리의 추가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렇게 탄생한 다리가 양화대교다. 이 다리는 한강대교에 이은 두번째 다리로 1965년 완공 당시에는 ‘제2한강교’로 불렸다.(다음 건설된 한남대교는 ‘제3한강교’가 된다.) 무엇보다 양화대교는 전쟁 이후 우리의 기술력으로 지은 첫 번째 다리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녔으며, 본격적인 경제개발의 시작을 알린 다리이기도 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서울과 가까운 휴전선의 문산으로 물자 수송을 위한 군사적인 목적도 있었다고 하니 전후 긴장감을 엿볼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다리 건설 이후 영등포와 신촌의 발전으로 4차선으로 개통됐던 다리의 교통량은 날로 증가했고, 이에 따라 1982년 이전 다리 옆에 같은 규모의 다리를 하나 더 놓음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왕복 8차선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양화대교 위에는 카페를 비롯해 철새를 관측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고, 가까이에 있는 선유도공원도 들러볼 수 있어 지루하지 않은 산책길이 펼쳐진다. 북단에 도달해 한강공원으로 내려서면 다리 이름의 어원이된 양화나루의 양화진터, 절두산 성지 등 역사적인 흔적들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양화나루는 한양 3대 나루터이기도 했다. 한때 용산이 으뜸가는 나루였으나 한강 수위가 점차 낮아지면서 양화나루가 교통의 요충지가 되기도 했다. 근처 와우산 아래 전국의 곡물을 운반해 보관했던 광흥창의 존재는 국가의 세금을 거두는 항구 역할을 했던 중요한 거점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준다.
나는 강가에 앉아 포근한 겨울의 초입에 남은 키 큰 억새들의 하늘거림에 푹 빠져 있었다. 양화대교의 ‘양화 (楊花)’란 버드나무를 일컫는 말이다. 아마도 그 옛날 양화나루에는 물 좋아하는 버드나무가 가득했을지도 모른다. 상상속의 풍경은 한강에서도 정자가 많기로 유명했던 이 부근의 기록들을 수묵화처럼 그려낸다. 얼마나 아름다웠던 곳일까. 그 아득했던 풍경을 뒤로한 채 하늘거리는 억새풀이 한없이 가냘프게 보였다.
한강대교
양화대교에서 한강대교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너른 하늘이 펼쳐진 강가를 따라 걷는 사색은 고층 건물 가득한 서울에서는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기에 무릇 짧게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한강대교에 앞서 한강철교에 다다른다. 사실 한강에 최초로 놓인 다리는 한강대교가 아닌 그 옆 철교인 한강 철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철교의 탄생은 결코 시민들의 편의를 위한 목적은 아니었다. 강화도조약으로 개항된 인천과 서울을 한시라도 빨리 연결시키려 했던 제국주의 열강들의 조선 침탈 목적이 앞섰기 때문이다. 노선은 당시 인천을 통해 들어와 한강과 만났던 포구인 노량나루를 통과하는 곳으로 정해졌던 것이다.
그 후 20여 년 가까이 지난 1917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사람이 건널 수 있는 다리가 놓였다. 드디어 배를 이용하지 않고 걸어서 한강을 건너는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바로 오늘날 한강대교의 전신이다. 한강철교를 만들고 남은 자재를 이용해 만든 터라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는데, 설상가상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일부분이 유실돼 다시금 확장 보수를 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한국전쟁 때에는 북한의 남하를 막고자 작전상 한강철교와 함께 예고도 없이 너무 일찍 폭파시키는 바람에 당시 다리를 건너던 수백 명의 피난민이 그 자리에서 희생됐고, 서울 인구 80%와 2개 사단의 군병력도 강을 건너지 못한 채 고립되는 쓰라린 역사도 남겼다.
이토록 애환 많은 한강대교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야간 조명을 밝히며 대표적인 나들이 명소로 인기가 높았다고 하는데 동시에 자살 명소로도 악명이 높았으니 아이러니 할 뿐이다. 당시에는 ‘일촌대기(一寸待己)’라 하여 ‘잠깐만 참으시오’라는 팻말을 세워 놓았다고 하는데, 오늘날 상판 아치트러스에 기름을 바르거나 롤러 달린 판을 설치해 등반 자체를 원천 차단하는 일이나 ‘생명의 전화’까지 설치돼 있는 것을 보면 그 오명이 이어지는 듯해 씁쓸할 따름이다.
공교롭게도 양화대교와 한강대교는 모두 섬을 거쳐가는 다리다. 지금은 텅빈 노들섬을 한 바퀴 빙 돌아보았다. 과거 노들섬은 지금처럼 시멘트로 각지게 마무리한 옹벽 요새가 아닌 하얀 백사장이 펼쳐진 아름다운 모래섬이었다고 한다. 물이 적던 갈수기에는 섬 남쪽으로만 강물이 흐르고 북쪽 용산 강변까지는 하얗게 모래밭이 이어졌는데, 조선시대에는 그 규모가 여의도보다 컸다고 전해온다. 그 위로 거대하게 펼쳐진 갈대숲 절경은 노을이 질때면 장관을 이뤘고, 섬에는 물맛이 빼어난 우물까지 있어 이를 궁궐에 바치기도 했다 하니 상전벽해의 무상함이 이렇지 않을까 싶다. 백사장은 1960년대 까지만 해도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로 끊이지 않았다고 전해지지만, 한강종합개발로 일정한 수량이 흐르는 한강이 조성되면서 이제는 시멘트 인공수변을 가진 조그마한 섬이 되고 말았다. 앞으로 노들섬에는 새로운 문화시설이 들어설 것이라고 한다. 그 옛날 사람들로 북적이던 노들섬의 영화가 또 다른 모습으로 재현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나는 한강대교 북단에 위치한 노들카페에 들렀다. 노들이란 ‘백로가 놀던 징검다리’라는 뜻이다. 이를 한자어로 쓴 것이 ‘노량’이 된다. 백로도, 징검다리도 모두 고층 건물에 파묻혀 요원한 지금의 풍경에 우리는 어떤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어야 하는건 아닐까. 창밖에는 짧아진 겨울해가 근사한 저녁노을을 만들고 있었다. 고층 건물 사이로 지는 일몰을 바라보며 그 익숙한 풍경에 괜스레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래, 이토록 무섭게 변해가는 서울이지만 결국 순응밖에는 방법이 없구나. 한 해의 마지막에 와있다. 새해에는 또 얼마나 새로운 서울이 펼쳐질까.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기대도, 걱정도 느 껴지지 않는다. 저토록 아름다운 해넘이를 앞으로도 한강은 무수히 담아낼 테고 우린 그 노을빛에 몸을 맡긴채 매일 저녁 물들어 가기만 하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장희
다양한 매체에 글과 그림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지은 책으로 <서울의 시간 을 그리다> <사연이 있는 나무이야기>가 있다.
서울시 미래유산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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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일러스트 이장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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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시스템 | 서울사랑 | 제공부서 | 시민소통담당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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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책임자) | 한해아 | 생산일 | 2015-12-10 |
관리번호 | D0000028037178 | 분류 | 기타 |
이용조건 | 타시스템에서 연계되어 제공되는 자료로 해당기관 이용조건 및 담당자와 협의 후 이용하셔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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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16-07-19 부서 : 시민소통담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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