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사랑
[서울의 오래된 것들] 안식과 평화를 찾아 '서울의 종교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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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우리나라에는 현재 많은 종교와 그에 따른 고유한 개성의 종교 건축물들이 있다. 토속 종교인 불교의 건축물 사찰은 서울의 산을 오르다가도 볼 수 있지만, 도심에서도 종종 만날 수 있다. 근래에 들어온 천주교나 기독교 예배당들도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공존하고 있다. 이번 호에는 대표적인 이 세 종교의 건축물 풍경을 담았다.
돈암동 성당
1785년 이 땅에 천주교가 처음 전래된 이후 1882년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전까지 천주교인들은 많은 박해 속에서 종교 활동을 해야만 했다. 따라서 지금과 같은 ‘성당’이라 부를 만한 천주교회의 건물 모습은 애초부터 엄두조차 낼 수 없었고 그저 일반 집에 몰래 모여 미사만 드리는 정도였다. 1892년에야 비로소 우리 나라에 최초의 성당 건물이 등장하게 되는데 중림동에 세워진 약현성당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성당은 12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이후 속속 건축된 성당 형태는 주로 벽돌을 사용했다. 이는 담당 교구 선교사들의 지역색이 반영된 것이 기도 했다. 여기에 조금 색깔을 달리해 전체적으로 화강암을 사용한 돈암동성 당이 등장한 것은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5년부터다. 이 시기는 교세의 급격한 팽창으로 성당 수요가 빠르게 늘어나기 시작한 때다. 일제강점기가 막을 내리고 한국전쟁으로 사회 전반에 불안감이 팽배하던 시절로 전쟁이라는 비극적 체험이 많은 이들을 종교 안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비약적으로 발달한 천주 교회는 이에 발맞춰 많은 사회사업을 전개했다. 하지만 전쟁 직후 대부분의 신설 성당이 그러했듯 교구청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형편이 못 됐다. 신자들도 가난해 자력으로 성전 건축을 세우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따라서 일본인 소유였던 토지들이 해방 후 국유화되었다가 싸게 불하를 받아 성당이 건립되기까 지의 모든 재정이 외국 선교단체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던 때였다. 당시의 이러한 도움은 돈암동 신자들에게 행운 그 자체였다.
돈암동에 성당이 생기기 전까지는 혜화동성당까지 걸어가 미사에 참례를 했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개울이 많아 징검다리도 많았다는 기록도 보이니 주일 아침의 목가적인 풍경속 행렬이 지금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그렇게 새로운 안식처가 되어준 성당은 당시 낮은 주택들 사이에서 더욱 웅장하고 경이롭게 돋보이며 신자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돼 주었을 것이다.
길상사
우리나라에는 오래전 불교가 전해져 전국 곳곳에 많은 사찰이 있고, 이 사찰들은 저마다 탄생의 배경이 되는 소중한 설화들을 간직하고 있다. 천년 고찰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절이 있는가 하면, 국사(國師)를 지낸 덕망 높은 고승이 창건했다는 유서 깊은 이야기를 담은 절도 있다. 어디 하나 각별한 사연을 담지 않은 절집이 있을까. 하지만 서울의 번화한 도심에서 멀지 않은 성북동에는 그리 오래되지도 않은, 그렇다고 스님이 직접 뜻을 갖고 창건한 것도 아닌 절집 같지 않은 절집이 하나 있다. 짧은 역사와 더불어 더없이 애틋한 창건의 사연을 담고 있는 이 절집 이름은 길상사(吉祥寺)다.
길상사는 1995년 탄생한 젊은 사찰이다. 하지만 건축물까지 그때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기존에 있던 것을 절집으로 바꾼 것인데 이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건물들은 무슨 용도였을까? 놀랍게도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국내 3대 요정(料亭) 으로 꼽혔던 대원각이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원각을 운영하던 김영한 여사가 법정스님의 무소유 철학에 감명을 받아 1,000억 원이 훨씬 넘는 재산을 선뜻 불교에 내놓은 것이다. 절 이름도 그의 법명인 ‘길상화’에서 따왔다. 무엇보다 김영한 여사의 애틋한 사연은 젊은 시절 근대 시인으로 잘 알려진 백석과의 사랑 이야기 때문에 더욱 깊고 아련해진다. ‘천재 시인’이라 일컬어졌던 백석의 시집은 우리 시대 시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광복 뒤에 이어진 남북 분단으로 북한에서 활동하다 생을 마감한 월북 작가로 분류돼 한 때 우리에게는 금서의 시집이기도 했다.
몇 년간 열애를 나누었던 두 사람, 당시 만주로 함께 떠나자는 백석의 제안을 거절한 김영한은 결국 살아생전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었다. 이후 평생 독신으로 살아온 그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불교에 시주하기에 이른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어느 기자가 고령의 할 머니가 된 김영한 여사에게 물었다.
“그분 어디가 그렇게 좋으셨어요?”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도 못해. 다시 태어난다면 나도 시를 쓸 거야.”
극락전 주변 바위에 걸터앉아 따사로운 오후의 햇살을 즐겼다. 경내를 물든 가 을빛이 사랑스럽다.
그저 세상의 많은 변화들이 놀랍고 신비롭기만 하다.
요정에서 절집이 된 길상사처럼 의미 있는 변화가 또 있을까. 고요한 경내에는 멀리 삼각산 자락을 휘돌아 오르는 자동차의 간헐적인 엔진 소음만 아련하게 전해져 왔다. 요정을 가득 채웠을 소모적인 웃음들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이제 그 자리에는 극락전 금당을 지키고 있는 아미타불의 엷은 미소만 남았을 뿐이다.
석교교회
독립문 근처의 석교(石橋)교회가 위치한 천연동(天然洞)이라는 이름은 근처에 있던 천연지(天然池)라는 연못에서 유래했다. 이 연못은 조선시대 도성의 화재를 대비해 조성한 인공연못이다. 각 성문 밖에 하나씩 위치했던 것으로 서쪽 연못에 해당된다. 못 한가득 연꽃이 만발해 그 아름다움에 반한 선비들이 연못가에 천연정과 청수관이라는 정자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이 연못으로 흘러든 개울물은 금화산으로부터 발원되었다고 하는데 금화산은 높이에 비해 많은 약수가 솟아오르기로 특히 유명하다. 이제 그 산은 이웃한 안산에 속해 함께 일컬어지며 근처 금화터널이라는 명칭 속에서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어찌됐든 그 개울 돌다리 주변에 마을이 있어 석교동이라고 이름 붙었고, 그곳에 세워진 교회가 오늘날 석교교회다. 기독교 중에서도 감리교인데 근처에 감리교신학대학교까지 있으니 교회의 위치가 지닌 의미는 더욱 클 수밖에 없어 보인다.
석교교회의 역사는 19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는 한옥을 예배 당으로 개조해 사용했는데 5년 만에 신도 수가 100여 명에 육박해지자 더 큰 예배당 건립이 절실하게 됐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소위 성 밖에 사는 주민들이 대부분 가난해서 헌금으로 거금의 건축비를 마련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었는지 운좋게 미국 교인들의 헌금이 모아져 마침내 1917년 새로운 벽돌 교회를 완공할 수 있었고, 증축을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다.
교회 마당에 섰다. 주차장 한가운데 자라고 있는 은행나무와 향나무는 예전 이곳이 주차장 터가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오래전 풍경이었을 개울이나 석교라는 이름을 만들어준 돌다리는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아 상상의 실마리를 이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고민들이 나는 좋다. 변해가는 서울을 붙잡을 수는 없겠지만 과거의 끄트머리를 이어나가며 장소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나는 과거 언젠가 시멘트에 덮여버린 개울을 따라 연꽃 만발했을 연못이 있었다는 금화초등학교를 향해 다시금 걷기 시작했다. 따뜻하게만 느껴지는 가을 햇살이 나를 따랐다.
이장희
다양한 매체에 글과 그림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지은 책으로 <서울의 시간 을 그리다> <사연이 있는 나무이야기>가 있다.
서울시 미래유산 홈페이지 futureheritage.seoul.go.kr
서울시는 우리의 미래 세대에게 남길 만한 소중한 근현대 서울의 문화와 유산 을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해 지원합니다.
<서울의 오래된 것들> 칼럼은 서울시 선정 미래유산을 중심으로 꾸며집니다.
글·일러스트 이장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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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시스템 | 서울사랑 | 제공부서 | 시민소통담당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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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책임자) | 한해아 | 생산일 | 2015-11-19 |
관리번호 | D0000028037164 | 분류 | 기타 |
이용조건 | 타시스템에서 연계되어 제공되는 자료로 해당기관 이용조건 및 담당자와 협의 후 이용하셔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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