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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의 성공과 몰락이 던지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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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이 그려진 만 원짜리 지폐의 뒷면에는 그려진 혼천의(천문관측기)와 천문도(별자리 그림)를 만든 주인공 ‘장영실’. 요즘 그의 일대기를 다룬 역사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다. 15세기 조선 천재과학자 장영실은 유교를 근간으로 한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노비로 태어났으나, 어릴 때부터 천재성을 인정받아 궁에 들어가 조선의 과학기술을 세계 최고로 만든 과학자이다. 그의 숨은 이야기를 좀 더 알아보자.
노예로 태어나다
그의 본관은 충남 아산현이다. 관노이기 때문에 출생기록이 정확하게 남아있지 않으나 1390년대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15년(1433)에 장영실의 출생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데 “장영실은 그 아비가 본래 원나라의 소주·항주 사람이고 어미는 관의 기생이었다.”라고만 되어 있다.
반면 ‘아산 장씨 족보’에는 장영실이 고려 때 송나라에서 망명한 이후 줄곧 한반도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귀화인의 후손으로 장영실의 집안은 양반 가문임을 밝히고 있다. 아버지는 고려 말 정3품 전서(典書)로 서운관(천문현상,운명학,풍수지리 담당관청) 판서를 지낸 장성휘(蔣成暉)로 되어 있다.
또 ‘아산 장씨 종친회’에 따르면, 3세손인 장공수와 장숭이 당시 무기 제조 기관이었던 군기시 책임자를 지내고, 5세손 장득분이 기상관청인 서운관의 책임자를 지내는 등 대대로 고려의 과학 기술 분야 고위직 책임자였다니 조상으로부터 과학적 재능이 이어져 내려온 것 같다. 아버지 5형제 모두 과거에 급제해 장관급 자리까지 올랐으나, 조선 개국을 반대하다가 이방원 등 개국파의 철퇴를 맞아 급격히 몰락했고, 이때 장영실의 어머니가 관노(관청의 기생)가 되었다고 한다. 결국 장영실은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노예로 태어난다.
노예 신분으로 궁에 들어가다
장영실이 10세가 되자 어머니와 헤어져 동래(지금의 부산)현 소년 관노로 있던 어린 시절의 일화는 그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일을 마치고 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틈틈이 병기 창고에 들어가 녹슬고 망가진 병장기와 공구들을 말끔히 정비하였다. 한번은 현감 부인이 가장 아끼던 장롱의 자물쇠가 고장 나 아무도 고치지 못하는 것을 고쳐놓아 현감의 신임을 얻었다. 또 장영실이 살았던 동래현에 심각한 가뭄이 왔을 때 관개수로를 파고 먼 곳에서 물을 끌어 올 수 있게 수차(오늘날로 따지면 양수기 펌프)를 개발해 동래현의 가뭄을 해결했다.
이밖에도 철을 만드는 제련기술과 축성, 농기구, 무기 등의 수리에 뛰어난 장영실의 비범함은 조정에까지 알려졌다. 태종이 도천법(道薦法: 과거를 통하지 않고, 도에서 인재로 추천받아 관직에 오르는 제도)에 근거해, 전국의 인재를 발탁하자 동래 현감이 장영실을 천거했다.
세종대왕과 만나다
태종의 아들 세종은 중농정책과 정치질서를 하늘의 이치와 결부시키려는 성리학자들의 영향으로 새로운 정치 이상의 구현을 위한 차원에서 천문학과 천문기기 제작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장영실의 뛰어난 재능을 알게 되고, 그를 경복궁으로 불렀다. 장영실은 세종이 즉위하고 얼마 안된 1421년(세종 3년)에 천문관 관리였던 윤사웅, 최천구와 함께 중국의 천문시설 시찰단으로 파견되었다. 세종은 시찰단이 당시 세계 최고를 자랑하던 중국의 천문시설을 배워와서 이를 조선에서 재연해 주길 바랐다.
농사가 주된 산업이었던 조선시대에 절기에 따른 태양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고 그 절기에 농촌에서 해야 할 일을 정확히 백성에게 전달할 수 있는 천문기구의 발명품이 필요했다. 1423년(세종 5년), 세종은 장영실을 왕실의 물품을 제작, 수리하는 상의원의 별좌로 임명했다. 세종은 장영실이 중국의 ‘천문지’와 아랍의 ‘정교한 기계장치의 지식서’ 등 천문 관련 자료를 가지고 시찰에서 돌아오자 ‘양각혼의성상도감’이라는 왕립천문대를 건립했다.
옥루로 민심을 되찾다
1432년에 경복궁과 서운관 두 곳에 설치할 많은 천문관측의기(天文觀測儀器)를 만드는 계획이 착수되었는데, 이때부터 장영실은 이천(李?)과 함께 천문기기를 설계하고 제작을 지휘했다.
1437년부터 6년 동안 장영실은 역사에 남을 과학적 발명품들을 만들어냈다. 특히 시간을 알려주는 자격루와 세계 최초의 천문기구인 혼천의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옥루는 장영실이 남긴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이다.
옥루의 발명으로 절기에 따른 태양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었고, 이에 따라 농사를 계획할 수 있어, 농민과 백성의 민심을 얻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고려에서 이조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잃었던 민심을 되찾으며 세종은 위민정치의 정점에 이르게 된다.
세종의 가마 사고는 계획됐다?
세종과 함께 조선의 과학·천문기술과 농업생산에 엄청난 기여를 했던 장영실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어느 날 세종이 장영실에게 의뢰해 만든 새 가마를 타고 창덕궁 쪽으로 향하는 도중 돈화문 근처에서 가마가 부러지는 사고가 있었는데, 세종실록에는 “대호군 장영실이 안여(安輿: 임금이 타는 가마) 만드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튼튼하지 못하여 부러지고 허물어졌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사고 때문에 장영실은 불경죄로 의금부에 투옥되고, 곤장 80대 장형을 받은 뒤 파직되었다.
장영실의 가마 사고에는 많은 의혹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가마제작의 총 책임자는 장영실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세종은 장영실을 엄중히 처벌한 반면, 책임자에겐 벌을 내리지 않았다. 게다가 장영실은 가마가 부실하다며 다시 꼼꼼하게 제작할 것을 요구했지만 총 책임자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는 기록까지 존재해 더 의혹을 키웠다. (출처: 인물로 보는 조선사, 김형광)
세종은 사고 이후 장영실이 만든 천문대 철거를 지시하기까지 이른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세종이 연로하고 건강이 악화되자, 친명 관료들과의 권력다툼에서 패한 뒤, 장영실을 내치기 위해 가마사건을 이용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출처: 한국과학기술인물12인중, 전상운)
실수에 관대한 사회를 꿈꾸며...
단 한 번의 실수로 자리에서 물러난 장영실. 만일 그가 그 뒤로도 발명품 제작에 전념할 수 있었다면 조선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육군이 일본의 조총에 무너지는 일이 없었을 수도 있고, 농민들의 생활이 더 풍족해졌을 수도 있다.
오늘날에도 사소한 실수로 큰 벌을 받아 안타까운 인재를 잃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본다. 작은 실수 하나로 재능을 펼칠 기회를 잃는 사회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기술 혁신에 나서는 무모함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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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시스템 | 내손안에서울 | 제공부서 | 콘텐츠담당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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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책임자) | 시민기자 조시승 | 생산일 | 2016-01-22 |
관리번호 | D0000024933039 | 분류 |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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