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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동'에 왕릉이 없는 이유…조선왕릉에 묻힌 흥미로운 사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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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는 다양한 조선 왕릉들이 조성돼 있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82) 서울에 소재한 조선 왕릉 2
서울에 소재한 조선 왕릉이 의외로 많이 있으며, 이들 왕릉에는 흥미로운 사연들이 있음을 소개했다. 이번 회에는 지난 회에 소개한 정릉(貞陵), 헌릉(獻陵), 선릉(宣陵), 광평대군 묘역 이외에 연산군묘, 중종의 정릉(靖陵), 문정왕후의 태릉(泰陵), 경종의 의릉(懿陵) 등의 왕릉과 회묘(懷墓), 효창원(孝昌園), 어린이대공원 일대를 능동(陵洞)이라 부르게 된 사연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회묘와 연산군묘
경희대학교 서울캠퍼스 근처에는 지하철역 ‘회기역’이 있다. 인근의 동네명이 회기동(懷基洞)이기에 역명도 회기라고 한 것이다. 회기동이라는 동네명은 이곳에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무덤이 있었던 곳, 즉 ‘회묘의 터’라는 이름에서 유래한다. 성종의 계비로 들어왔지만, 1479년 폐위된 윤씨는 1482년 성종이 내린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했다. 폐비 윤씨의 묘는 처음 경기도 장단(長湍)에 조성됐는데, 연산군 때 현재의 동대문구 회기동으로 천장했다.회묘는 경기도 고양시 원당읍 서삼릉 경내로 이장됐다.
연산군은 즉위 후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齊憲王后)로 추존했고, 회묘(懷墓)도 ‘회릉(懷陵)’으로 높여졌다. 그러나 1506년 9월 중종반정 후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제헌왕후의 시호가 삭탈 되고 다시 회묘로 격하됐다. 1969년 10월 경기도 고양시 원당읍 서삼릉(西三陵) 경내로 이장됐으며, 회묘가 있던 자리에는 현재 경희대학교 경희의료원이 있다.
중종반정으로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연산군은 강화도 북쪽의 섬 교동도(喬桐島)에 유배됐다. 그리고 유배지에서 두 달 만에 역질로 죽었다고 『연산군일기』는 기록하고 있다. 유배지에서 사망한 후 연산군묘는 교동도에 조성됐다. 1512년(중종 7) 12월 연산군 부인 폐비 신씨(愼氏)가 상언(上言)해 연산군의 무덤을 양주(楊州) 해촌(海村)으로 이장해 줄 것을 청했다. 중종은 이를 허락하고, 왕자군(王子君)의 예로 개장(改葬)하도록 했다.
중종반정으로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연산군은 강화도 북쪽의 섬 교동도(喬桐島)에 유배됐다. 그리고 유배지에서 두 달 만에 역질로 죽었다고 『연산군일기』는 기록하고 있다. 유배지에서 사망한 후 연산군묘는 교동도에 조성됐다. 1512년(중종 7) 12월 연산군 부인 폐비 신씨(愼氏)가 상언(上言)해 연산군의 무덤을 양주(楊州) 해촌(海村)으로 이장해 줄 것을 청했다. 중종은 이를 허락하고, 왕자군(王子君)의 예로 개장(改葬)하도록 했다.
처음 연산군묘는 유배지에 조성됐다가 1512년(중종 7) 12월 연산군 부인 폐비 신씨의 요청으로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연산군의 무덤이 양주군 해등면 원당리(현재의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로 이장됐다. 양주로 이장된 것은 이곳에 연산군의 사위인 능성(綾城) 구씨(具氏) 구문경(具文璟)의 선영(先塋)이 있었기 때문이다. 1513년 2월 11일 중종은 연산군묘를 수축하게 하고, 양주의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했다. 1537년(중종 32) 폐비 신씨가 사망하자 이곳에 무덤을 조성해, 쌍분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중종의 정릉, 문정왕후의 태릉, 명종의 강릉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에 소재한 성종의 선릉(宣陵) 곁에 중종의 정릉(靖陵)이 오게 된 사연도 흥미롭다. 1544년(중종 39) 11월 15일 중종이 창경궁 환경전(歡慶殿)에서 승하했다. 중종의 첫 번째 계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가 먼저 승하한 후 고양 원당리에 희릉(禧陵)을 조성했기 때문에, 중종이 장지 선정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총호사이자 우의정 윤인경(尹仁鏡)이 희릉을 살펴본 후 그 옆이 적합함을 아뢨고, 인종은 중종의 무덤을 장경왕후의 희릉 오른쪽 언덕에 동원이강릉(同原異崗陵) 형식으로 조성했다.중종의 정릉은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성종의 선릉 곁에 있다.
문제가 된 것은 왕릉의 능호(陵號)였다. 처음에는 휘릉이라고 했지만, 대간들이 왕이 왕비의 능호를 그대로 따르는 것은 옳지 않다며, 고칠 것을 청했다. 능호는 결국 ‘정릉’으로 정해졌다.
중종의 무덤은 명종 때인 1562년(명종 17) 8월 아버지 성종의 무덤이 있는 경기도 광주(廣州)로 옮기는 ‘천릉’을 단행했다. 정릉 천릉의 배후에는 아들 명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던 문정왕후(文定王后:1501~1565)가 있었다. 『선조수정실록』을 보면, 정릉 천릉에는 문정왕후와 윤원형, 그리고 봉은사를 키우려는 보우의 의지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명종이 정릉의 천릉을 단행하면서, 중종의 정릉은 서삼릉의 희릉을 떠나 아버지 성종과 어머니 정현왕후의 무덤이 있는 선릉으로 오게 됐다.
문정왕후의 큰 그림은 자신이 죽은 후 남편인 중종의 정릉 곁으로 오는 것이었다. 자신이 심혈을 기울인 사칠 봉은사가 왕릉의 원찰(願刹)로 사후에도 자신을 지켜줄 것도 기대했다. 중종과 장경왕후의 무덤을 떼어 놓는 1차 목표는 성공했지만, 문정왕후는 중종 곁으로 오지는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선릉과 정릉은 지대가 낮아 자주 침수가 되는 지역이어서 무덤을 조성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계속 제기됐기 때문이다. 결국 명종은 어머니의 뜻을 받들지 못하고 문정왕후의 무덤을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孔陵洞) 현재의 위치에 조성했다.
중종의 무덤은 명종 때인 1562년(명종 17) 8월 아버지 성종의 무덤이 있는 경기도 광주(廣州)로 옮기는 ‘천릉’을 단행했다. 정릉 천릉의 배후에는 아들 명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던 문정왕후(文定王后:1501~1565)가 있었다. 『선조수정실록』을 보면, 정릉 천릉에는 문정왕후와 윤원형, 그리고 봉은사를 키우려는 보우의 의지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명종이 정릉의 천릉을 단행하면서, 중종의 정릉은 서삼릉의 희릉을 떠나 아버지 성종과 어머니 정현왕후의 무덤이 있는 선릉으로 오게 됐다.
문정왕후의 큰 그림은 자신이 죽은 후 남편인 중종의 정릉 곁으로 오는 것이었다. 자신이 심혈을 기울인 사칠 봉은사가 왕릉의 원찰(願刹)로 사후에도 자신을 지켜줄 것도 기대했다. 중종과 장경왕후의 무덤을 떼어 놓는 1차 목표는 성공했지만, 문정왕후는 중종 곁으로 오지는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선릉과 정릉은 지대가 낮아 자주 침수가 되는 지역이어서 무덤을 조성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계속 제기됐기 때문이다. 결국 명종은 어머니의 뜻을 받들지 못하고 문정왕후의 무덤을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孔陵洞) 현재의 위치에 조성했다.
문정왕후의 태릉은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에 조성됐다.
1565년 4월 12일 문정왕후의 능호는 정릉을 의식해 신정릉(新靖陵)으로 정했다가, 6월 4일 능호를 태릉(泰陵)으로 다시 정했다. ‘태릉갈비’, ‘태릉선수촌’의 명칭은 태릉에서 유래한 것이다. 태릉 앞 넓은 공간에는 1966년 국가대표들의 훈련 장소인 ‘태릉선수촌’이 들어섰다. 박정희 前 대통령의 지시로, 이곳에 선수촌을 조성한 것이었다.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에서 메달을 따는 것을 국력의 상징으로 생각하던 시절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태릉선수촌은 2017년 충북 진천에 선수촌이 개장하면서 국가대표 선수 관리 기능을 모두 이전했다. 문정왕후의 주도로 현재로 강남 한복판 빌딩 사이에 홀로 있는 중종의 정릉. 중종은 생전에 세 명의 왕비가 있었지만, 사후에 그를 지켜주는 왕비는 한 명도 없고, 아들 명종도 그의 옆에는 없다.
명종의 강릉(康陵)은 사후에도 어머니 곁을 지키고 있다. 명종은 어머니에게 그렇게 시달렸지만, 사후에 아버지 중종이 아닌 문정왕후 무덤 동쪽 곁으로 왔다. 중종의 정릉이 왕릉 자리에 적절하지 않다는 점이 고려됐고, 그 대안으로 선조는 강릉을 태릉 근처에 조성됐다. 산릉을 정할 때 부왕의 무덤 근처에 가는 관례를 깨고 어머니의 곁에 간 특별한 사례이다.
대개 태릉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이곳은 강릉이 오면서, 태강릉(太康陵)으로 불린다. 명종의 무덤 강릉이 조성된 지 8년 만인 1575년(선조 8) 그 옆에는 창경궁 통명전에서 승하한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가 왔다. 명종 옆에 부장(?葬)된 인순왕후 무덤은 명종의 강릉과는 두 개의 무덤이 나란히 붙어 있는 쌍릉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태릉선수촌은 2017년 충북 진천에 선수촌이 개장하면서 국가대표 선수 관리 기능을 모두 이전했다. 문정왕후의 주도로 현재로 강남 한복판 빌딩 사이에 홀로 있는 중종의 정릉. 중종은 생전에 세 명의 왕비가 있었지만, 사후에 그를 지켜주는 왕비는 한 명도 없고, 아들 명종도 그의 옆에는 없다.
명종의 강릉(康陵)은 사후에도 어머니 곁을 지키고 있다. 명종은 어머니에게 그렇게 시달렸지만, 사후에 아버지 중종이 아닌 문정왕후 무덤 동쪽 곁으로 왔다. 중종의 정릉이 왕릉 자리에 적절하지 않다는 점이 고려됐고, 그 대안으로 선조는 강릉을 태릉 근처에 조성됐다. 산릉을 정할 때 부왕의 무덤 근처에 가는 관례를 깨고 어머니의 곁에 간 특별한 사례이다.
대개 태릉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이곳은 강릉이 오면서, 태강릉(太康陵)으로 불린다. 명종의 무덤 강릉이 조성된 지 8년 만인 1575년(선조 8) 그 옆에는 창경궁 통명전에서 승하한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가 왔다. 명종 옆에 부장(?葬)된 인순왕후 무덤은 명종의 강릉과는 두 개의 무덤이 나란히 붙어 있는 쌍릉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명종의 강릉이 조성된 지 8년 만인 1575년(선조 8) 그 옆에는 창경궁 통명전에서 승하한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가 왔다.
지하철 7호선이 통과하는 ‘공릉역’은 능이라는 명칭 때문에 왕릉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공릉동의 명칭은 이 지역의 가장 큰 마을인 공덕리(孔德里)와 이곳에 태릉과 강릉이 있어서 붙여진 명칭인 ‘능골’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만들진 명칭으로, 왕이나 왕비가 묻힌 왕릉은 아닌 것이다.
경종의 의릉과 순조의 인릉
조선후기에 현재의 서울에 조성된 왕릉으로는 경종의 의릉(懿陵)과 순조의 인릉(仁陵)이 있다. 1724년 8월 경종이 창경궁 환취정(環翠亭)에서 승하하자, 영조는 먼저 경종의 원비(元妃)였던 단의왕후(端懿王后) 심씨의 혜릉(惠陵)이 있는 언덕에 능을 쓸 만한 자리가 있는지 살펴봤다. 혜릉은 현재 동구릉 경역 내에 조성돼 있었는데, 영조는 다른 길지를 찾아볼 것을 지시했고, 최종적으로 정해진 곳은 경기도 양주 중랑포 천장산 자락이었다. 6년 후인 1730년 경종의 계비 선의왕후(宣懿王后) 어씨가 승하하면서 경종 앞에 능을 조성했다.경종의 의릉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 언덕 상하에 있는 동원상하릉의 형식이다.
경종의 의릉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 언덕 상하에 있는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의 형식인데, 이것은 경종의 옆자리에 무덤을 조성할 곳이 마땅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동원상하릉의 또 다른 사례로는 경기도 여주의 효종과 인선왕후의 영릉(寧陵)이 있다. 현재 의릉 경내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석관동 캠퍼스가 자리를 잡고 있으며, 옛날 중앙정보부의 강당으로 쓰던 건물에서는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기도 했다.
1834년 11월 순조(純祖:1790~1834, 재위 1800~1834)가 경희궁 회상전(會祥殿)에서 승하하자, 헌종은 즉위 직후 선왕이자 할아버지 순조의 왕릉인 인릉을 조성했다. 처음 인릉은 파주 인조의 장릉(長陵) 근처에 조성됐다. 그러나 순원왕후가 장릉의 언덕이 흙빛이 흡족하지 못하고 뇌석(腦石)이 깨져 상할 염려가 있으니 다른 곳을 정하게 해 기존의 산릉 위치를 옮겨 교하(交河) 장릉 국내(局內)로 옮기도록 했다.
1834년 11월 순조(純祖:1790~1834, 재위 1800~1834)가 경희궁 회상전(會祥殿)에서 승하하자, 헌종은 즉위 직후 선왕이자 할아버지 순조의 왕릉인 인릉을 조성했다. 처음 인릉은 파주 인조의 장릉(長陵) 근처에 조성됐다. 그러나 순원왕후가 장릉의 언덕이 흙빛이 흡족하지 못하고 뇌석(腦石)이 깨져 상할 염려가 있으니 다른 곳을 정하게 해 기존의 산릉 위치를 옮겨 교하(交河) 장릉 국내(局內)로 옮기도록 했다.
헌종은 즉위 직후 선왕이자 할아버지 순조의 왕릉인 인릉을 조성했다.
처음 파주에 있던 순조의 인릉이 현재의 서울로 오게 된 것은 철종 때인 1856년 10월 태종의 헌릉 옆으로 무덤을 옮겼기 때문이다. 인릉을 천릉한 후인 1857년 순조의 왕비 순원왕후가 창덕궁 양심합에서 69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인릉에 합장했다. 태종의 헌릉과 순조의 인릉을 합해 헌인릉이라고 하는데, 현재는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에 소재하고 있다.
정조와 의빈 성씨 사이에서 1782년에 출생한 문효세자는 1786년 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문효세자가 죽고 5개월 뒤인 9월, 의빈 성씨가 사망했다. 정조는 의빈 성씨를 문효세자의 묘소 왼쪽 언덕에 조성하고, 의빈묘(儀賓墓)라 했다. 사후에도 아들과 함께 하기를 바란 의빈의 생전 소망을 정조가 들어준 것이었다.
효창원과 능동
2021년 ‘옷 소매 붉은 끝동’이라는 드라마가 크게 화제를 몰고 온 적이 있다. 정조와 후궁 의빈(宜嬪) 성씨의 사랑 이야기가 주요한 줄거리였는데, 현재의 효창동은 의빈 성씨의 아들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무덤인 효창원(孝昌園)에서 유래한 것이다.정조와 의빈 성씨 사이에서 1782년에 출생한 문효세자는 1786년 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문효세자가 죽고 5개월 뒤인 9월, 의빈 성씨가 사망했다. 정조는 의빈 성씨를 문효세자의 묘소 왼쪽 언덕에 조성하고, 의빈묘(儀賓墓)라 했다. 사후에도 아들과 함께 하기를 바란 의빈의 생전 소망을 정조가 들어준 것이었다.
효창원은 일제강점 시기에 일제에 의해 경기도 고양의 서삼릉으로 이장됐다.
의빈과 세자의 묘소가 있는 이곳에 정조가 자주 거둥했기 때문에, 용산구 효창동에는 ‘거둥고개’가 있다. ‘효창묘’는 고종 때인 1870년(고종 7)에는 ‘효창원’으로 승격됐다. 효창원은 일제강점 시기에 일제에 의해 경기도 고양의 서삼릉으로 이장됐지만 효창동, 효창공원이라는 이름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필자가 소속돼 있는 건국대학교의 지번은 ‘서울시 광진구 능동로 120번지’이다. 이 일대를 능동(陵洞)이라 부르는 것은, 원래 이곳에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의 첫 번째 왕비인 순명황후(純明皇后)의 무덤이 있었기 때문이다.
순명왕후는 여흥 민씨 민태호(閔台鎬)의 딸로, 1882년 2월 11세 때, 2살 연하의 순종의 세자빈이 됐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 이후, 순종이 황태자가 되면서 황태자비로 지위가 올라갔다. 그러나 순종이 고종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는 것을 지켜보지는 못하고, 1904년 33세의 나이로 경운궁에서 사망했다. 3개월간 장례를 치르고, 1905년 1월 3일 발인해 1월 4일 양주 용마산 내동(內洞)에 무덤을 조성했는데, 현재의 어린이대공원 지역이다.
필자가 소속돼 있는 건국대학교의 지번은 ‘서울시 광진구 능동로 120번지’이다. 이 일대를 능동(陵洞)이라 부르는 것은, 원래 이곳에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의 첫 번째 왕비인 순명황후(純明皇后)의 무덤이 있었기 때문이다.
순명왕후는 여흥 민씨 민태호(閔台鎬)의 딸로, 1882년 2월 11세 때, 2살 연하의 순종의 세자빈이 됐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 이후, 순종이 황태자가 되면서 황태자비로 지위가 올라갔다. 그러나 순종이 고종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는 것을 지켜보지는 못하고, 1904년 33세의 나이로 경운궁에서 사망했다. 3개월간 장례를 치르고, 1905년 1월 3일 발인해 1월 4일 양주 용마산 내동(內洞)에 무덤을 조성했는데, 현재의 어린이대공원 지역이다.
현재 어린이대공원 정문을 지나 조금 올라가 좌측으로 가면 유강원이 있던 시절의 무덤 석물들을 볼 수 있다.
무덤의 명칭을 유강원(裕康園)이라 한 것은 순명왕후가 황태자비의 신분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1907년 순종이 황제로 즉위한 후에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라는 시호를 받았고, 능의 이름은 유릉(裕陵)이 됐다. 능동에 있던 순명왕후의 무덤은 1926년 순종 승하 후에 남양주 금곡으로 옮겨져 순종과 함께 합장됐다. 현재 어린이대공원 정문을 지나 조금 올라가 좌측으로 가면 유강원이 있던 시절의 무덤 석물들을 볼 수 있다.
2회에 걸쳐 서울에 있는 조선 왕릉을 소개할 정도로 서울에는 다양한 조선 왕릉들이 조성돼 있다. 그리고 왕릉임을 기억하게 해주는 동네 이름들이 곳곳에 있다. 서울의 왕릉들을 찾아보는 여행에 나서 볼 것을 권한다.
2회에 걸쳐 서울에 있는 조선 왕릉을 소개할 정도로 서울에는 다양한 조선 왕릉들이 조성돼 있다. 그리고 왕릉임을 기억하게 해주는 동네 이름들이 곳곳에 있다. 서울의 왕릉들을 찾아보는 여행에 나서 볼 것을 권한다.
본 콘텐츠는 서울시'내 손안에 서울'에서 게재중인 콘텐츠 입니다. 내 손안의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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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책임자) | 신병주 교수 | 생산일 | 2024-1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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