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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빠져든다! 블랙홀과 국내 최강 신촌 전파망원경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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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교수의 ‘서울 속 숨은 과학 찾기’ (8) 신촌에서 만나는 외계인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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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조차도 그 바깥으로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블랙홀
빛조차도 그 바깥으로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블랙홀

엉뚱하지만 철학적이고 심오하게 파고들 수 있는 이야기에 잠깐 재미 삼아 빠져 보자. "돌아간다"라는 게 과연 무엇일까? 눈앞에서 어떤 사람이 뱅글뱅글 돌고 있다고 해 보자. 그 사람을 보면 복잡하게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돌아간다는 게 뭔지 누구나 알 수 있다. 처음에는 그 사람의 앞 얼굴이 보이다가, 그다음에는 옆 모습이 보이고, 그다음에는 그 사람의 뒤통수가 보이고, 다시 반대쪽 옆 모습이 보이다가 또 앞 얼굴이 보이는 모습이 반복될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이 돌아간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 사람이 멀리 떨어져 있다면 어떨까? 가만히 서 있는지 아니면 돌고 있는지 알아보기 조금 어려울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래도 조금만 유심히 살펴보면 돌고 있는지, 돌지 않는지 헷갈리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사람이 아니라 아주 조그마한 콩알이 돌고 있다면 어떨까? 게다가 콩알 겉면이 어떤 흠집도 없이 완벽하게 매끈하고 아주 동글동글한 모양이라면? 그러면 그 콩알이 뱅글뱅글 제자리에서 돌고 있는지 아니면 돌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인지 구별하기란 꽤 어려울 것이다. 콩알의 크기가 작고 모양이 매끈할수록 도는지 안 도는지 따지기는 더욱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콩알 정도면 도는지 안 도는지 따지는 것이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다. 예를 들어서 얼핏 눈으로 봐서는 구분하기 어렵더라도 손으로 잡아 보면 콩알이 뱅글뱅글 도는 느낌이 나는지 아닌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왕 뜬금없는 문제를 생각하는 김에 아주 멀리 나간 상상을 한번 해 보자. 만약 크기가 작디작아서 생각할 수 있는 한 무한하게 작다고 할 만한 점이 하나 있다고 해보자. 점의 크기가 너무나 극도로 작기 때문에 그 점이 차지하고 있는 부피도 없고, 그 점이 차지할 수 있는 넓이도 없이 그저 그 점이 그 위치에 있다는 것 정도만 말할 수 있는, 극히 작은 점이 있다고 해 보자. 그런 점도 뱅글뱅글 도는 것이 가능할까? 그런 점이 뱅글뱅글 돌아간다, 아니다를 따질 수가 있을까?

의외로 이런 아주 작은 점을 옛 철학자들은 오래전부터 마음속에서 자주 떠올리곤 했다. 고대 그리스 수학의 전통을 이어 온 옛 유럽 철학자들은 크기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아서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상상 속의 점을 생각하면서, 그 점을 기준으로 갖가지 수학 문제를 풀곤 했다. 우리가 초등학교 때부터 수학 시간에 배우는 선, 각도, 길이, 대칭, 꼭지점 등을 따질 만한 점과 관련된 문제들은 원래 이렇게 무한히 작은 점을 생각하면서 옛 철학자들이 생각한 이야기 속에서 생겨난 것이다.

철학자들의 생각 속에 자주 등장했다고 해서 점이 돌거나, 돌지 않거나, 그걸 따질 수 있거나, 따질 수 없거나, 그런 문제가 우리가 사는 진짜 세상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그런 상상 속의 점이란, 그냥 옛 철학자들이 너무 머리가 좋아서 그 머리를 어떻게 쓸지 감당이 안 되어 재미 삼아 떠올려 본 이야기가 아닐까? 다들 먹고 살 걱정 없는 귀족들이라서 그냥 할 일이 없어서 뜬구름 잡는 생각이나 하면서 논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대체 그게 우리의 현실과 무슨 상관인가?
점이 돌거나, 돌지 않거나,
그걸 따질 수 있거나, 따질 수 없거나,
그런 문제가 우리가 사는 진짜 세상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그런데 상관이 생겼다. 그것도 많은 상관이 생겼다. 1970년대 이후 이 문제는 상당히 중요해졌다. 그것도 SF 영화의 한 장면처럼, 은하수에 있는 수많은 별들의 운명이 걸려 있을 만큼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과학자들은 20세기 초반부터 우주에 블랙홀이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블랙홀은 굉장히 강력한 중력으로 모든 것을 끌어당겨서 우주에서 가장 빠르다는 빛조차도 그 바깥으로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물체를 말한다. 이런 물체가 한번 생겨나면 그 바깥으로 아무것도 나올 수가 없기 때문에, 결국 모든 물체가 중심으로 몰리며 움츠러들게 되고, 그렇게 움츠러든 상태에서도 바깥으로 조금도 나올 수가 없기 때문에 결국 중심점 한 가운데로 물체 전부가 모두 오그라들어 버린다.

다시 말해, 이론상 블랙홀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점, 중심점 한 곳에 블랙홀을 이루고 있는 모든 덩어리가 다 뭉쳐 있는 물체다. 혹시 지구보다 달은 중력이 약하기 때문에 달에 가면 몸무게가 6분의 1로 줄어든 것처럼 느껴진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반대로 블랙홀은 중력이 강하기 때문에 블랙홀의 중심점에 가면 엄청나게 몸무게가 늘어난 느낌을 받게 된다. 이론상으로는 무한히 큰 몸무게를 느끼게 된다.

한동안 상당수의 과학자들은 블랙홀 같은 그런 이상한 물체에 대해, 상상을 해 볼 수야 있겠지만 실제로 그런 것이 세상에 있을 리는 없다고들 생각했다. 무한히 큰 무게라니 그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렇지만 1960년대에 ‘백조자리 X-1’이라는 물체가 우주 저편 먼 곳에서 발견되었고, 1970년대가 지나가면서 그 물체가 실제 블랙홀일 거라는 주장이 나오는 바람에 블랙홀은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오게 되었다.

지금은 백조자리 X-1이 블랙홀이라는 사실이 정설일 뿐만 아니라, 우주에 아주 많은 블랙홀이 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게다가 많은 별들이 모여 있는 은하에는 그 중심부에 대체로 아주 커다란 블랙홀이 하나씩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우리 지구가 포함되어 있는 은하수의 중심부에도 지구 무게의 몇 조 배 정도 되는 아주 무거운 블랙홀이 있다. 그리고 이 블랙홀의 힘을 받으면서 긴 세월 은하수는 꿈틀거리면서 움직여 왔고 수많은 별들이 그 영향을 받았다.

블랙홀을 그저 공상의 소재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알고 보면, 하늘의 수많은 별들과 태양이 생겨나고, 지금의 위치에 자리 잡고, 앞으로 어떻게 변화해 가는가 하는 문제에서 무척 큰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은하수의 중심에 있는 블랙홀이다. 블랙홀은 우리가 사는 공간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 준 중요한 물체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과연 은하 곳곳을 뒤흔들어 온 블랙홀은 돌고 있을까? 아니면 돌지 않고 있을까? 과학자들은 블랙홀이 뱅글뱅글 돌고 있다고 치고 그런 블랙홀이 만들어 낼 수 있을 만한 여러 가지 현상을 계산해 본 적이 있었다. 그 결과 블랙홀이 돌고 있다면 주위에 여러 가지 특이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재미난 형태로 변화해 갈 수 있다는 추측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 실제로도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정말로 블랙홀이, 무한히 작은 점이, 뱅글뱅글 도는 현상이 벌어질 수가 있을까?
세종시 우주측지관측센터의 전파망원경
세종시 우주측지관측센터의 전파망원경

멀리 떨어져 있는 블랙홀에 대해 알아보려면, 블랙홀의 주변 지역까지 관찰해 볼 수 있는 아주 성능이 뛰어난 장비가 필요하다. 그런 고성능 장비를 잘 활용해 멀리 블랙홀이 있는 곳을 잘 살펴본다면 블랙홀이 도는지 안 도는지에 대해서도 무엇인가 알아낼 수 있는 사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정도 성능의 장비를 사용하기 위해 우리는 서울 서대문구의 신촌에 가야 한다.

신촌의 대학 구내에는 도심 지역인데도 약간의 숲이 남아 있는 곳이 있다. 그 숲 사이에 KVN(Korea Very long baseline interferometry Network)이라는 시설의 일부로 취급되는 커다란 전파망원경이 자리잡고 있다.

전파망원경이라고 하면 특이한 장비 같이 들릴 수 있는데, 막상 하는 일은 일반 망원경과 같다. 전파도 사실 빛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그저 전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색깔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빛이라고 쉽게 느끼지 못하는 것뿐이다. 자외선도 빛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전파망원경은 망원경은 망원경인데 맨눈으로는 잘 안 보이는 색깔의 특수한 별빛을 감지하는 장치라고 보면 된다.

신촌에 있는 전파망원경은 커다란 위성 안테나처럼 둥그렇게 생겼다. 크기도 큼직하기 때문에 그 지름만 21미터다. 지름이 21미터면 그 커다란 접시 모양의 넓이가 거의 테니스 코트와 맞먹는다는 뜻이다. 이 전파망원경은 한동안 한국에서 가장 큰 전파망원경이었다.

지금은 세종시에 더 큰 관찰용 안테나가 있기는 한데, KVN은 본래 신촌에 있는 전파망원경 이외에도 울산과 제주에 있는 같은 크기의 전파망원경을 동시에 연결해서 더 세밀하게 전파를 살펴볼 수 있는 시설이기 때문에 그 모든 장치를 합한 성능은 지금도 국내 최강 수준이다. 이 정도면 세계적인 연구를 하는 데에 도전해 볼 만하다.

작년 9월, M87 블랙홀이라고 하는 지구에서 대략 110경 km 정도 떨어진 머나먼 블랙홀을 꾸준히 관찰한 23년간의 자료를 세계 45개 기관이 참여하여 모두 분석한 논문이 하나 발표되었다. 그리고 그 연구에 신촌의 전파망원경을 사용한 KVN도 참여했다.

논문의 결과에 따르면, M87 블랙홀 주변에서 길게 뻗쳐 나오는 꼬리 같이 생긴 모양이 비틀거리듯이 빙빙 도는 움직임을 보였다고 한다. 이 꼬리 모양을 흔히 블랙홀의 제트라고 하는데, 이러한 결과를 과학자들은 "블랙홀 제트의 세차 운동을 관찰했다"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의 모양은 예전에 블랙홀이 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계산했던 것과 비슷했다. 한 점일 뿐인 블랙홀이 생각대로 돌고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다.

옛날, 갈릴레오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말했다는 전설이 널리 퍼져 있는데, 신촌의 전파망원경은 21세기에 "블랙홀도 돈다"라고 말하는 데 참여한 셈이다.
신촌의 전파망원경은 그 지름만 21미터다.
이 전파망원경은 한동안 한국에서 가장 큰 전파망원경이었다.

최근 KVN은 서울, 울산, 제주의 설비에 더해서 평창에다가 전파망원경을 하나 추가로 또 건설해서 성능을 더 높이고 있는 중이다. 이 작업이 완료되면, 우리는 우주 먼 곳의 모습과 우주 곳곳에 퍼져 있는 전파를 더욱 자세히 포착할 수 있는 기술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니 혹시라도 만약 외계인이 지구에 전파를 보내 통신을 걸어 온다고 상상해 보면, 그 사실을 한국에서 가장 먼저 잡아낼 수 있을 만한 장비가 있는 곳도 바로 신촌이다. 나는 금요일 저녁 신촌 거리를 걷다 보면 꼭 외계인 같은 사람을 자주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어울리는 것 같아 피식 웃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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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빠져든다! 블랙홀과 국내 최강 신촌 전파망원경 이야기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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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책임자) 곽재식 교수 생산일 2024-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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