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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밀정'의 쌍권총 명사수는? 총과 폭탄을 든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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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됐던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됐던 서대문형무소, 현재는 역사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이야기(66)독립운동가 강우규·나석주·김상옥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 중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나라가 바로 우리 대한민국이다. 1919년의 3.1 운동은 거족적인 민족운동으로서 세계적으로도 독립운동의 역사에 남아 있다. 3.1 운동 이후 서울에서는 총과 폭탄을 이용하여 일제의 주요 거점 폭파나 요인 사살을 시도한 독립운동가들이 나타났다. 강우규, 나석주, 김상옥 등이 활동한 현장으로 들어가 본다.
강우규 의사는 총독 암살을 위해 남대문역(현재의 서울역)에서 폭탄을 던졌다.
강우규 의사는 총독 암살을 위해 남대문역(현재의 서울역)에서 폭탄을 던졌다.

강우규 의사의 서울역 폭탄 투척

강우규(姜宇奎:1855~1920) 의사는 3.1운동에 깊은 영향을 받고, 일본 총독 사이토 마사코의 암살을 시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855년 7월 14일 평안남도 덕천군 무릉면에서 태어났으며, 30세 때 함경남도 홍원(洪原)으로 이사하였다. 한의술을 배워 환자를 치료하는 한편, 개신교에 입교하여 장로가 되었다. 학교를 설립하여 청년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는 등 개화기 계몽운동에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1910년 일제 강점 시기가 시작되자,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건너가 지린성 라오허현(饒河縣)에 정착하여 신흥촌(新興村)을 건설하고 광동중학을 세워 교육사업에 주력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박은식(朴殷植), 김치보(金致寶) 등과 함께 조국에 돌아가 거사할 것을 자원하여, 영국제 폭탄을 가지고 서울에 잠입하였다.

목표는 3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齊藤實:1858~1936)의 암살이었다. 사이토는 해군 대장 출신으로, 3.1 운동으로 일본 내각이 총사퇴한 후 8월 12일 총독에 임명되었다. 총독의 암살을 노린 강우규는 매일 남대문역(현재의 서울역)을 답사하며, 상황을 점검하였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강우규 의사의 묘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강우규 의사의 묘

사이토가 9월 2일 남대문역 도착을 파악한 강우규는 사이토가 열차에서 내려 남대문역 광장으로 가기 위해 마차에 오르는 순간을 노렸다. 마차에서 10여 미터 떨어진 근접한 거리에서 폭탄을 던졌지만 사이토의 암살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총독 옆에 있던 무라다 육군소장, 혼마치 경찰서장 등에게 중경상을 입히면서, 큰 타격을 주었다.

폭탄 투척 후 피신하던 중 친일 경찰 김태석 경부(警部)에게 체포되어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하였다. 강우규의 의거는 66세의 고령의 나이로 단행했다는 점에서도 크게 주목된다. 1962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서대문형무소사형장 입구. 이곳에서 독립운동가 강우규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서대문형무소사형장 입구. 이곳에서 독립운동가 강우규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나석주 의사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6번 출구로 나와 하나은행 앞쪽으로 오면 ‘나석주 열사상’이라는 글이 새겨진 동상을 만날 수 있다.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나석주(羅錫疇,:1892~1926) 열사를 기억하고 있는 곳이다.
구 동양척식회사 터, 하나금융그룹 명동사옥 앞에 있는 나석주 의거지 표석
구 동양척식회사 터, 하나금융그룹 명동사옥 앞에 있는 나석주 의거지 표석

나석주는 1892년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 진초리에서 출생하였다. 명신학교(明新學校)에서 2년간 수학하고, 23세 때 중국 길림성 북간도로 망명하여, 4년간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귀국하였다. 3·1운동 후에는 군사자금을 모금하여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냈으며, 임시정부 경무국(警務局) 경호원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하남성 한단(邯鄲) 군관학교 졸업한 후 중국군 장교로 복무하다가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의열단원으로 중국에서 항일 투쟁을 전개하던 나석주는 유림계의 대표이자 민족 지도자 김창숙(金昌淑)의 권유를 받고, 1926년 국내로 잠입하였다. 조선의 농민을 착취하는 일제의 대표 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조선은행,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파괴가 목표였다.

인천을 경유하여 서울로 들어온 나석주는 12월 28일 남대문통에 있는 식산은행에 폭탄 1개를 투척하였다. 식산은행은 1918년 10월 대한제국 말기에 설립된 한성농공은행 등 농공은행 6개를 합병해 설립되었으며 일본 제국의 식민지 경제 지배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와 함께 중요한 축이 되었던 기관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50년 2월에 상호가 한국식산은행으로 변경됐으며, 1954년 4월엔 새로 설립된 한국산업은행 등으로 모든 업무를 이관하였다.

식산은행에 던진 폭탄이 불발된 후, 나석주는 목표를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 쪽으로 이동하였다. 동척은 1908년 농업 경영과 이민 사업 등 식민지 경영을 목적으로 한국과 일본 양국의 공동 출자로 설립된 국책회사였다. 동척 경성지사 건물은 현재의 을지로 입구 근처에 세워졌는데, 6.25 전쟁 이후에는 내무부 청사로 사용하였다. 1970년 외환은행에서 구입 후 1981년 본점을 신축하였다. 현재 을지로2가 하나은행 본점 건물 앞에 나석주 열사상이 있는 것은 이곳이 동척 자리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나석주는 먼저 동척 수위실을 기습하여 일본인을 사살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토지개량부로 들어가 일본인 차장과 과장을 쏜 후 준비한 폭탄을 투척하였지만 불발되었다. 동척을 빠져 나와 또 다른 목표였던 조선철도주식회사 공격에 나섰지만, 바로 일경의 추격을 받게 되었다.

전찻길을 계속 달렸으나, 수십 명의 일본 경찰의 추격이 나섰고 결국 자신의 가슴에 권총 3발을 쏘고 쓰러졌다. 일경이 병원으로 이송한 후 이름을 묻자, 성명과 의열단원임을 밝힌 후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하했던 김상옥 열사의 상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하했던 김상옥 열사의 상
나의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 만납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김상옥 의사

종로경찰서를 폭파한 쌍권총 김상옥 의사

2016년 상영한 영화 ‘밀정’의 첫 부분에서는 김상옥(金相玉:1889~1923)을 모티브로 한 인물이 총격전 끝에 자신의 머리에 권총을 겨누는 장면이 나온다.

쌍권총을 사용하면서 최후까지 일제에 저항했던 독립운동가 김상옥은 1889년 서울에서 구한 말 군관을 지낸 아버지 김귀현(金貴鉉)과 어머니 김점순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생지는 한성부 동부 건덕방 어의동계로, 현재의 종로구 효제동이다.

김상옥은 부친이 일찍 사망한 후 한학을 수학하였고, 어의동(於義洞:효종이 왕이 되기 전에 살았던 잠저)에 소재한 보통학교(효제초등학교의 전신)를 다녔다. 14세부터 낮에는 철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 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선교사들에게 영향을 받아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1910년 경성 영어학교를 다녔으며, 1912년 창신동에서 ‘영덕철물상회’를 운영하였다. 1917년 물산장려운동과 일화(日貨) 배척 운동을 전개하였고, 1919년 4월 동대문교회의 영국인 피어슨 여사 집에서 ‘혁신단’이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일본 고관 및 친일 반역자에 대한 응징에 나섰다. 1920년 5월부터는 총독 사이토 마코토 암살을 준비해 나갔지만, 일본 경찰의 대응이 심해지자 1920년 10월 상하이로 갔다. 11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이시영, 조소앙, 신익희 등과 독립운동을 적극 계획하였고, 의열단(義烈團)에도 입단하였다.

1922년 국내로 잠입한 김상옥은 1923년 1월 12일 밤 8시 10분 종로경찰서의 폭탄 투척을 시도하였다. 종로경찰서는 일제가 독립운동가를 탄압하는 대표 기관이었기 때문이었다. 폭탄 투척으로 건물의 일부가 파손되고, 친일 신문 매일신보사 직원 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무엇보다 경찰서가 파괴된 사실에 일제의 자존심에는 큰 상처가 생겼다. 당시 종로경찰서는 종로 2가 YMCA 건물 옆에 있었는데, 현재 종각역 8번 출구 앞에는 ‘김상옥 의거터’라는 표지석이 있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김상옥 의사의 묘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김상옥 의사의 묘

일본 경찰은 김상옥의 추적에 나섰다. 1월 17일 새벽 은신처인 매부 고봉근의 집이 탐지되었고, 종로경찰서는 우메다와 이마세 경부의 지휘 아래 수백명이 무장 경찰이 은신처를 포위하였다. 김상옥은 두 손에 권총을 들고 치열한 총격전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형사부장 다무라를 사살하고, 이마세와 우메다 경부에게 중상을 입혔다.

김상옥은 포위망을 뚫고 피신처 가옥의 옥상과 인근 가옥을 뛰어넘으며 남산 쪽으로 도피하였다. 일경은 군대까지 불러 남산을 포위하였고, 김상옥은 눈 덮인 남산을 거쳐 금호동 안정사(安靜寺)의 스님에게 승복과 짚신을 빌려 산을 내려와 1월 19일 새벽 효제동 이혜수의 집에 은신했다. 신출귀몰한 도피를 이어갔지만, 이곳마저 일경에게 탐지되었다.

1월 22일 새벽 시내 4곳의 경찰서에 총비상령이 내려졌고, 기마대와 무장 경관 400여 명이 동원되어 효제동 일대를 완전포위하였다. 경찰이 지붕을 타고 집 안으로 들어오자, 벽장 안에서 구리다 경부를 총으로 쏜 후 벽장과 붙어 있던 집 벽을 뚫고 옆집으로 피신하였다. 담벼락을 지탱해 권총 2자루로 3시간 반 동안 총격전을 벌였고, 마지막 남은 1발은 자신의 머리를 겨누고 순국하였다. 순국 현장은 현재의 대학로 36-4번지 일대였다.

김상옥이 다녔던 효제초등학교에는 “나의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 만납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라고 말한 김상옥의 어록 비문이 우리에게 지금도 큰 울림을 준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는 김상옥 의사의 동상을 만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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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책임자) 신병주 교수 생산일 2024-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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