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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칸 고택, 영화 '암살' 촬영지…흥미로운 북촌 한옥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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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서울에서 한옥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북촌 답사는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서울에서 한옥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북촌 답사는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65) 북촌 대표 한옥의 역사와 인물

서울에서 한옥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가회동, 재동, 계동 일대의 북촌 답사는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조선시대에도 북촌은 고위 관리나 양반들이 대거 거주했던 한옥 지역이었지만, 현재 남아 있는 한옥 대부분은 1930년대에 정세권(鄭世權:1888~1965)이 이곳에 집중적으로 조성한 한옥들이다. 북촌에서 역사와 전통의 품격을 유지하고 있는 한옥들, 그리고 이들 한옥과 관련이 있는 인물들을 소개해 본다.

대통령 윤보선과 윤보선 가옥

조선후기 양반가의 한옥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대표적 가옥은 북촌 안국동에 있는 해평(海平) 윤씨 윤보선(尹潽善:1897~1990) 전 대통령 가옥이다. 안동장(安洞莊) 또는 안국동 사저로도 부른다. 윤보선 가옥은 조선후기 사대부가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가옥인데, 1870년대 여흥 민씨가에서 지은 것으로 보고 있다. 항간에서 ‘민대감집’이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99칸 집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규모가 컸는데, 대지가 1,400여 평, 건평은 250평 정도가 된다. 헌법재판소 자리에 자리를 잡았던 박규수(朴珪壽)의 집터와 담장을 마주하고 있다. 민씨가에 이어서는 갑오경장 이후 일본에서 돌아온 박영효(朴永曉)에게 고종이 이 집을 하사했으며, 이후 윤보선의 아버지인 윤치소(尹致昭:1871~1944)가 이 집을 구입했다.

윤보선은 1897년 충청남도 천안군 모산면 새말에서 태어난 후 초등학교 무렵 서울에 올라와 이곳에서 살았다. 일본 유학 후인 1919년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하던 시기에 주로 거처했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윤보선 가옥은 99칸 집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규모가 컸다.
윤보선 가옥은 99칸 집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규모가 컸다.

서쪽에 위치한 솟을대문간을 들어서면 나오는 행랑 마당 동남쪽에 사랑채, 서북쪽에 안사랑채, 안채, 별당채가 자리를 잡고 있다. 중앙에 대문가 함께 옆으로 출입할 수 있는 협문이 있다. 안채 뒤에 있는 후원과 안채와 산정채 사이에 연못 정원은 가옥의 품격을 보이고 있다.

윤보선은 1960년 4.19혁명 후 대한민국 4대 대통령이 되었지만,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1년여 만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사망할 때까지 윤보선은 이곳에서 살았다. 박정희 집권 시기 윤보선은 야당을 대표하는 정치인이었기에 이 가옥은 야당 정치인의 주요 회합 장소가 되었다. 1975년 산정채 앞에서 윤보선, 김영삼, 김대중이 함께 찍은 사진은 이 가옥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명문당 건물은 윤보선과 야당 정치인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한 망루로 활용됐다.
명문당 건물은 윤보선과 야당 정치인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한 망루로 활용됐다.

윤보선 가옥과 정치와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물은 서쪽 정문 바로 앞에 자리 잡은 출판사 ‘명문당(明文堂)’이다. 1926년 ‘영산방’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여 명문당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니, 100년 전통을 가진 출판사이다. 주로 동양 고전이나, 한자 사전, 그리고 만세력, 토정비결과 같은 책을 다수 출간하였다.

필자도 대학 시절부터 명문당에서 출간한 논어, 맹자 등의 서적을 통해 한문 공부를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명문당의 건물 외관은 무언가 어색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매우 불규칙적으로 건물이 올라간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명문당 건물은 윤보선과 야당 정치인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한 종로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의 망루로 활용이 되었다. 1967년 4층에 망루가 설치되었고, 윤보선 측에서는 큰 나무를 심어 이를 피하려 했다. 나무가 장애가 되자 다시 감시 측에서는 건물을 높여 갔고, 이 과정에서 기형적인 모습의 건물이 탄생한 것이다.
가옥 앞에 또 하나 주목되는 건물은 안동(安洞) 교회이다.
가옥 앞에 또 하나 주목되는 건물은 안동(安洞) 교회이다.

가옥 앞에 또 하나 주목되는 건물은 안동(安洞) 교회이다. 윤보선은 부친과 함께 1909년에 설립된 집 앞 1분 거리에 있는 이 교회를 다녔다고 한다. 당시에는 승동 교회, 연동 교회, 정동 교회 등 미국인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들이 있었다. 그런데 안국동임에도 ‘안동’이라 지칭한 것에서 보이듯 지명을 줄여서 부르는 것이 유행했는데, 장의동(壯義洞)에 기반을 둔 안동 김씨를 ‘장동’ 김씨라 부른 것도 비슷한 사례이다.

1978년 8월 18일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27호 안국동 공덕귀가(安國洞 孔德貴家)로 지정되었다가, 2000년 4월 10일 명칭이 안국동 윤보선 가옥으로 변경되었고, 2002년 1월 29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438호로 승격되었다.
백인제가옥 사랑채
백인제가옥 사랑채

의사 백인제와 백인제 가옥

윤보선 가옥과 더불어 북촌의 품격을 높여주는 대표 한옥이 백인제(白麟濟:1898~?) 가옥이다. 이집을 지은 사람은 한상룡(韓相龍:1880~?)으로 알려져 있는데, 한상룡은 이완용의 외조카로, 한성은행 전무 등을 지내면서 친일 활동을 한 인물이다.

1913년 인근 한옥 12채를 매입하여 이 가옥을 지었다. 1935년 개성 출신 사업가 최선익(崔善益)이 이 가옥을 매입하였으며, 백인제는 1944년에 이 가옥을 매입하였다. 백인제는 평안북도 정주군 출신으로, 백희행과 청주 한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는 용제(龍濟), 봉제(鳳濟), 아래로는 붕제(鵬濟)가 있었는데, 형제들 이름에 용, 봉황 등 전설 속의 상서로운 동물들을 쓴 것이 흥미롭다.

백붕제의 아들로는 영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백낙청(白樂淸) 서울대 명예교수가 있다. 백인제는 1912년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 3월에 졸업했는데, 재학 4년 동안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1916년 관립 의학교육 기관인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 후에도 3년 간 수석을 했다. 경성의학 전문학교 교수로 있다가, 1941년 서울 명동에 백인제 외과병원을 개원하였다. 1946년 사재를 털어 ‘재단법인 백병원’을 탄생시켰으나, 1950년 6.25 전쟁 기간 중 납북되었다. 이후 백인제의 뜻을 계승한 서울 백병원과 부산 백병원 등이 설립되었는데, 명동에 자리를 잡았던 서울 백병원은 2023년 8월 82년의 역사를 마감하고 폐원하였다.
나무로 둘러싸인 백인제 가옥
나무로 둘러싸인 백인제 가옥

백인제 가옥은 북촌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은 언덕에 위치하여 좋은 전망을 갖추고 있다. 사랑채를 중심으로 넓은 안채와 정원이 자리를 잡았고, 가장 높은 곳에는 아담한 별당채가 들어서 있다. 대청을 비롯한 목재 대부분은 압록강 흑송을 사용하였는데, 복원 과정에서는 홍송을 이용했다고 한다. 일본식 복도와 다다미방, 붉은 벽돌과 유리창을 많이 사용한 특징을 보인다. 별당채 담장을 넘으면 정독도서관(옛 경기고)인데, 백인제의 아들들이 담장을 넘어 경기고를 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출처: 최준식, 서북촌이야기(하), 쥬류성, 2019)

붉은 벽돌 담장으로 사랑채 공간과 대문을 분리한 것이나, 사랑채의 일부가 2층으로 건축된 것 등은 전통 한옥과 차이가 있는 부분이다. 한옥에 일본식과 서양식을 절충한 근대 가옥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2015년의 영화 ‘암살’의 촬영장소로 활용되었다. 정문은 솟을대문을 하고, 계단을 설치한 것을 볼 수 있는데, 계단은 1930년대에 최선익이 만든 것이라 한다. 백인제가 납북된 후 이곳에는 부인 최경진 여사와 가족들이 거주하였으며, 1977년 3월 서울시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2009년 서울시로 매각되었으며, 2015년 11월 18일 역사가옥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직접 관람을 할 수 있고, 해설사의 설명도 들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배렴가옥은 현재 문화예술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배렴가옥은 현재 문화예술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배렴 가옥과 고희동 가옥

이외에도 북촌에서는 근현대사의 주요 인물이 거주했던 한옥을 찾아볼 수 있다. 1930년대에 지은 배렴(裵濂:1911~1968) 가옥은 ‘ㅁ’ 자형의 한옥으로, 실경산수화로 유명한 화가 배렴이 1959년 이후 10년 정도 살았던 곳이다. 중앙고등학교로 올라가는 계동길 왼쪽에 위치하고 있다. 배렴은 경북 김천 출신으로, 1928년 서울에 와서 이상범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다. 실력을 인정받아 1964년에는 50대 중반의 나이로 홍익대 미대 교수가 되었다. 2016년까지 북촌 게스트하우스로 활용이 되었으며, 현재는 문화예술공간으로 시민들에게 개방되어 있다. 필자도 이곳을 몇 번 찾아가 보았는데, 직접 방안을 둘러보면서 한옥의 향기와 함께 배렴 선생을 기억할 수가 있어서 좋았다.
창덕궁 옆 원서동에는 근대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 살았던 가옥이 있다. 현재 미술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창덕궁 옆 원서동에는 근대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 살았던 가옥이 있다. 현재 미술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마당에는 고희동 화백의 동상이 설치되어 있다.
마당에는 고희동 화백의 동상이 설치되어 있다.

북촌의 가장 동쪽 창덕궁 옆 원서동(苑西洞:창덕궁 후원의 서쪽 동네)에는 근대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高羲東:1886~1965)이 살았던 가옥이 있다. 고희동은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서양화를 공부하였다. 1918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 후 목조 기와집인 이 가옥을 직접 설계하였으며, 1959년까지 이곳에 거주하였다. 2002년 철거될 위기에 처했지만 시민 단체와 북촌 주민들의 노력으로 2004년 등록문화재 84호로 등록되었다. 2008년 종로구에서 매입하여 북원, 보수 공사를 거쳤으며, 2012년에 개방되었다. 2017년에는 ‘종로구립 고희동 미술자료관’으로 등록하여 서울시 종로구에서 관리를 하고 있다.

안채에 전시실 2개가 있고, 옛날 부엌 자리는 사무실로, 사랑채에는 화실과 사랑방이 재현되어 있다. 선생의 생전 작품 활동 모습과 작품들을 만날 수가 있다. 마당 왼쪽에는 2015년 선생의 서거 5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고희동 흉상이 있다. 북촌의 한옥 탐방을 통하여 한옥의 고상하고 우아한 멋과 함께, 이곳에서 살았던 역사 속 인물들의 삶의 체취를 직접 느껴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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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책임자) 신병주 교수 생산일 2024-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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