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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공원에서 효창독립 100년의 기억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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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공원을 찾은 것은 어느 늦가을 무렵이었다. 마침 효창공원에 안장된 독립운동가 및 국내로 돌아오지 못한 잃어버린 영웅들의 삶을 주제로 한 스토리텔링 미션투어, ‘100년의 기억을 찾다’를 진행하던 때였다. 미션투어는 11월 5일부터 12월 12일까지 많은 시민들의 관심 속에서 펼쳐졌다. 효창독립 100년의 길을 독립운동가의 정신과 혼을 쫓으며 더듬더듬 걸어보았다.
조선왕실의 묘원이 있는 효청공원의 정문 창열문이 보인다.
조선왕실의 묘원이 있는 효청공원의 정문 창열문이 보인다. ⓒ방주희

서울 효창공원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애국지사들의 유해를 모신 곳이다. 조선 후기 정조의 맏아들로 세자 책봉까지 받았으나 1786년 다섯 살의 나이로 서거한 문효세자를 비롯하여 왕족들의 무덤인 효창원이 있던 자리이다.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불법으로 주둔하면서 훼손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골프장이 들어서는 등 공원화되었다. 1940년에 조선총독부가 공원으로 고시한 이후, 1944년에는 일제의 침략전쟁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위해 충령탑 설립을 명목으로 조선조 왕실 무덤을 고양 서삼릉으로 이장하면서 효창공원으로 변경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인 백범 김구 선생의 깊은 뜻으로 독립선열의 숭고한 정신이 깃든 공간으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어 오늘날의 효창공원에 이르고 있다. 한가로운 오후 효창공원을 찾은 이들이 공원에 활기를 불어 넣어주었다. 창열문에 들어서 오른쪽 산책로로 발걸음을 옮기며 향한 곳은 ‘임정 요인 묘’였다.
효창원의 기원인 효창공원 안내문을 꼼꼼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효창원의 기원인 효창공원 안내문을 꼼꼼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방주희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으로 활약한 임정 주석 이동녕, 근무 부장 조성환, 비서장 차리석 선생의 묘역이다. 국화 한 송이를 헌화하며 묵념을 하였다. 석오 이동녕 선생은 임시정부 의정원 초대 의장과 주석을 맡으며 임정을 이끌었고 백범 김구 선생과 광복을 위해 싸웠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역임했던 청사 조성환 선생은 생애의 대부분을 독립군의 조직과 통합에 힘쓰며 임시정부가 군사업무와 전시 체제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독립군과 함께 광복군의 결성에도 기여했으며 이를 통해 임시 정부가 자체적으로 싸울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됐다. 국무위원 겸 비서장을 지냈던 동암 차리석 선생은 1930년대 임시 정부의 최대 위기 상황에서 임정을 꿋꿋이 지킨 사람이다. 백범 김구 선생을 보좌하면서 40여 년간 임정의 역사를 지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임정요인의 묘 앞에서 국화 한 송이를 받치며 헌화하고 있다
임정요인의 묘 앞에서 국화 한 송이를 받치며 헌화하고 있다 ⓒ방주희

이들의 숨은 노력과 희생이 있었기에 100년 후인 지금의 대한민국이 이 땅 위에 굳건하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니 원효대사의 동상이 있는 놀이터가 나왔다. 독립운동가 묘역이 있는 효창공원에 원효대사 동상이 있는 것이 놀라웠다. 1969년 ‘애국선열동상건립위원회’ 활동으로 원효대사상이 효창공원에 유입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효대사 도입 배경은 이곳 효창공원 근처를 일제강점기에 ‘원정’이라 하고, ‘효창원’의 한자씩을 조합해서 ‘원’ ‘효’ 했으며, 원효대사와 아무 상관 없이 각 권력주체에 의해 세워졌다.
고즈넉한 계절이 놀이터에 내려앉았다
고즈넉한 계절이 놀이터에 내려앉았다 ⓒ방주희
원효대사의 동상 앞에 한 어르신이 손을 맞잡고 서 있다
원효대사의 동상 앞에 한 어르신이 손을 맞잡고 서 있다 ⓒ방주희

원효대사 동상을 지나자 세 갈래 길이 나왔다. 효창공원에서 약속을 했다면 처음 찾는 이에겐 길을 찾는데 좀 헤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숲이 드리워진 요새 같기도 한 갈래 길을 지나치며 100년 전 이 길을 걸었을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와 그 생생함이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분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내가 여기 이렇게 서 있을 수 없었을 텐데, 그분들에 대해 그동안 모르고 잊고 있었던 역사가 얼마나 많았을지를 생각하니 아련해졌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어떻게 제 한 몸 불사를 수 있었을까를 떠올리니 현재가 더욱 감사하게 느껴졌다.
세 갈래 길에 자리한 숲길 하트 벤치에 앉아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세 갈래 길에 자리한 숲길 하트 벤치에 앉아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방주희

저 아래 샘터(우물터)가 펼쳐졌다. 도심 한복판에서 만나는 샘터라니 신기하다. 샘터 일대에 수림이 울창하던 당시 물이 맑아 인근 주민들이 공동 우물로 사용하였다. 심한 갈수기에도 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은 산맥이 끊어지고 공원 주변에 아스팔트 포장과 건물이 들어서는 등으로 출수량이 적어지고 식수로는 사용이 불가능하다. 항상 일정량의 물이 솟아 올라 용산구에서는 이 샘을 복원하여 다양한 소생물이 서식할 수 있는 환경친화적인 생태연못을 조성하게 된 것이다.
샘을 복원하여 다양한 소생물이 서식할 수 있는 생태연못을 조성하였다
샘을 복원하여 다양한 소생물이 서식할 수 있는 생태연못을 조성하였다 ⓒ방주희

갈래갈래 길을 지나 바깥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100년의 기억을 찾다’ 리본의 색이 처음 주황색에서 보라색으로 이어지더니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길이 바뀌었음을 의미했다. 아치형 기둥에서 여섯 분의 독립선열 인물 사진을 만날 수 있었다. 역사책에서 본 반가운 얼굴이지만 좀 더 깊이 기억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QR코드를 통해 그분들의 확고한 의지를 음성으로 들을 수 있었다.
‘100년의 기억을 찾다’ 리본 색이 주황에서 보라색으로 이어지더니 파란색으로 바뀌며 길목을 표시하고 있다
‘100년의 기억을 찾다’ 리본 색이 주황에서 보라색으로 이어지더니 파란색으로 바뀌며 길목을 표시하고 있다 ⓒ방주희

‘해방된 조국 땅 어디라도 좋으니 묻어주고, 무궁화 꽃 한 송이를 무덤 위에 놓아주기 바라오.’ 백정기

‘태극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윤봉길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꿈꾸며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하는 목적으로 상하이에 왔습니다.’ 이봉창

‘단결은 약자의 무기라는 말은 자명의 진리인 것이다.’ 조성환

‘국토를 수복하되 일부분이 아니오. 주권을 회복하되 조건부가 아니라 전부 또는 무조건 회수하는 것이 즉 완전광복이다.’ 차리석

‘우리나라가 완연한 자유를 누리며 굳건한 독립을 되찾는 데는 하나는 내 동지의 단결이요, 둘은 우리 동포들의 단결이며, 셋은 모든 대한민국의 대동단결함에 있다.’ 이동녕
좌측으로 삼의사 세 분과 백정기·윤봉길·이봉창 의사의 인물 사진과 마주하였다
좌측으로 삼의사 세 분과 백정기·윤봉길·이봉창 의사의 인물 사진과 마주하였다 ⓒ방주희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과 대한독립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안중근 의사의 인물 사진이 광복의 뜨거움으로 펄럭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과 대한독립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안중근 의사의 인물 사진이 광복의 뜨거움으로 펄럭인다. ⓒ방주희

다음번 아치에서는 백범 김구 선생과 안중근 의사를 만났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김구

‘대한독립의 함성이 천국까지 들려오면 나는 기꺼이 춤을 추면서 만세를 부를 것이오.’ 안중근

모두 효창공원에 잠들어 계시는데도 다가와 어깨를 두드려주실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과거와 현재를 마주하며 오히려 그분들로 인해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이 땅을 지키려 했던 수 많은 무명들의 염원과 정신이 스며든 까닭일 것이다. 길을 따라 내려가니 광복70주년 기념 광장에 조성된 태극조형물에 발길이 멈추었다.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의미 있는 10개의 태극기를 포함한 태극조형물을 설치하고, 우리 겨레의 민족성을 나타내는 무궁화 70주를 식재하였다.
광복70주년 기념 광장에 조성된 태극조형물이 정성스럽다
광복70주년 기념 광장에 조성된 태극조형물이 정성스럽다 ⓒ방주희

다음으로 향한 길은 삼의사 묘였다. 조국 광복을 위해 몸 바친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의사를 묘신 묘역이다. 삼의사는 1946년 김구 선생의 주선으로 이곳에 봉환 안장되었다. 삼의사 묘 왼편에는 1910년 3월 26일 중국 뤼순 감옥에서 순국한 안중근(1879~1910) 의사의 유해를 찾으면 안장하고자 마련한 빈 무덤이 있다.
삼의사와 안중근 의사의 빈 무덤에 서서 헌화하며 추모하였다
삼의사와 안중근 의사의 빈 무덤에 서서 헌화하며 추모하였다 ⓒ방주희

다음 길은 의열사였다. 이곳은 효창공원 내에 묘역이 있는 독립운동가 일곱 분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1988년 효창공원 정비 공사 때 건립을 추진하여 1990년에 준공하였고, 그 이등해에 이동녕·김구·조성환·차리석·이봉창·윤봉길·백정기 등 일곱 분의 영정과 위패를 이곳에 모셨다.
의열사에 모신 독립운동가 일곱 분의 넋을 기리는 합동추모제를 지낸다
의열사에 모신 독립운동가 일곱 분의 넋을 기리는 합동추모제를 지낸다 ⓒ방주희

마지막으로 발길이 닿은 곳은 무궁화 다섯 그루였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아온 무궁화는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꽃이다. ‘영원히 피고 또 피어서 지지 않는 꽃’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무궁화마다 이름을 붙여 안중근 무궁화, 김구 무궁화, 이봉창 무궁화, 윤봉길 무궁화, 백정기 무궁화다. 각각의 무궁화에는 이름 뿐이 아닌 상징적인 표식을 더했다. 김구 무궁화에는 김구 선생의 상징인 안경 표식이 있고, 윤봉길 무궁화에는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시간 오전 11시 40분에 시곗바늘이 멈춰있다. 이봉창 무궁화는 그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눈물을 담았고, 백정기 무궁화의 표식은 중절모 모양이다.
발길이 닿은 곳은 우리 곁에 다가온 독립운동가의 무궁화 앞이다
발길이 닿은 곳은 우리 곁에 다가온 독립운동가의 무궁화 앞이다 ⓒ방주희
시계 표식이 있는 윤봉길 무궁화
시계 표식이 있는 윤봉길 무궁화 ⓒ방주희
안경 표식이 있는 김구 무궁화
안경 표식이 있는 김구 무궁화 ⓒ방주희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눈물이 담긴 이봉창 무궁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눈물이 담긴 이봉창 무궁화 ⓒ방주희
중절모 모양의 백정기 무궁화
중절모 모양의 백정기 무궁화 ⓒ방주희

효창독립 100년 메모리얼 프로젝트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수많은 무명들의 이야기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이 중요하다. 얼마 전 한 TV 프로그램에서 광복절 제76주년 기획 대한독립밥상을 본 기억이 선명하다. 봉오동 전투의 숨은 영웅, 최운산 장군의 밥상이었다. 북간도에서 제일가는 부호였다는 최운산 장군은 지리적 요충지인 봉오동에 기지를 세우고 독립군을 양성했다. 독립군들이 배불리 먹고 더 잘 싸우길 바라며 전 재산을 내놓았으나, 결국 생활고와 일제의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별세했다. 독립군과 일제가 맞붙은 최초의 대규모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으리라. 뜨거운 심장으로 치열하게 쓰러져 간 독립의 간절함이 세월을 견뎌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잊지 않게 기억하고, 잃지 않게 기억하고, 또 기억하는 일이 다음 100년 동안 해야 할 일인 것 같다. 효창공원에서 독립선열들의 가치를 세워나가야겠다.

효창공원

○ 위치 : 서울 용산구 효창동 255
○ 홈페이지 : https://www.hyochangpa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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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공원에서 효창독립 100년의 기억을 걷다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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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책임자) 방주희 생산일 202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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