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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궁에서 근대 대표 궁궐이 되기까지…파란만장 '덕수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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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 교수
덕수궁은 선조가 임진왜란 때 피난을 갔다 돌아온 후 임시 궁궐(정릉동 행궁)로 삼으면서 처음 궁궐로 사용됐다.
덕수궁은 선조가 임진왜란 때 피난을 갔다 돌아온 후 임시 궁궐(정릉동 행궁)로 삼으면서 처음 궁궐로 사용됐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13) 선조와 정릉동 행궁

1. 피난에서 돌아온 선조의 거처

“새벽에 상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오니 백관들과 인마(人馬) 등이 대궐 뜰을 가득 메웠다. 이날 온종일 비가 쏟아졌다. 상과 동궁은 말을 타고 중전 등은 뚜껑 있는 교자를 탔었는데 홍제원(洪濟院)에 이르러 비가 심해지자 숙의(淑儀) 이하는 교자를 버리고 말을 탔다. 궁인(宮人)들은 모두 통곡하면서 걸어서 따라갔으며 종친과 호종하는 문무관은 그 수가 1백 명도 되지 않았다.” 는 『선조실록』 1592년 4월 30일의 기록은 선조가 한양의 창덕궁을 떠나 피난길을 서두르는 모습이다. 한양을 거쳐 다음날 점심을 벽제관(碧蹄館)에서 먹은 선조 일행은 이해 6월 13일 평양을 지나 의주로까지 피난하였다.

선조의 피난 생활은 1년 6개월 가량 지속되었고, 1593년 3월 권율 장군이 지휘한 행주산성 전투의 승리로 한양이 수복되자 이해 10월 마침내 한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선조가 귀환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왕이 거처할 궁궐이 없었다. 전란의 와중에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까지 조선 전기 3곳 궁궐 모두 폐허가 되었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당시 황화방(皇華坊)에 위치한 월산대군 후손의 집과 인근의 민가 여러 채를 합하여 임시 행궁(行宮)으로 삼고 시어소(時御所)로 삼았다. 월산대군은 성종의 형으로, 세조의 장자인 의경세자와 소혜왕후(인수대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예종 사후 왕위계승에서 동생인 잘산군(성종) 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었으나, 정희왕후와 한명회의 밀약 때문에 왕이 되지 못한 불운한 인물이었다. 이곳은 ‘정릉동(貞陵洞) 행궁’이라고도 불렸는데,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무덤인 정릉(貞陵)이 원래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릉은 태종 때 현재의 서울 성북동 쪽으로 옮겨졌지만, 정릉의 이름은 그대로 남았다. 지금도 덕수궁 일대를 ‘정동’이라고 부르는 것도 정릉이 연원이 되었다. 1593년 10월 1일의 『선조실록』은 “상이 아침에 벽제역(碧蹄驛)을 출발하여 미륵원(彌勒院)에서 잠시 쉬었다가 저녁에 정릉동의 행궁으로 들어갔다.”고 하여, 선조가 한양에 돌아온 직후 정릉동 행궁에서 머물렀음을 기록하고 있다. 같은 날 “상이 10월 4일 경사(京師)로 돌아와서 정릉동에 있는 고(故) 월산대군의 집을 행궁으로 삼았다.”고 하여, 이곳이 원래 월산대군의 집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돌아와 시어소로 사용했던 건물 즉조당, 인조가 즉위한 뒤부터 즉조당이라 부른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돌아와 시어소로 사용했던 건물 즉조당, 인조가 즉위한 뒤부터 즉조당이라 부른다.

2. 광해군, 인조와의 인연

1593년 10월부터 정릉동 행궁에서 머물던 선조는 1608년 2월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선조수정실록』의 1608년 2월 1일에는 “이날 미시(未時)에 상의 병이 갑자기 위독해져 정릉동 행궁의 정전(正殿)에서 훙(薨)하니, 나이 57세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릉동 행궁의 정전은 현재의 석어당으로 추정된다. 선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된 광해군은 행궁의 서청(西廳:현재의 즉조당)에서 즉위식을 올렸고, 이후에도 계속 정릉동 행궁에 거처했다. 『광해군일기』의 즉위년(1608년) 4월까지의 기록에는 “왕이 정릉동 행궁 여차(廬次)에 있었다.”고 하여 광해군이 이곳에서 선왕의 상을 치루고 있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1611년 10월 광해군은 정릉동 행궁의 명칭을 ‘경운궁(慶運宮)’으로 고쳤다. 1611년(광해군 3) 10월 11일의 『광해군일기』에는 “정릉동 행궁의 이름을 고쳤다. 흥경궁(興慶宮)으로 하려고 했는데, 정원에 전교하기를, ‘이것은 전대의 궁호이니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합당한 궁호를 여러 개 써서 아뢰라.’고 하였다. 드디어 고쳐서 경운궁이라고 하였다.”고 하여, 경운궁이라는 명칭을 처음 쓴 왕은 광해군임을 알 수 있게 한다.

경운궁에 거처하는 기간에 광해군은 전란 후 소실된 궁궐의 재건 작업에 힘을 기울였고, 창덕궁과 창경궁의 중건 사업을 완성했다. 그러나 1609년(광해군 1) 창덕궁이 중건된 후에도 광해군은 경운궁을 더 선호하여 이곳에 머무르는 일이 많았다. 경운궁과 창덕궁에 번갈아 가며 거처하던 광해군이 신하들의 권유로 1613년(광해군 5) 다시 창덕궁으로 완전히 이어(移御)했다. 경운궁은 선조, 광해군과 인연을 가진 후에는 인조가 즉위식을 올리게 되는 역사도 만들어 갔다. 광해군과 계모 인목대비의 악연 때문이었다.

1613년 영창대군의 증살(蒸殺)을 계기로, 광해군과 인목대비의 관계는 극히 악화되었고, 광해군은 1618년 인목대비를 경운궁으로 유폐하였다. 당시 경운궁이 서쪽에 있어서 서궁(西宮) 유폐라고도 한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있던 창덕궁을 접수한 반정군은 곧바로 경운궁으로 발길을 돌렸다. 반정의 명분으로 제시했던 ‘폐모살제(廢母殺弟: 어머니를 유폐시키고 동생을 죽임)’의 대상인 인목대비에게 반정을 공식적으로 승인받기 위함이었다. 인조는 인목대비를 직접 찾아뵙고 이곳에서 즉위식을 올렸는데, 별당인 즉조당(卽祚堂)으로 추정된다. 이후에 인조는 선조가 머물던 즉조당과 석어당 두 건물만을 남기고 경운궁을 떠났고, 경운궁의 가옥과 대지는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인조 이후 경운궁은 왕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국왕이 직접 찾은 것도 1773년(영조 49) 영조가 선조의 환도(還都) 삼주갑(三週甲: 180년)을 맞아 배례를 행하고, 영조가 선조의 기일을 맞이하여 세손인 정조와 함께 즉조당에서 기념식을 하는 정도에 그쳤다. 경운궁이 다시 궁궐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897년 고종이 이곳에 돌아오면서부터였다. 고종이 경운궁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경운궁은 근대를 대표하는 궁궐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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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책임자) 신병주 교수 생산일 2021-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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