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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의 왕비 단경왕후, 인왕산 바위에 그리움을 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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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교수
한양도성 인왕산구간의 가을 모습
한양도성 인왕산구간의 가을 모습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9) 단경왕후 신씨와 인왕산 치마바위

서울의 서쪽을 대표하는 인왕산은 겸재 정선의 걸작 <인왕제색도>로 인하여 우리에게 더욱 친근하게 다가온다. 인왕산에는 필운대, 송석원, 청풍계, 수성동 계곡 등 역사와 인물의 흔적을 보여주는 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는데, 치마바위에도 애절한 사연이 담겨져 있다. 2017년 모방송사에서는 ‘7일의 왕비’라는 제목의 드라마를 방영한 적이 있다. 7일 만에 쫓겨난 왕비의 비운을 드라마로 표현한 작품으로서 단경왕후 신씨가 그 주인공이었다.

7일의 왕비 단경왕후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1487~1557)의 본관은 거창으로, 1487년 신수근과 청주 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499년 13세의 나이로 당시 왕자 신분이던 1살 연하의 진성대군과 혼례식을 올렸다. 그녀의 운명을 바꾼 가장 큰 사건은 1506년 9월 2일에 일어난 중종반정이었다.

반정 주체 세력은 연산군을 대신할 왕으로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 지목하고, 그의 집을 찾았다. 연산군의 폭정이 지속되면서, 자신도 정치적 희생물이 될 것을 염려한 진성대군은 선뜻 문밖을 나서지 못한 채 자결까지도 생각했다. 위기에서 남편을 구한 여인이 단경왕후였다. 『연려실기술』에는 당시의 상황이 잘 묘사가 되어 있다.

“반정하던 날 먼저 군사를 보내어 사제(私第 중종이 있던 집)를 에워쌌는데, 대개 해칠 자가 있을까 염려해서였다. 임금이 놀라 자결하려고 하자 부인 신씨가 말하기를, “군사의 말머리가 이 궁을 향해 있으면 우리 부부가 죽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겠습니까. 그러나 만일 말꼬리가 궁을 향하고 말 머리가 밖을 향해 있으면 반드시 공자(公子)를 호위하려는 뜻이니, 알고 난 뒤에 죽어도 늦지 않습니다.” 하고, 소매를 붙잡고 굳이 말리며 사람을 보내 살피게 하였더니 말 머리가 과연 밖을 향해 있었다.”는 기록에서 위기의 상황에서 침착하게 대응했던 왕비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두 사람은 평소에도 애정이 매우 두터웠지만, 중종반정을 주도한 세력들은 왕비의 폐위를 요구했다. 연산군의 처남 신수근의 딸이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중종실록』 1506년 9월 9일의 기록을 따라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해 본다. 유순·김수동·유자광·박원종·유순정·성희안 등은 “거사할 때 먼저 신수근을 제거한 것은 큰일을 성취하고자 해서였습니다. 지금 수근의 친딸이 대내(大內)에 있습니다. 만약 왕비로 삼는다면 인심이 불안해지고 인심이 불안해지면 종사에 관계됨이 있으니, 은정(恩情)을 끊어 밖으로 내치소서.”라고 요구했고, 중종은 “아뢰는 바가 심히 마땅하지만, 조강지처(糟糠之妻)인데 어찌하랴?”면서 왕비의 보호에 나섰다. 그러나 공신들은 거듭 ‘종사의 대계(大計)’를 위해 폐위할 것을 압박했고, 중종은 “종사가 지극히 중하니 어찌 사사로운 정을 생각하겠는가. 마땅히 여러 사람 의논을 좇아 밖으로 내치겠다.”면서 왕비의 폐위를 결정했다. 단경왕후는 정현조(鄭顯祖)의 집으로 쫓겨나면서 조선시대 왕비 중 최단 재위의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인왕산 정상
인왕산 정상

폐비 후에도 이어진 사랑, 치마바위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난 단경왕후는 초저녁에 교자(轎子)를 타고 경복궁 건춘문을 나와 정현조의 집에 머물렀다가, 본가가 있는 인왕산 아래 사직골로 거처를 옮겼다. 중종은 경복궁에서도 늘 옛 왕비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단경왕후는 중종이 알아볼 수 있도록 집 근처 인왕산 자락에 붉은 치마를 걸쳐 놓았고, 이것이 지금까지 전해오는 인왕산 치마바위 이야기이다. 그만큼 두 사람의 애정이 폐비 이후에도 계속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인왕산 정상 바로 아래에 위치한 치마바위는 일제 강점 시기인 1939년에 일제가 대일본청년단대회를 기념하면서 이곳에 글씨를 새겼던 흔적도 남아 있다. 해방 후 바위로 쪼아냈지만 일부가 남아 있는 것이다.

『중종실록』 1528년(중종 23) 1월 29일의, “어의동(於義洞) 폐비 신씨 집 수직 군사를 단지 4명만 정했는데, 매우 부족하여 근일 도둑이 출입한 일이 있었다. 6명으로 늘려 지키도록 하라.”고 한 기록이나, 『연려실기술』의 “매양 모화관(慕華館)에서 명나라 조사(詔使)를 영접할 때에는 꼭 말을 보내 먹이게 하니, 부인은 직접 흰죽을 쑤어 손수 들어서 말을 먹여 보냈다고 한다.”는 기록에서 서로를 위했던 두 사람의 모습을 만나볼 수가 있다.

중종은 승하 직전에도 단경왕후를 보고 싶어 했다. 1544년 11월 15일 『중종실록』에는 “입내(入內)하는 궁인(宮人)이 있어 통화문(通化門)을 시간이 지나도록 열어 놓았기에 들어온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모른다고 했는데, 들으니 상이 임종 때에 폐비 신씨를 보고 싶어 했기 때문에 들어온 것이라고 했습니다.”라고 기록하여, 죽는 순간까지 중종이 단경왕후를 보고 싶어 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중종과 헤어진 후 40년 이상 홀로 지내던 단경왕후는 1557년(명종 12) 12월 7일 7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녀의 무덤은 양주(楊州) 장흥면(長興面) 수회동(水回洞)으로, 친정 가문의 땅이 있는 곳에 조성되었다. 폐위된 채 생을 마감했던 단경왕후는 영조 대에 와서야 왕비의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 1739년(영조 15) 3월 유학 김태남은 단경왕후의 폐출은 중종의 뜻이 아니었음을 주장하며, 이제라도 복위해야 한다고 청하였다. 영조는 대신들에게 이 상소를 검토할 것을 지시했고 마침내 왕비의 복위를 결정하였다. 1506년에 폐출된 후, 233년간 폐비로 살다가 왕비의 호칭을 다시 찾은 것이었다, 능호는 온릉(溫陵)으로 승격되었다. 인왕산에서도 눈에 잘 띄는 곳에 있는 치마바위에 중종과 단경왕후의 애절한 사랑이 있었음을 기억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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