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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운동의 역사와 마주하다…서대문형무소·서대문독립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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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에서 느낀 항일운동과 그 의의

1907년, 이미 외교권을 빼앗은 일제는 정미 7조약으로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했다. 이후 더 활발하게 일어난 독립운동. 국내에서는 의병이 서울 인근까지 진격하는, ‘서울진공작전’을 보였고, 해외에서도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에 일제는 독립운동가를 수용할 감옥을 지었다. 기존 감옥과는 다른 ‘근대식 감옥’. 그렇게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10월, 문을 열었다. 서대문형무소는 일제강점기에는 식민 지배에 맞섰던 수많은 항일 독립운동가가 갇혔으며, 해방 후에는 독재 정권과 군사 정권에 대항하는 민주화운동가가 투옥됐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입구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입구 ⓒ조수연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가 담겼던 서대문형무소는 1987년 11월 경기도 의왕에 소재한 서울구치소로 이전한 뒤 폐쇄됐는데, 서울시는 현장을 보존하고 역사를 기억하고자 1998년 11월 5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개관했다. 3·1운동을 맞아, 서울의 대표적인 항일공간, 서대문형무소와 서대문독립공원을 방문했다.
서대문형무소에 걸린 태극기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독립을 염원하며 펼쳤던 태극기가 서대문형무소에 걸려있다 ⓒ조수연

항일 독립운동가의 한이 서린 곳,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는 담장과 망루에서 시작, 10·11·12옥사와 추모비, 9옥사, 사형장, 창고, 여옥사, 취사장 등을 관람할 수 있다. 입구에서 표를 발권하면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는데, 먼저 서대문형무소에 걸린 태극기가 눈에 보였다.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독립을 염원하며 펼쳤던 태극기.

태극기를 뒤로하고, 중앙사를 찾았다. 중앙사는 옥사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건물로, 1920년대 중반에 지어진 건물. 1층은 간수의 사무공간이었고, 2층은 수감자를 교육하는 강당으로 활용됐다.
당시 기결수가 입었던 옷
당시 기결수가 입었던 옷과 당시 간수의 모습을 모형으로 볼 수 있다 ⓒ조수연

내부에는 형이 확정된 기결수가 입었던 수감복과 당시 간수의 모습을 모형으로 재현했다. 또한, 당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던 독립운동가의 옥중생활을 소개했는데,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많은 죄수가 앉아 있을 때엔 마치 콩나물 대가리 나오듯이 되었다가, 잘 때에는 한 사람은 머리를 동쪽, 한 사람은 서쪽으로 해서 모로 눕는다. 그러고도 더 누울 자리가 없으면 나머지 사람들은 일어서고, 좌우에 한 사람씩 힘이 센 사람이 판자벽에 등을 붙이고 두 발로 먼저 누운 자의 가슴을 힘껏 민다”
10·11·12옥사
3.1운동으로 수감자가 갑자기 늘어나 새로 지었다는 10·11·12옥사 ⓒ조수연

다음으로 10·11·12옥사를 방문했다. 10·11·12옥사는 여옥사와 함께 3·1운동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데, 10·11·12옥사가 3·1운동으로 잡혀 온 수감자가 갑자기 늘어나 새로 지은 옥사였기 때문이다.

10·11·12옥사는 중앙 간수소를 중심으로 각 옥사를 부채꼴 모양으로 배치했는데, 복도 천장에는 채광창을 내어 수감자의 움직임이 보이도록 했고, 독방을 설치해 독립운동가를 정신적·육체적으로 고문하기도 했다.

중앙사에서 나와 사형장으로 향했다. 사형장은 독립운동가가 일제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분노의 공간이기도 하다. 사형장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는 대표적으로 제3대 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가 탑승한 마차에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가 있다.

그 외에 취사장과 여옥사 등을 둘러봤다. 현재 서대문형무소는 1~15 옥사 중 문화재 보호를 위해 일부 옥사와 취사장 등을 역사관으로 꾸렸다.
사형장 입구
사형장 입구. 이곳에서 독립운동가 강우규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조수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독립운동가. 대표적으로 강우규 의사가 있다.
사형장에서 독립운동가 강우규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조수연

‘독립’과 ‘항일’을 알려주는 공원, 서대문독립공원

서대문독립공원은 1992년 8월, 자주독립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서대문독립공원’이라는 이름으로 개원했다. 하지만, 공원 입구에 주택과 상가가 무질서하게 들어서고, 주요 시설이 흩어져 있는 탓에 독립공원의 의미가 퇴색했다. 이에 2007년 4월부터 공원 재조성 사업이 시작됐고, 2009년 10월 다시 개원했다.

특히 재개원 때는 112년 동안 접근이 제한됐던 독립문을 시민들에게 돌려줌으로써 ‘독립공원’의 의미가 살아났는데, 현재 서대문독립공원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독립문
2009년 재개원 때 112년 동안 접근이 제한됐던 독립문을 개방했다 ⓒ조수연

서대문독립공원은 독립문 외 다양한 현충시설이 있다. 먼저, 독립관. 독립관은 1407년, 중국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지어진 영빈관으로, 독립공원 조성계획에 따라 국권 회복을 위해 신명을 바친 순국선열의 위패를 봉안했다.

현재 3천여 위를 봉안했는데, 지하에는 순국선열 후손들이 모여 위훈을 기리고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교육의 장, 학술 및 기념 행사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독립관
1407년 중국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지어진 영빈관인 독립관 ⓒ조수연

서대문독립공원 중앙에는 3·1독립선언 기념탑이 있다. 만세를 외치는 군중과 함께 뒤에는 민족대표 33인과 3·1독립선언서가 있는데, 3·1운동을 중요 독립운동의 하나로 기억하고 있었다.
3·1독립선언 기념탑
서대문독립공원 중앙에 위치한 3·1독립선언 기념탑 ⓒ조수연

기념탑에서 왼쪽으로 100m 올라가면, 양지바른 곳에 순국선열추념탑이 보인다. 순국선열추념탑은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해 해외 각처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일제에 항거하다 순국한 선열들의 얼을 되새기고, 추모하기 위해 서울시가 1992년 8월 15일에 건립한 탑이다.

순국선열추념탑은 항일의병무장상, 윤봉길·이봉창 열사 상징상, 독립군 의병 순국선열 처형상, 유관순 열사 운동상, 3·1독립만세상,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상, 청산리 전투상이 새겨져 국내외 독립운동의 모습을 담았다.
순국선열추념탑
순국선열추념탑에는 윤봉길, 이봉창 열사 상징상 등을 비롯한 국내외 독립운동의 모습이 담겨있다 ⓒ조수연

서울을 대표하는 항일 공간이자, 독립운동가가 투옥됐던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와 서대문독립공원에서 3·1운동, 그리고 독립운동가를 생각한다. 3·1운동 102주년을 맞아 방문했던 역사의 공간에서, 우리나라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 목숨까지 바쳤던 독립운동가에 대해 감사를 표한다.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 관람시간 - 매일 09:30~18:00 / 입장마감은 관람 종료 30분 전
○ 입장료 - 일반 : 3,000원, 청소년 및 군인 : 1,500원, 어린이 : 1,000원, 65세 이상, 6세 이하, 장애인, 국가유공자 :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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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운동의 역사와 마주하다…서대문형무소·서대문독립공원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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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책임자) 조수연 생산일 2021-03-05
관리번호 D0000042063269 분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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