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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으로 ‘조촐한 삶’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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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리나

부끄러워 할 줄 아는 것은 괴로운 일이지만
이치로써 맑고 깨끗한 것을 취하여
욕을 피하고 망령되지 않으면
그것을 조촐한 생이라 하느니라.

--《법구경》 진구품(塵垢品)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46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뜻인 '산다'라는 표현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살아가다'고 말하면 제 몫의 짐을 걸머지고 모래 바람 날리는 끝없는 평원을 뚜벅뚜벅 걷는 장면이 그려진다. 그런가 하면 '살아내다'라는 말은 까마득히 높은 계단을 무릎을 짚어가며 하나하나 힘겹게 오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살아지다'라는 말에선 아예 내 삶의 고삐를 다른 누군가가 쥐고 있어 기신기신 끌려가는 그림마저 그려진다. 다 같이 살아도 삶을 자신이 주도하는가 아닌가에 따라 그 본질이 전혀 달라지는 것이다.

자기 삶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자기 삶의 소유권을 갖지 못한 채 노예처럼 살아 낸다. 그에 더해 저도 모르는 사이에 홀린 듯이 살아진다. 아직 죽지 않았고, 여전히 숨이 붙어 있기에 그 모두를 '산다'라고 칭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삶에 대한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물음을 놓치지 않을 때, 비로소 살아간다고 말할 조건이 갖춰진다.

"어떻게 살고 싶은가?"

남들처럼 살아 내는 게 아니다. 별 생각 없이 살아지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에게 묻고, 이에 대해 대답을 하거나 대답을 하려고 노력해야만 비로소 살아갈 수 있다.

삶의 봄과 여름날에, 나는 '치열하게' 살고 싶었다. 세상과 정면으로 맞부딪혀 뜨겁게 싸워보고 싶었고, 사람들과 어울려 격렬하게 부대끼고 싶었다. 그 와중에 상처를 입었고, 상처만큼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때 몸을 사리고 내 껍질 속에 침잠했다면 나는 다치지 않았을지언정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삶의 가을에 접어들어 겨울을 바라보노라니, 어느덧 치열한 삶보다는 '조촐한' 삶을 꿈꾸게 된다. 화려하게 만개한 꽃보다는 사철 푸른 나무에 더 눈이 가고, 뛰어난 언변보다는 행동이 엽렵한 사람에게 마음이 가고, 제대로 싸우기 위해 가끔은 질 줄도 아는 지혜를 배우고 싶어진다.

조촐하다는 것은 초라하거나 비겁한 삶과 같은 뜻이 아니다. <법구경> 제18장 진구품은 진정으로 '조촐한 생'이 어떤가를 풀어낸다. 기실 진구품은 죽음의 공포와 무지에 대한 노래로, 맑고 흐림을 분별하여 깨끗한 것을 배우고 더러움을 행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진구품은 특이하게도 세상에서 가장 추한 것이 '무지(無知)'라고 일컫는다.

여기서 '부끄러워 할 줄 아는 것' 은 염치(廉恥)를 풀이한 부분이다. 염치를 알아야만 욕됨과 망령됨을 피하고 맑고 깨끗한 것을 취할 수 있다. 그런데 부끄러워 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염치를 모르는 뻔뻔스러운 사람은 염치를 아는 사람을 치욕스럽게 한다. 그럼에도 몰라서 당당하기보다는 알아서 평온하기를 택한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은 지식만이 아니라 지혜에도 융통된다. 세상의 기준이나 남의 눈이 아니라 내 마음의 잣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조촐한 생'이니, 날로 각박해져가는 환란의 시대에 스스로를 지킬 방도는 그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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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으로 ‘조촐한 삶’이란...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원본시스템 내손안에서울 제공부서 콘텐츠담당관
작성자(책임자) 김별아(소설가) 생산일 2014-10-24
관리번호 D0000041753916 분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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