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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이란, 인류가 가진 가장 멋진 재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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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유춘상
관용은 미덕이다. 하지만 관용의 기초는 호감이 아니다. 아니, 차라리 강한 거부감을 억누르는 것이다. 관용이란, 누군가가 정말 싫어도, 그가 방해하고 귀찮고 성가시게 해도 참고 견디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관용은 반자연적이다. 관용은 공격이 자연스러운 반응일 곳에서 참는 것이다.

--후베르트 슐라이허르트 《꼴통들과 뚜껑 안 열리고 토론하는 법》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49

대부분의 독자들은 제목에 '낚여서' 읽기 마련이지만, 오스트리아 출신의 철학자 슐라이허르트의 책은 광신과 관용에 대해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고민을 던진다. 제목에 등장하는 '꼴통'은 사전에 정의된 '머리가 나쁜 사람'의 속어라기보다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에 대한 희화적 표현이다.

'교리나 이념의 근본'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근본주의는 과속과 급변의 세태에 지친 사람들에게, 삶의 방향을 잃고 현실에 좌절한 이들에게 짐짓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과정이 지나치게 배타적이고 비타협적이며 맹목적이다 보니 종내는 애초의 목적과 목표마저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종교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살인, 사상의 명분하에 이루어지는 숙청은 그들을 종교와 사상의 본뜻으로부터 가장 멀리까지 데려간다.

인간이란 존재가 가진 정신세계의 신비 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그 괴이하고도 강력한 이데올로기는 일단 궤도에 들어서면 스스로 힘과 속도를 더해 자란다. 이성은 물론 자아까지 초개처럼 내던진다. 그러하기에 이미 사로잡혀버린 그들을 설득할 방법이란 없다. 평생에 걸쳐 종교적 광신에 맞서 싸웠던 프랑스 사상가 볼테르의 말대로 "이 악이 일단 번지기 시작하면, 도망가서 공기가 다시 정화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관용(tolerance)이란, 이러한 근본주의적 광신의 반대편에 자리한다. 관용은 볼테르가 1764년에 펴낸 <철학사전>에서 밝힌 대로 "인류가 가진 가장 멋진 재능"이다. 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차이를 인정하고, 취향을 존중한다. 이처럼 상대에게 아량을 베풀어 포용하는 것은 다시 볼테르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모두 약점과 오류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의 어리석음을 용서받듯 상대의 어리석음을 용서해야 마땅하다. 볼테르는 이것을 "첫 번째 자연법칙"이라고까지 부른다.

하지만 막상 현실에서는 이처럼 지당한 자연법칙에 복종하기 쉽지 않다. 아니, 하고 싶지 않다. 내 생각과 다르고 감성을 거스르고 감정을 해치는 무언가를 인정하기 싫다! 도무지 용서할 수 없다! 우리의 세상은 오늘도 이토록 악머구리 끓듯 시끄러운 것은 '관용'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와 합의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슐라이허르트가 말하는 관용은 '자연법칙'이라기보다 '반자연적'인 것에 가깝다. 그렇다. 관용은 내 생각과 같아서, 감성을 거스르지 않아서, 감정에 맞아서 '베푸는' 것이 아니다. 호감이 있는 상대에 대한 포용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불쾌감을 억누르고 받아들이는 일은 당연하지 않기에 어렵다. 쉽지 않기에 귀하다. 관용의 적은 어쩌면 외부의 무엇이 아닌 우리 자신이다. 괴물과 맞서 싸우다가 마침내 같은 괴물이 되어버리지 않기 위해, 끝없이 스스로와 맞서 싸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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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책임자) 김별아(소설가) 생산일 2014-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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