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안에 서울

"나도 참 구제불능의 책 욕심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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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aandd

내 집에 좋은 물건이라고는 《맹자》 일곱 책뿐이오. 나는 오랫동안 굶주리다 못해 기어이 그걸 돈 이백 닢에 팔았소이다 그려. 그래 그걸로 밥을 잘 먹고 희희낙락하여 영재(유득공의 호)에게 가서는 크게 자랑했다고. 그런데 영재 역시 굶주린 지 이미 오래된 터라 내 말을 듣더니만 곧바로 《좌씨전》을 팔아서 그 남은 돈으로 술을 사다 내게 마시라 하질 않겠소. 이는 맹자가 친히 밥을 지어 나를 먹이고 좌구명이 손수 술을 따라 나에게 권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 그래서 우리는 맹씨와 좌씨를 천천만만 번이나 칭송했는데 만약 우리들이 한 해가 끝나도록 이 두 책을 읽기만 했다면 어떻게 조금이나마 굶주림을 면할 수 있었겠소. 글을 읽어 부귀를 구하는 것이 다 요행을 바라는 술책일 뿐이므로 당장에 팔아 한때의 취함과 배부름을 꾀하는 게 더 진실 되고 꾸밈이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소. 슬픕니다! 슬픕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오?
--이덕무 <이서구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62

넓은 집에서 좁은 집으로 이사를 하며 짐을 줄일 때 가구며 집물들을 모두 정리하고 마지막 남은 것이 책이었다. 초등학교 때 10살 생일선물로 부모님께 받은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부터 대학 시절에 몰래 읽던 (지금 보면 아무래도 별 것 아닌) 금서들, 용돈을 모으고 생활비를 쪼개 한 권 두 권 사 모은 책들로 방 하나가 가득 찼다. 한때는 그것이 내 가장 큰 재산이었다. 책 한 권에 하나의 추억, 배움, 그리고 환희였다. 하지만 몇 십 년 간 수차례 이사를 하면서도 버리지 못해 굳이 끌고 다녔던 그것들이 언제부터인가 미련, 집착, 욕심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읽은 것을 다시 읽는 일은 생각만큼 흔치 않고, 읽지 않은 것을 뒤늦게 읽는 일도 마음만큼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필요하면 그때 다시 사거나 빌려보면 될 것을, 부질없는 집착으로 끝내 소유를 포기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책을 머리에 이고 사는 꼴이 되어서야 책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차마 돈을 받고는 팔지 못하여 책 한 꾸러미에 빵 한 봉지, 귤 한 박스, 그리고 술 한 병을 바꿨다. '오랫동안 굶주리다 못해' 판 것은 아니지만 책이 꽂혔다 빠져나간 자리가 휑한 것이 마음자리까지 싱숭생숭하다. 그리하여 술병을 따고 빵과 귤을 안주 삼아 쩌금쩌금 주워 먹으며 이백여 년 전 책을 팔았던 이덕무의 경험담을 읽었다. 그의 책은 나의 책과 다르다. 그때 책의 값어치와 지금 책의 값어치는 다르다. 하지만 책을 팔며 느낀 슬픔과 책이 뽑혀나간 자리의 허허로움은 아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책을 너무도 사랑하여 서치(書癡), 책에 미친 바보라고까지 불렸던 이덕무는 그 슬픔과 허허로움을 이기기 위해 호기를 부린다. 이 밥은 맹자가 지어준 것이요 이 술은 좌구멍이 따라준 것이라고, 책만 읽어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었던 현실의 허기를 위로한다. 그의 말대로 배가 부르고 알딸딸해지니 책만 끌어안고 버텨온 시간이 우습다. 진즉에 책을 빵과 바꿀 것을, 후회도 해본다. 그럼에도 다시 빈 책장이 서러워 인터넷 서점을 궁싯거리며 신간을 골라 장바구니에 넣고 있으니, 나도 참 구제불능의 욕심쟁이다. 세상모르는 딸깍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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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참 구제불능의 책 욕심쟁이다"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원본시스템 내손안에서울 제공부서 뉴미디어담당관
작성자(책임자) 김별아(소설가) 생산일 2015-02-13
관리번호 D0000041754434 분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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