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안에 서울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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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첨장이었던 것을 개울 다리 이름인 경교를 따서 '경교장'으로 고쳐 사용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느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 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 없다. 내 과거의 칠십 평생을 이 소원을 위하여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을 위하여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이루려고 살 것이다"(김구, 「나의 소원」)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고 중국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 김구와 요인들이 상해에서 꿈에 그리던 조국의 땅으로 돌아온 날은 같은 해 11월 23일이었다. 오후 4시가 조금 지난 시각 김포 비행장에는 그러나 환영 인파는커녕 낯선 미군병사 몇 명만이 임시정부 요인들을 맞이하였다. 귀국 인사들을 태운 국방색 세단 2대와 지프차 10여 대는 때마침 내리는 함박눈을 맞으며 숙소인 서대문의 죽첨장(竹添莊)에 도착하였다. 그곳은 일행을 맞을 준비가 전혀 안되어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매일같이 임시정부가 환국한다는 소문은 있었으나 대부분 헛소문에 그쳐 아무런 준비를 못했다는 것이다.(선우진 회고록, 『백범 선생과 함께 한 나날들』에서 인용)
서대문의 죽첨장은 바로 경교장을 말한다. 일제강점기 때에 이곳이 죽첨정이었던 데 따른 것이다. 죽첨장은 원래 일제강점기에 금광(金鑛)을 경영하던 광산 재벌 최창학(崔昌學)의 저택이었다. 광복 후 자신의 친일 행위를 뉘우친다는 뜻으로 이곳을 김구 선생의 거처로 제공하였던 것이다. 김구는 죽첨장을 건물 주변의 개울 다리 이름인 경교를 따서 경교장으로 고쳐 사용하였다. 김구는 이곳에서 3년 7개월간 거주하였고, 경교장은 김구의 집무공간이자 안식처였다. 아들 김신과 함께 생활하며 가끔은 손수 밥을 지어 들기도 했다고 한다.
경교장은 1936년 착공하여 1939년 준공되었으며, 당시에는 1,548평 대지에 지하 1층, 지상 2층 264.4평 규모의 양관(洋館)이었다. 광복군 대원 장준하의 수기인 『돌베개』를 보면 경교장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2층의 구조는 동서로 긴 복도가 한 가운데 있고 그 복도 양 옆에 방이 있었다. 남향한 방의 첫 방이 김구의 거실이었고, 왼쪽 맨 끝 방이 응접실이었다. 그 사이에 있는 일본식 다다미방은 수행원들이 사용하였다. 아래층에는 식당이 있었는데 요인들과 내방객들은 모두 이곳에서 식사를 하였다.
"선생님을 내가 죽였다……."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이곳에서 동포인 육군 소위 안두희의 총탄에 의해 서거하였다. 김구의 비서 선우진의 회고록을 통해 서거 당일을 살펴보고자 한다. - 1949년 6월 26일은 일요일이었다. 일요일에는 남대문교회의 예배에 참석하곤 하였는데 이 날은 마침 차가 없어서 교회에 가지 못하였다. 당일 11시 30분 경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가 찾아와 백범 선생 뵙기를 청했다. 안두희는 일전에 한국독립당의 조직부장 김학규의 소개로 경교장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내가 선생이 손님과 면담 중이라 하자 안두희는 비서실에서 면담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안두희는 45구경 권총을 차고 있었다. 12시경 선생과 잘 아는 강홍모 헌병 대위가 경교장에 들렀다.(중략) 안두희는 강 대위에게 먼저 선생을 뵈라고 답했다. 10여 분 뒤에 강 대위가 2층에서 내려왔다. 안두희가 일어나자 내가 2층으로 안내를 했다. 선생은 휘호를 쓰려는 듯 의자에 단정히 앉아 계셨고, 평소와 마찬가지로 평온한 표정이었다. 이 때가 12시 40분을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갑자기 위층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급하게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안두희가 권총을 든 채 2층에서 고개를 숙이고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래층에서 이풍식, 이국태 비서가 뛰어 올라가려는 순간, 안두희가 권총을 계단에 철커덕 떨어뜨렸다. "선생님을 내가 죽였다……." 그가 중얼거렸다. 나도 뒤따라 층계 위를 내달려 선생의 방문을 들어서는 순간 눈앞이 하얘졌다. 선생의 얼굴과 오른편 가슴에서 유독 붉은 피가 왈칵 흘러나오고 있었다. -
이념으로 분단된 조국의 완전한 통일을 위하여 남북협상 기획을 구상하고 자신보다 더 큰 인물이 배출되기를 바라며 민족의 한 분자로 살아간 기록인 『백범일지』를 집필한 곳이며, 그토록 바라던 해방된 조국에서 일제가 아닌 동포의 손에 의해 생을 마친 백범 김구의 혼과 넋이 살아 있는 곳이 경교장이다.
경교장은 백범 서거 후 집주인 최창규 측의 요구로 반환이 되었고, 한국전쟁 이후 외국 대사관과 미군 시설을 거쳐 1966년 고려병원에 인수되었으며, 현재는 강북삼성병원의 소유로 되어 있다. 그동안 여러 차례 철거, 이전 등 논란이 많았지만 2001년 4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29호로 지정이 되었고, 2005년 5월에는 문화재청이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 465호 '서울 경교장'으로 지정, 고시하였다. 병원 측은 서울시 문화재과와 협의하여 시설 일체를 그 당시대로 복원할 계획을 가지고 현재 개수공사에 들어가 2011년 12월까지 임시 폐쇄하고 있으며, 다만 백범기념실은 매주 토요일 오후에 3차례 제한적으로 일반인 관람을 허용하고 있다.
글/사종민(서울역사박물관 교육홍보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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