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안에 서울

바야흐로 산책하기 좋은 계절, 성곽마을 따라 타박타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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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 성곽길에 오르니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쌓여있다

낙산 성곽길에 오르니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쌓여 있다

봄에 들어선다는 입춘과 동면하던 개구리가 놀라서 깬다는 경칩 사이에 있는 24절기의 하나인 우수가 지났다. 우수라는 말은 눈이 녹아서 비가 된다는 말이니 이제 추운 겨울이 가고 이른바 봄을 맞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야흐로 가볍게 산책하기 좋은 계절이 돌아왔다.

지하철을 타고 한성대입구역 4번 출구로 내려 낙산 성곽길로 오르는 계단을 올랐다. 몇 발자국 옮겼을 뿐인데 바로 앞으로 혜화문이 보이고 성북동과 북한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공기도 상쾌하다. 성곽 옆으로 지난번 내린 잔설이 보인다.

369성곽마을 예술터

369성곽마을 예술터

경사진 길을 5분 쯤 오르면 먼저 솟대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한양도성에 인접한 성곽마을 중 하나인 ‘369성곽마을’이 보인다. 369성곽마을은 낙산 북동쪽 자락에 있다. 동네에 들어서면 성벽과 나란히 식당, 공방 등 주민공동이용시설로 조성한 4개의 ‘앵커시설’이 모여 있다.

4개의 앵커시설, 사랑방, 예술터, 마실, 공방 등은 모두 노후된 주택을 리모델링한 것으로 마을의 주거지 형태를 최대한 보존할 수 있도록 했다. 369성곽마을 예술터는 쉬어갈 수 있는 곳으로 한성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시회가 열리기도 한다.

구릉지형 주거지에다 교통 접근성도 좋지 않아 사람들에게 외면 받던 이 마을은 이렇게 역사·문화적인 정체성은 보전하면서 낙후된 주거환경은 개선하는 재생사업을 마치고 고즈넉한 성곽마을로 변신했다.

아직 꽃이 필 시기는 아닌데 노란 꽃처럼 보이는 것이 있어 가까이 보니 마른 잎이었다. 바람에 하늘거리는 모습이 마치 꽃처럼 보였던 것이다

?바람에 하늘거리는 마른 잎이 마치 꽃처럼 보인다

노후된 주택들이 많지만 깨끗하게 잘 정비된 마을과 성곽 사이를 걸었다. 전날 눈이 내려 성곽의 성돌도 질감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이 구간은 조선시대 충청도 사람들이 쌓은 구간이라 한다. 그 옛날 돌을 지고 오르며 성벽을 쌓았을 생각을 하니 많이 힘들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장수마을

장수마을

장수마을이라는 표지석이 보인다. 공원에서는 운동하시는 어르신도 보인다. 성곽과 삼선공원 사이 경사지에 자리한 장수마을은 전후에 서울로 모여든 가난한 사람들이 움막이나 판잣집을 지으면서 형성되었다. 해방이후 농촌에서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이 일거리가 많은 서울시내 인근에 자리를 잡다 보니 산동네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급한 경사에 저마다 다른 지형조건 속에서 길을 내고 축대를 세워 터를 만들고 집을 지었다. 처음에는 허술했던 집들이 60~70년대를 거치며 양성화되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이 마을에 통계상 나이 드신 분이 많아서 장수마을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어린시절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딱지계단(좌), 얼기설기 얽힌 전깃줄과 장독대가 정겹다(우)

어린시절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딱지계단(좌), 얼기설기 얽힌 전깃줄과 장독대가 정겹다(우)

골목 안으로 들어가본다. 이곳은 이화마을과 가까이 있지만 대조적으로 너무나 조용한 마을이다. 좁은 골목길을 가운데 두고 창문을 마주보고 집들이 있다. 골목길은 정겨움이며 소통의 장이었을 것이다. 알록달록 딱지계단이 보인다. 옆에는 친절하게 딱지 접는 방법도 적혀있다. 두꺼운 종이만 있으면 딱지를 접어 동네 아이들과 딱지치기 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마을 골목지도가 보인다. 지도를 보니 지형데 따라 골목과 집들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조금 알 것 같다. 골목과 집들은 작은 포도송이처럼 여러 덩어리로 뭉쳐졌다.

마을 골목지도가 보인다. 골목과 집들이 작은 포도송이처럼 여러 덩어리로 뭉쳐졌다.

장수마을과 한성대학교 사이에는 제법 규모가 있는 옛 건물 하나가 있는데, 바로 지방유형문화재 제 37호로 지정된 ‘삼군부청사 총무당’이다. 몇 남지 않은 조선시대 관아건물로 원래 자리는 광화문 바로 앞, 지금의 정부중앙청사 자리다.

총무당은 조선말 최고 군사기관으로 대궐의 수비, 도성의 순찰 등을 총괄하던 삼군부청사의 중심건물이었다고 한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이고주칠량(二高柱七樑) 팔작기와집이다. 총무당은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興宣大阮君)이 집권한 뒤 청헌당(淸憲堂), 덕의당(德義堂)과 함께 1868년(고종 5)에 세워졌다. 총무당이라는 현판의 글씨는 조선말 신헌(申櫶)의 글씨라고 한다. 나무의 질감과 냄새가 느껴지는 한옥이었다.

장수마을과 한성대학교 사이에 위치한 삼군부청사 총무당

장수마을과 한성대학교 사이에 위치한 삼군부청사 총무당

총무당을 지나 청룡사를 들러 동망봉까지 와서 좀 쉬었다. 동망봉(東望峰)과 청룡사는 서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는데, 1456년(조선 세조 2) 단종이 죽은 후,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宋)씨가 청룡사에 머무르며 날마다 동망봉에 올라 단종이 귀양 가서 죽은 영월 쪽을 바라보며 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곳에 팔각 정자를 건립하여 ‘동망정’이라 이름을 붙였다.

어린 나이에 멀리 영월로 유배를 간 남편 단종을 그리워하며 매일 동망봉에 올라 명복을 빌었다는 정순왕후의 사연은 괜시리 가슴이 먹먹해 진다

어린 나이에 멀리 영월로 유배를 간 남편 단종을 그리워하며 매일 동망봉에 올라 명복을 빌었다는 정순왕후의 사연은 괜시리 가슴이 먹먹해진다

손잡고 함께 걷고 싶은 369성곽마을 낙산 성곽길, 친숙하고 따스한 장수마을 골목길, 오래된 한옥과 가슴 먹먹해지는 사연을 간직한 동망봉까지, 마치 지붕 없는 역사박물관을 돌아본 듯했다. 하루로는 아쉬워 따스한 봄날 다시 찾게 될 것 같은 그런 동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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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산책하기 좋은 계절, 성곽마을 따라 타박타박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원본시스템 내손안에서울 제공부서 콘텐츠담당관
작성자(책임자) 시민기자 문청야 생산일 2019-02-28
관리번호 D0000035685723 분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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