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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팸메일을 왜 '스팸'이라 부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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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에서 전쟁은 수 없이 일어났다. 전쟁은 갈등을 풀어나가는 가장 폭력적인 방법이다. 전쟁은 파괴적이다. 더 큰 파괴력을 가진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 과학이 동원되었다. 전쟁에서 강력한 무기를 갖추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병사들을 먹일 식량을 공급하는 것이다. 그래서 각 나라는 보다 효과적으로 전투식량을 공급할 방법을 끊임없이 찾았다. 결국 전쟁은 식품과 과학이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전쟁은 수많은 희생을 낳았지만 그 절박함 때문인지 획기적인 발명품을 탄생시키기도 하였다. |
전쟁이 낳은 통조림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 군대는 혁명을 위협하는 유럽 국가들과 싸워야 했다. 나폴레옹 군대가 유럽의 여러 나라로 오랜 원정을 나서려면 전투식량을 조달할 효과적이고 획기적인 방법이 필요했다. 나폴레옹은 당시 1만 2,000프랑의 거금을 상금으로 걸고 음식 보존법을 공모했다. 1810년 니콜라스 아페르가 병조림을 만들어 그 상금을 차지했다. 아페르가 발명한 것은 조리한 식품을 주둥이가 넓은 병에 넣고 코르크 마개로 헐렁하게 막은 뒤 30분 내지 60분 동안 끓여서 병 안의 공기를 빼내고 단단하게 밀봉하는 방법이었다. 병조림이다. 이 음식 보존법은 곧바로 전투식량으로 실제 공급되었다. 병조림은 획기적이기는 했지만 유리병이라 흔들리는 해군 함정에서나 산길을 행군해야 하는 보병에게는 불편했다. 게다가 총탄이 오가고 포탄이 터지는 전쟁터에서 깨지기 쉽다는 점이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런던의 기계공 피터 듀란드가 얇은 철판에 주석을 도금한 원통 모양의 용기를 만들어 음식을 보존하는 방법을 개발하였다. 1812년에 이 기술을 이용해 최초의 통조림 공장이 영국에 생겼고 6년 뒤에는 만족스러운 수준의 절인 쇠고기, 양고기와 야채 스튜, 송아지고기와 수프 통조림을 생산해 냈다. 그러나 살균이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위생 문제가 자주 발생하였다. 최초의 병조림을 발명한 아페르의 조카 레몽 슈발리에 아페르가 1851년에 고압수증기를 이용한 살균기를 발명해서 특허를 얻었다. 1853년에는 미국인 윈즐로도 고온에서 완벽하게 살균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미국에서도 최초의 대규모 통조림 공장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1861년에 시작된 남북전쟁에서 통조림은 군인용 휴대 식량으로 널리 이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과 스팸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 정부는 전 세계에 파병되는 군인들에게 통조림 캔 제품을 대량으로 제공하였다. 미군 병사들에게 공급된 캔 제품 90퍼센트가 호멜사 제품이었다. 호멜사의 통조림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스팸이었다. 호멜사는 육가공 공장에서 전통적인 방식의 햄과 베이컨 등을 만들었다. 그러면 돼지고기 어깨살이 남았다. 남는 어깨살을 이용할 방법을 고민하다가 회사 소속 프랑스인 요리사 장 베르네가 이 부위를 갈아 양념한 뒤 캔 속에 집어넣고 익히는 상품을 내놓았다. ‘스팸(SPAM)’이라는 이름은 돼지고기 어깨살과 햄(Shoulder of Pork And ham)의 머리글자를 따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1937년에 출시된 스팸은 가격이 저렴하고 조리하기에 편리해서 많은 인기를 얻었다. 2차 세계대전을 맞아 스팸의 생산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미군들은 스팸을 가지고 온갖 요리를 만들어 먹었다. 스팸 샐러드, 스팸 샌드위치, 스팸 튀김, 스팸 마카로니, 스팸 수프, 스팸 스튜, 스팸과 감자튀김, 스팸 미트볼 등등 온통 스팸 세상에서 살았다. 게다가 스팸에 사용된 캔은 재활용되어 냄비나 팬으로 쓰였다. 또 스팸에서 나온 기름은 총을 닦고 피부 보호를 위해 바르거나 초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미국 군인들은 획일적인 식사 메뉴를 제공하게 만드는 전투식량인 스팸을 달갑게 보지는 않았다. 더구나 전쟁이 끝난 뒤 호멜사는 스팸 홍보를 위해 대대적으로 광고를 했는데 이는 광고 공해라는 사회문제로 부각되었다. 오늘날 무차별적으로 대량으로 뿌리는 인터넷 메일을 스팸메일이라 부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스팸과 부대찌개
스팸은 무기 대여 프로그램의 일부로 해외에 보내졌다. 특히 미국은 독일군의 해협 봉쇄와 폭격 등으로 물자 수입이 어려워진 영국에 스팸을 대량으로 공급했다. 영국인들은 공습 대피소에서 스팸을 먹었고, 레스토랑에서는 스팸으로 만든 갖가지 요리를 제공하였다. 영국은 ‘스팸랜드’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그리고 전쟁 후에 적십자사가 보낸 스팸을 먹은 유럽 피난민들은 이를 사치품이라 여겼다. 유럽인들은 스팸을 ‘특별히 마련된 미국산 고기(Specially Prepared American Meat)’의 머리글자로 생각했다고 한다.
스팸은 해방 후 미군과 함께 한국에도 들어왔다. 한국전쟁을 거치고 부대에서 유출되면서 스팸은 점차 우리나라에 알려지게 된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스팸과 소시지가 김치찌개와 만나면서 부대찌개가 탄생하게 되었다.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았던 시절 일명 ‘부대고기’라고 불렸던 스팸과 소시지에 김치를 넣고 찌개를 끓이면 제법 먹을 만했다. 1960~1970년대에는 구로 공단 공장 노동자들이 저렴한 비용으로 외식이나 회식을 할 때 부대찌개를 많이 찾았다고 한다. 요즘에는 전문점이 들어설 정도로 부대찌개는 많은 사람이 찾는 메뉴로 자리 잡고 있다. 한국전쟁과 미군에서부터 산업화와 노동자를 거쳐 대형마트의 진열대에 이르기까지 스팸은 한국 현대사에 스며들어 있으며 우리의 음식문화 속에도 깊이 들어와 있다.
글 정한진(창원문성대학교 호텔조리제빵과 교수)
출처 서울식품안전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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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책임자) | 서울식품안전뉴스 | 생산일 | 2017-04-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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