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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그곳을 가다] 59년 왕십리의 화려한 변화를 마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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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년 왕십리’라는 노래가 있다. 김흥국을 인기 가수로 성장시킨 대표적인 노래다. 이 노래에는 어렵게 살던 옛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왕십리의 애달픈 이미지가 담겨 있다. 하지만 이 노래 속 왕십리는 이제 옛말이 됐다. 뉴타운 개발의 물결 속에서 왕십리가 급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채마밭에서 공장지대로, 곱창거리를 거쳐 뉴타운 재개발에 이르는, 치열한 근현대사를 품어온 왕십리의 변화를 마주했다.

아래 내용 참조

- 왕십리역 앞 광장. 왕십리 역사에는 복합쇼핑몰이 들어서 있어 지하철 이용개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노래, 그곳을 가다 연재순서1. 광화문 연가2. 시청 앞 지하철 역에서3. 강남스타일4. 혜화동5. 종로에서6. 제3한강교7. 돌아가는 삼각지8. 이태원 프리덤9. 59년 왕십리

아래 내용 참조

- 왕십리 골목골목 남아있는 공장들의 모습. 번화가의 모습과는 대조를 이룬다.- QR코드를 찍어보세요. 노래 듣기로 연결됩니다.- 59년 왕십리
왕십리 밤거리에 구슬프게 비가 내리면 눈물을 삼키려 술을 마신다 옛 사랑을 마신다 정 주던 사람은 모두 떠나고 서울하늘 아래 나 홀로 아아 깊어 가는 가을밤만이 왕십리를 달래주네 아아 깊어 가는 가을밤만이 왕십리를 달래주네작사 이혜민 작곡 이혜민 노래 김흥국

‘십리를 가라’해서 왕십리(往十里)

우리는 시대별로 서로 다른 왕십리를 갖고 있다. 그리고 이상스럽게도 어느 시대든 왕십리는 우리에게 ‘과거’의 이미지로 남는다. 과거란 그렇다. 가도 가도 도달할 수 없는 곳이자 마음의 애잔한 파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또한 왕십리는 우리에게 영원한 변두리로 각인되어 왔다.왕십리에 가본 적도 없고, 어디에 붙어 있는 동네인지 알지 못하면서도 그냥 변두리이겠거니’ 하고 생각해왔다. 왜일까?
조선시대 왕십리 일대는 한성부에 속하면서도 동대문 밖에 놓여 있었다. 한성에 기대어 살면서도 사대문 안에는 들지 못했던 이 동네는 그때부터 서울의 동쪽 변두리라는 공간적 이미지를 품어왔다. 또 다른 이유는 무학대사의 전설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고층건물과 저층건물이 살을 맞대고 있는 왕십리 풍경.

조선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도읍지를 찾아 헤매던 무학이 동야(東野, 지금의 왕십리 부근)에서 지세를 살필 때 밭을 갈던 한 노인이 소를 꾸짖으며 “무학같이 미련한 소, 바른 곳을 버리고 굽은 길을 찾는구나.”라고 말했다. 깜짝 놀란 무학이 여기보다 더 좋은 명당이 있느냐며 묻자 노인은 북한산 쪽을 가리키며 “여기서 십리만 더 들어가 보시오.”라고 답했다. 무학대사는 농부의 가르침대로 북악산 아래 경복궁 자리에 도읍을 정했고, 무학대사와 농부가 만난 곳은 ‘십리를 가라’는 뜻의 ‘왕십리(往十里)’가 됐다. 왕의 궁터로 선택받지 못한 왕십리의 변두리 역사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요즘 젋은이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재봉틀도 눈에 듼다. 노래 : 왕십리 밤거리에 구슬프게 비가 내리면 눈물을 삼키려 술을 마신다. 옛 사랑을 마신다 정 주던 사람은 모두 떠나고 서울하늘 아래 나 홀로

채마밭에서 공장지대, 그리고 곱창골목

조선시대에는 사대문 안에서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성 안 사람들이 먹을 채소는 왕십리 일대에서 주로 재배했는데, 이곳이 중랑천이 청계천과 만나 한강으로 흘러드는 지역으로 땅이 비옥하고 물도 풍부하였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들어 왕십리는 경성 사람들이 쓸 여러 물자를 생산하고 보관하는 기지로 바뀌었다. 일대에 전차 노선이 지나가며 기와 공장, 석탄 공장, 방직 공장, 주물과 공작기계 공장 등이 골목골목 들어섰다. 일본식으로 ‘마치코바(まちこうば, 시내에 있는 작은 공장)’라고 불리는 이 영세 공장들은 광복 이후 지금까지도 그 맥이 이어져오고 있다. 2014년 왕십리의 오래된 골목들에는 아직도 공작기계 공장들이 제법 눈에 띈다. 선반과 압축 가공기계 등을 갖춘 ‘마치코바’는 그 허술한 설비에도 오랫동안 축적한 기술을 바탕으로 도면만 주면 어떤 물건이든 척척 만들어내고 있다.
왕십리는 곱창으로 기억되는 동네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왕십리에 의도적으로 처음 간 것이 곱창을 먹기 위해서였다. 예나 지금이나 왕십리 곱창 골목에는 제법 여러 집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왕십리 곱창은 어째서 유명해졌을까? 왕십리에서 곱창이 번창하게 된 까닭은 인근의 마장동 축산물시장과 관련이 있다. 소·돼지를 잡는 도축장이 곁에 있으니 그 내장을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왕십리 사람들의 주머니 사정 때문이었다. 곱창은 고기에 비해 싸다.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이 곱창의 주요 고객은 따라서 서민이었다. 비싼 고기를 못 먹는 사람들이 고기 먹는 기분으로 먹는 음식이 곱창이었던 것이다. 가난한 노동자들은, 살코기는 외국으로 수출하고 남은 소와 돼지의 부산물을 먹으며 서울살이를 견뎌냈다.

59년 왕십리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왕십리의 1959년은 어땠을까? 59년도 왕십리에는 꿈을 안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서울을 동서로 횡단하는 왕십리길이 있어 교통이 편리하고 도심과도 가까워서 서민들이 살아가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왕십리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계층적인 특색, 문화적 특성이 전형적인 서민들이었다. 그렇기에 이곳은 지방 이주 토박이가 문화적인 충돌을 겪는 대표적인 장소이자, 대한민국의 재건을 위해 서민들이 고달픈 하루하루의 삶을 보냈던 곳이다.
고단한 이들이 모여들어 얼기설기 살았던 곳이어서 변화가 힘들었던 걸까. 유명 대학이 있고, 국철과 지하철 등 3개 노선이 만나는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임에도 불구하고 왕십리는 오랜 시간 김흥국의 노래 ‘59년 왕십리’에 보이는 낡고 허름한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시인 김소월은 1920년대 초 우리 민족의 비애를 '왕십리' 라는 시에 담았다. 왕십리 곱창골목이 번창하게 된 이유는 이곳 마장동 축산물 시장과 관련이 있다. 철판 위에서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익어가는 곱창. 저절로 술을 부른다.

노래 : 아아 깊어 가는 가을밤만이 왕십리를 달래주네 아아 깊어 가는 가을밤만이 왕십리를 달래주네

‘59년 왕십리’는 잊어도 좋다

이렇듯 왕십리는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서울이라 하지만 ‘반듯한’ 도시인의 공간은 아니었다. 영원한 변두리로 여겨졌던 왕십리의 화려한 변화는 뉴타운 재개발과 2007년 민자역사가 들어서면서 시작됐다. 첨단 상업시설과 대규모 주거단지를 갖춘 서울의 대표적인 부도심으로 떠오른 것이다. 좁은 골목길에 철공소와 정밀기계업소 등 소규모 영세 사업장으로 빽빽하던 곳에 왕십리 뉴타운이 들어서며 죽순처럼 뻗어 올라간 아파트들이 즐비하다.
왕십리 역사(驛舍) 내 거대 쇼핑몰이 들어서면서 낡았던 역사는 젊음과 문화의 거리로 변화했다. 매일같이 영화를 보거나 쇼핑을 하러 역사를 찾는 이들이 크게 늘었고, 역 앞 광장은 한양대와 세종대 등 인근 대학생들이 즐겨 찾는 젊음의 광장으로 변했다. 특히 하버드대학과 록펠러광장에 설치된 것과 같은 ‘4면 세스 토마스’ 시계탑은 왕십리광장의 새로운 명물로 떠올랐다.
김소월 시의 ‘가도 가도 왕십리’라는 말은, 가도 가도 십 리를 더 가야 함을 뜻한다. 가도 가도 왕십리라는 구절처럼 왕십리가 항상 ‘과거’로 호출되는 것은 ‘과거’를 환기하는 ‘현재’가 여전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땅장사들의 ‘덩어리 땅’이 아니라 조금씩 나뉜 땅을 서민들이 나눠 갖고 품은 땅. 옛 정취가 남은 골목 사이사이 낡은 공장이 있고, 여전히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는 곱창집과 최고급의 아파트가 어우러진 곳, 왕십리. 이곳은 2014년의 서울의 삶을 직시하게 하는 곳이자, 여전히 59년 왕십리의 누추한 정겨움을 품은 기묘한 아우라의 동네다.





글 이현주(자유고기가) 사진 이서연(AZA 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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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그곳을 가다] 59년 왕십리의 화려한 변화를 마주하다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원본시스템 서울사랑 제공부서 시민소통담당관
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16-07-19
관리번호 D0000028036913 분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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