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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그곳을 가다] 밤 깊은 마포 종점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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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깊은 마포 종점에 서다 - 밤 깊은 마포 종점에서 기다린 것은 비단 막차만은 아니었다. 이미 막차가 끊긴 시각, 오지 않을 전차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자리를 뜨지 못하고 무언가를 부여잡게 하던 마포의 밤. 전차는 사라졌지만 지나간 시간은 그리움과 추억으로 찾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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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깊은 마포 종점 갈 곳 없는 밤 전차 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 곳 없는 나도 섰다 강 건너 영등포에 불빛만 아련한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 기다린들 무엇하나 첫사랑 떠나간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저 멀리 당인리에 발전소도 잠든 밤 하나 둘씩 불을 끄고 깊어가는 마포 종점 여의도 비행장엔 불빛만 쓸쓸한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 생각한들 무엇하나 궂은 비 내리는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작사 정두수 작곡 박춘석 노래 은방울 자매

노래 : '밤 깊은 마포 종점 갈 곳 없는 밤 전차 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 곳 없는 나도 섰다 강 건너 영등포에 불빛만 아련한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 기다린들 무엇하나 첫사랑 떠나간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사진 : 여전히 많은 사람의 발길이 이어지는 오늘날 마포의 모습

새벽을 기다리던 종착지

1950∼60년대를 살아온 중년들이 떠올리는 추억 속 마포에는 여성 듀엣 ‘은방울 자매’가 부른 ‘마포 종점’이 배경음악으로 깔려있다. 옛 마포의 모습과 서민들의 애환을 담은 이 애절한 노래는 한때 국민가요로 불렸다.

밤 깊은 마포 종점 갈 곳 없는 밤 전차
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 곳 없는 나도 섰다
강 건너 영등포에 불빛만 아련한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 기다린들 무엇하나
첫사랑 떠나간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노랫말엔 마포 종점에서 바라본 한강을 낀 마포의 야경이 눈에 어른거린다. 연인의 슬픈 사랑 이야기와 함께 서민의 애환과 정취를 실어 나르던 전차가 사라진다는 아쉬움도 함께 전해온다. ‘마포 종점’은 근대화 문명에 밀려난 전차의 고별 노래이기도 하다. 1950년대 한강을 넘지 못한 마지막 전차가 고단한 몸으로 새벽을 기다리던 종착지였던 마포. 어둠이 깔리는 밤 11시, 청량리~마포 구간을 운행하던 전차는 어김없이 마포 종점에 닿았고, 마포의 밤거리는 동이 틀 때까지 지친 사람들의 발걸음을 품어주었다. 즉 마포는 애달픈 삶이 모인 도시의 공간이었다.

그 속에서 '마포 종점' 가사가 새겨진 노래비는 여전히 마포를 지키고 있다.

조운(漕運)의 종착점 마포나루

과거 마포는 바로 조운(漕運)의 종착점이기도 했다. 한강을 끼고 있는 마포는 예로부터 수상 교통의 요충지였다. 육상 운송로가 발달하기 전 삼남지방의 각종 현물들을 나르려면 선박을 이용해야 했는데, 서해안을 따라 한양으로 올라온 배들은 모두 마포에 짐을 부렸다. 그러니 마포는 전차의 종점이기 이전에 바로 조운의 종착점이었던 것이다.
전성기 마포나루에는 곡식, 목재, 어물 등 다양한 물자들이 전국에서 올라왔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했던 것이 바로 소금, 그리고 새우젓이었다. 마포나루에서 소금이 날 리도 없건만 조선시대 마포나루에서 거래되던 소금은 ‘마포염’이라고 따로 이름 지어 부를 정도로 유명했다. 질 좋은 소금이 모이는 곳이다 보니 더불어 젓갈의 명성도 높았다. 마포나루 새우젓은 담백한 서울의 음식문화와 궁합이 맞아 오랫동안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새우젓은 짠맛을 내되 자극적이지 않으며 색깔 역시 깔끔하기 때문이다. 바닷가가 아닌 서울 중심에서 지금도 10월이면 새우젓 축제가 열리는 이유다.
조선시대는 물론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 후에도 한동안 수도 서울을 먹여 살리는 주요한 통로였던 마포는 철도가 건설되면서 포구로서의 기능을 잃어갔다. 세월 따라 성쇠의 부침을 겪는 것이 세상 이치다. 하지만 지금도 역사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마포 소금 장수나 새우젓 장사가 떼돈 번 얘기가 나오는 걸 보면 옛 영화의 흔적이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고 스러지는 게 아닌 듯하다.

가을색이 짙어진 마포, 계절이 지닌 쓸쓸함이 묻어난다.

고달픈 일꾼들의 안식처

과거 김포공항이 국제공항이던 시절, 공항을 빠져나온 외국 귀빈들이 마포대교를 건너오면서 본격적인 서울의 참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마포대로를 귀빈로라 이름 붙였다. 귀빈로변은 빌딩으로 화려하지만 그 뒷길에는 마포나루가 번창했던 시절부터 명성이 높던 음식점들이즐비하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마포나루에는 목재와 새우젓, 소금 등을 실어 나르는 배가 드나들었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음식점도 덩달아 생겨났다. 허기진 배를 채우려던 뱃사람들과 제재소·철공소 인부들이 ‘목구멍 먼지를 씻어낸다’며 고기를 찾았다. 고된 노동으로 피곤에 지친 노동자들이 퇴근 후 드럼통을 가운데 놓고 마시는 대포 한잔은 하루의 위안이자 소박한 즐거움이었다.

왼쪽사진 : 과거 마포와 청량리를 잇던 전차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만 달리고 있다. 가운데 사진 : 오래전부터 마포는 뱃사람과 철공소 인부들의 위안이 되었다. 오른쪽 사진 : 고층빌딩이 들어서고 자동차가 달리는 오늘날 마포의 모습. 갈 곳 없는 이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왼쪽사진 : 철공소 사람들의 위안이 되어주던 마포 갈비. 상점 문 앞에 마포 종점 가요제 포스터가 붙어 있다., 오른쪽 사진 : 해 지는 마포대교, 이제 밤 깊은 마포가 될 시간이다.

노래 : 저 멀이 당인리에 발전소도 잠든 밤 하나 둘씩 불을 끄고 깊어가는 마포 종점 여의도 비행장엔 불빛만 쓸쓸한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 생각한들 무엇하나 궃은 비 내리는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오늘도 이 골목에는 반세기를 훌쩍 넘긴 대폿집과 갈빗집에 등이 켜지고, 추억을 안고 오는 손님들의 왁자한 담소가 빌딩의 담장을 넘는다. 여전히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도시의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빌딩 숲 너머의 마포 먹자골목엔 상술이 아닌 맛과 멋과 추억이 사이좋게 모여 있다.

정가와 누각이 수놓던 풍류의 강

마포는 과거 풍류의 강이었다. 마포강변은 일찍부터 많은 정자와 누각이 세워지고 지체 높은 선비들과 시인 묵객이 즐겨 찾던 뱃놀이 명소였다. 용산강 하류에 있는 마포는 남쪽으로는 용산의 높은 언덕이 강변 가까이 나와 있고, 북쪽으로는 잠두봉의 석벽이 양화나루 위로 불쑥 나와 있으며, 그 사이에 강폭이 넓고 강물의 흐름이 완만한 포구였다. 또 앞에 있는 아담한 밤섬과 오고 가는 놀잇배가 한 폭의 그림 같이 어우러지던 곳이었다.
이를 알아본 조선시대의 많은 풍류객과 시인 묵객들은 이곳 마포를 찾아 정자를 짓고 한가로운 세월을 보냈다. 풍류객으로 유명했던 태종의 큰아들 양녕대군은 만년에 이곳에 영복정을, 둘째 아들 효령대군은 망원동에 망원정을 짓고 소요자적(逍遙自適)했다. 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도 이곳에 담담정을 짓고 당대 명사들과 함께 시를 짓고 주연을 베풀며, 풍월을 즐겼다 전해진다.

위로의 메시지를 품은 마포대교

마포나루를 지나 마포대교를 걷노라면 길을 따라 걷는 내내 다리가 말을 걸어온다. “오늘 하루 어땠어? 밥은 먹었어? 잘 지내지?”부터 시작해 “내일은 해가 뜬다! 자가용의 반대말은? 커용~”같은 사소한 말들이다. 걷는 내내 옆에서 가만가만 따라오며 시시한 안부를 묻고, 가벼운 농담도 던지는데, 신기하게도 정말 별것 아닌 이런 메시지들이 보는 이로 하여금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다리가 전하는 위로의 메시지인 것이다.
보행자 걸음에 맞춰 은은한 불빛과 함께 따뜻하고 정감 있는 문구와 그림 등이 전하는 마포대교 위에 서서 마포 종점을 들어본다. 1950년대 ‘마포 종점’이 노래를 통해 서민들의 애달픈 현실을 위로했다면 2014년 마포에서는 종점을 지나 한강을 건널 수 있게 다리가 은은한 불빛과 소소한 안부로 마음속 깊은 곳에 응어리졌던 설움과 아픔을 녹여내고 있다.





글 이현주(자유고기가) 사진 이서연(AZA 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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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그곳을 가다] 밤 깊은 마포 종점에 서다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원본시스템 서울사랑 제공부서 시민소통담당관
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16-07-19
관리번호 D0000028036924 분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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