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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600년 역사 기행] 500년 전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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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한 제목의 드라마로도 만들어 큰 인기를 끈 소설 가운데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이라는 작품이 있다. 병약한 남동생을 대신해 시험을 보고 성균관에 들어간 남장 여인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현실성은 떨어지지만 흥미로운 이야기 전개와 당시의 시대상을 잘 보여주었다는 호평을 받은 소설이다. 그렇다면 조선 시대의 성균관 유생은 실제로 어떤 생활을 했을까?




서울과 지방의 교육기관은 편제부터 달라

조선 시대 인재 양성 교육기관으로는 향교(鄕校), 서원(書院), 4부학당(四部學堂), 성균관(成均館)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향교와 서원은 한성이 아닌 지방에만 있던 교육기관이다. 오늘날 서울시 도봉구에 있는 도봉서원이나 양천구에 있는 양천향교 등을 들어 서울에도 향교나 서원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이들 향교와 서원이 있던 지역은 조선 시대 당시에는 서울이 아니라 경기에 속했고, 서울의 행정구역이 확대되면서 서울시에 편입된 것이다.

향교가 공립학교 성격의 교육기관이라면 서원은 오늘날 사립학교에 해당하는 교육기관이었다. 이런 서원과 같은 일종의 사립학교 중에는 백성이 자체적으로 인원을 조직해 만든 서당도 있었다. 이밖에도 부유한 가정에서는 독선생(獨先生)을 두고 자녀를 별도로 가르치기도 했다. 서당이나 독선생의 경우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존재했다. 한편 서울에는 4부학당과 성균관이 있었는데, 이중 성균관이 중심이며 그 아래 4부학당을 두었으며 모두 국공립 교육기관이었다.



고려 시대부터 성균관으로 불려

신라 시대에는 유교 교육을 맡은 최고의 국립학교를 국학 또는 태학감이라 했는데, 고려 시대에 이르러 이를 성균관이라 개칭했다. 이후 공민왕 때 한동안 국자감이라 부르기도 했으나 다시 성균관으로 바뀌었고, 조선 시대 내내 같은 이름으로 불렸다. 지금도 성균관대학교 안에 조선 시대의 성균관이 남아 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탄 건물을 중건한 것이다. 성균관이란 명칭은 <주례(周禮)>에 “균등한 법전을 맡아 나라를 세우는 학문과 정치를 닦는다(掌成均之法典 以治建國之學政)”는 구절에서 유래한 것이다. 다른 말로 학궁(學宮), 태학(太學), 반궁(泮宮), 현관(賢關), 근궁(芹宮), 수선지지(首善之地)라고도 불렀다. 일찍이 명나라 사신 김식(金湜)은 오늘날의 명륜동에 있는 성균관을 돌아보고 “풍수가 좋아 그 터전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실제로 조선 사회를 이끌어간 지식인은 대부분 성균관 출신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왕자라도 어리면 뒷전에서 배워
성균관은 1395년(태조 4년) 착공해 3년 만에 완공했으며, 크게 공자와 성인의 제사를 지내는 대성전(大成殿)과 유생들이 학문을 배우는 명륜당(明倫堂)으로 구분한다. 대성전이 앞쪽에 있는데, 그 안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좌우에 안자, 자사, 증자, 맹자의 위패를 모셨다. 이어 대성전 앞에 나란히 늘어선 두 채의 건물인 동무와 서무에는 조선 시대 여러 유학자의 위패를 모셔놓았다. 우리가 위인전을 통해 익히 알고 있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비롯해 최치원, 정몽주, 안향, 조광조, 송시열 등 학문적 업적이 뛰어난 선조 18명의 위패를 모셨다. 대성전이라는 현판 글씨는 한석봉이 쓴 것이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은행나무 두 그루는 중종 때 윤탁이 심은 것이다. 성균관이나 향교에 은행나무를 심는 것은 일찍이 공자가 은행나무가 있는 단에서 제자를 가르친 데서 유래한 것이다. 해마다 2월과 8월에 이 대성전에서 석전제를 지내며, 지방에서는 향교에서 석전제를 올린다.

명륜당은 유생들이 모여 학문을 연마한 곳으로, 동쪽에는 서적을 두는 존경각이 있고, 앞에는 좌우에 유생들이 머물면서 학문을 익히는 동재와 서재가 있다. 동재 끝에는 식고(食鼓)라는 북을 달아 아침저녁으로 북을 쳐 식사 시간을 알렸다.
조선 전기 성균관 입학생은 200명이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재원 부족으로 인원이 감소해 영조 때는 126명이 입학하기도 했다. 성균관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자격 조건을 갖추어야 했다. 예를 들어 서울의 한성시나 지방의 초시에 합격해 생원과 진사가 된 사람, 사학에 다니는 학생 가운데 정해진 시험에 합격한 사람, 조상의 공덕이 높아 별도로 뽑힌 사람 등이 입학할 수 있었다. 왕세자와 왕자도 8세가 되면 으레 성균관에 입학해 학문을 배웠다. 모든 성균관 유생이 학문을 배울 때는 나이 순서에 따라 자리가 정해졌다. 왕세자라고 해서 높은 자리에 앉을 수는 없었다. 철저하게 장유유서(長幼有序) 원칙을 지킨 것이다.



성균관 유생의 ‘실제’ 모습은?

성균관에 입학하면 유생들은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해진 학칙에 따라 학문을 배워야 했으며, 시험도 수시로 보았다. 또 매일 출석을 확인해 300일 이상 나온 학생에게만 관시(館試)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이들에게는 따로 졸업이 없었으며, 과거에 합격하는 날이 곧 졸업식 날인 셈이었다. 한 달에 이틀 휴일이 있어 개인적으로 밀린 빨래를 하거나 부모를 찾아뵙고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성균관 유생은 대부분 사대부 가문의 자제였다. 이들은 시험을 통해 관리로 나갈 수 있었기 때문에 정부 정책에 관심이 매우 많았다. 정부에서 부당한 정책을 편다거나, 정당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유생들은 자치 기구인 재회(齋會)를 개최해 자신들의 의견을 주장했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에는 집단으로 시위를 하거나 수업 거부, 단식투쟁, 나아가 동맹 휴학 등 실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연산군 때는 왕의 파행적 행위에 대해 성균관 유생들이 수업 거부와 동맹 휴학으로 맞섰고, 연산군은 성균관을 ‘놀이터’로 만들어버렸다. 조선 시대 왕들은 선비의 기개를 살리고 인재를 양성한다는 생각에서 유생들의 요구를 들어주곤 했다.

성균관은 일제강점기에 경학원(經學院)으로 개칭되면서 한때 교육 기능을 상실하기도 했다. 1930년 명륜학원이 설립되면서 교육 기능이 부활했고, 오늘날 성균관대학교로 발전했다. 조선 시대 최고 학부이던 성균관은 조선 왕조를 이끈 지식인을 길러낸 인재 양성의 요람이자 정신문화의 산실이었다.



4부학당은 서울의 중등교육 맡아

성균관 밑에는 중등교육 담당 기관으로 4부학당이 있었다. 학당은 조선 초기 서울의 행정구역을 동·서·남·북·중의 5부로 나누고, 여기에 각각 학교를 하나씩 세우면서 본래는 5부학당으로 출발했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건물이 없어 사찰 건물을 빌려서 이용하기도 했다. 이후 1411년(태종 11년) 한성부 남부에 남부학당을 건립한 것을 시작으로 세종 때 중부학당, 서부학당, 동부학당을 차례로 건립했다. 그러나 이때 북부학당은 따로 건립하지 않아 이후 4부학당으로 불렸으며, 조선 시대 법전<경국대전>에도 4부학당으로 법제화했다.

각 학당의 위치를 보면 남부학당은 중구 필동1가 30번지, 중부학당은 종로구 중학동 88번지, 서부학당은 중구 태평로1가 60번지 일대, 동부학당은 종로구 종로6가 33번지 서울디자인지원센터 부근이다. 4부학당의 정원은 각각 100명이었으며, 교과목이나 내용 등은 성균관과 비슷하지만, 문묘를 두지 않고 전적으로 교육에만 집중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입학은 사대부는 물론 양민 자제 가운데 8세 이상이면 누구나 가능했다. 여기서 성적이 우수한 학생은 15세가 되면 시험을 보고 성균관에 진학하기도 했다. 학비나 운영 비용은 모두 국가에서 부담했고, 학생은 엄격한 규율 속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다. 이들은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집단 시위나 수업 거부에 참여하기도 했고, 사림 세력과 어울리면서 훈구 대신을 비판하기도 했다. 조선 말기 관학의 부진으로 학생 수가 줄어들고, 새로운 근대 교육기관이 등장하면서 4부학당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닮은 듯 다른 500년 전과 지금의 서울 교육
우리나라 부모들의 교육열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과외와 학원 시스템을 서구에 수출해 또 하나의 한류(?) 바람을 일으키고 있을 정도라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런 지극한 교육열은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어서 조선 시대에도 앞에서 소개한 것처럼 일종의 과외 선생인 독선생이 있었고, 과거 시험을 볼 때마다 커닝 페이퍼가 등장하는 등 부정행위 문제가 심심치 않게 제기되었다.

조선 시대와 지금의 교육 체계에서 가장 큰 차이점을 찾는다면 아마 얼마나 많은 학생에게 교육 기회가 공평하게 돌아가느냐 하는 점일 것이다. 오늘날에는 전국에 수많은 교육기관이 들어서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누구나 의무교육은 물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입학한다. 최고 학부인 대학의 경우 입학 정원이 모자란다는 한숨 소리마저 들릴 정도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신분제도의 벽에 막혀 양반이 아니면 성균관이나 4부학당에 입학조차 하기 어려웠고, 원칙적으로 입학이 허가되더라도 경제적 이유 등으로 실질적으로 입학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오늘날에도 서울의 유수한 대학에 입학하기는 그때와 매한가지로 하늘의 별 따기지만 말이다.

학생들이 입시 위주의 주입식 교육에 매달리고 있다는 사실 역시 끝없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조선 시대와 오늘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어쨌든 조선 시대의 서울은 전국의 인재들이 모여 가장 우수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교육도시였으며, 인재 양성의 요람이었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11월호에는 ‘경복궁 중건과 일제의 파괴전략’에 대해 살펴볼 예정입니다.
조선 시대의 법궁이던 경복궁을 흥선대원군이 왜 중건하려 했으며, 이러한 경복궁을 일제는 어떻게 파괴하고 지금에 이르렀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글 이상배(서울시사편찬위원회 전임연구원) 사진 제공 서울시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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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600년 역사 기행] 500년 전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원본시스템 서울사랑 제공부서 시민소통담당관
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16-07-19
관리번호 D0000028036741 분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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