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사랑

[서울 600년 역사 기행] 고종 황제의 꿈과 시련

문서 본문

1800년대 후반의 조선은 청나라, 일본, 러시아, 미국 등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그야말로 풍전등화 같은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 시련의 시기에 나라를 이끌어간 인물이 고종이다. 그는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12세의 어린 나이로 조선의 제26대 국왕이 되었다. 그를 등극시킨 주역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이하응이었으며, 고종이 등극한 후 10년 동안 실질적으로 조선을 지배한 인물이었다. 고종에게 영향력을 행사한 또 한 명의 인물은 그의 비 명성황후였다. 고종은 실제로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부인 명성황후의 갈등과 반목, 세력 다툼을 견뎌내면서 어렵게 나라를 이끌어야 했다



임오군란과 청나라 개입
1873년 11월에 흥선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권력은 명성황후와 그 일족 민승호, 민겸호, 민태호로 대표되는 민씨 일문으로 넘어갔다.
민씨 일파가 권력을 장악한 이후 조선 정부는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일본군 장교가 지휘하는 신식 군대를 창설하고 이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반면 구식 군대는 녹봉조차 몇 달씩 밀려가며 받고, 그나마도 절반 넘게 쌀이 썩거나 겨와 모래가 섞인 것을 받는 등 처우가 매우 형편없었다. 이에 격분한 구식 군대는 1882년 7월에 봉기해 녹봉미를 관장하는 민씨 세력의 거물 민겸호 등을 살해하고, 포도청과 전옥서 등을 습격했다. 흥선대원군의 은밀한 지원을 받은 구식 군대는 서대문 밖에 있던 일본 공사관도 습격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이 임오군란이다. 반란 세력은 민씨 일족의 주요 인물들을 잇달아 살해하고 명성황후가 거처하던 창덕궁까지 습격했으며, 명성황후는 상궁으로 변복하고 겨우 창덕궁을 탈출해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고종은 흥선대원군을 불러 사태 수습의 전권을 위임했다. 다시 정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살해된 것으로 단정하고 국상을 공포하는 한편, 정부 조직을 구체제로 되돌리고 보수 세력을 요직에 기용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민씨 세력은 이에 맞서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한성에 도착한 청군은 1882년 8월 흥선대원군을 납치해 톈진의 보정부(保定府)에 연금했으며, 이로써 임오군란은 한 달여 만에 막을 내렸다. 명성황후는 다시 궁궐로 돌아와 권력을 장악했으며, 흥선대원군을 납치하는 무리수까지 두면서 명성황후에게 권력을 안겨준 청나라는 이후 조선의 정치 외교 문제에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
1870년대 중반 이후 한성에서는 개화사상을 지닌 젊은 양반들이 하나의 정치 세력을 형성했다. 김윤식,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서광범 등이 대표 인물로, 이들은 관직에 진출해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입지도 마련해나갔다. 그러나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의 간섭이 강화되자 개화 정책은 후퇴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들에게 다시 기회가 생긴 것은 1884년이었다. 이해에 청나라는 인도차이나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다가 패배했다. 급진적 개화를 주장하던 일부 개화파는 이때를 청나라 세력을 조선에서 몰아내고 개혁을 단행할 수 있는 호기라고 판단하고 일본의 지원을 받아 12월 4일 우정국 낙성식을 기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쿠데타 세력은 밤 10시경 우정국 북쪽에 있는 민가에 불을 지르고, 놀라서 우정국 밖으로 뛰쳐나온 민씨 세력의 주요 인물을 살상했다. 그리고 창덕궁에 있던 고종을 경운궁으로 모셔 일본군의 보호를 받게 했다. 이어 갑신정변 주도 세력은 청군의 공격 을 막기에 유리한 계동궁으로 고종의 거처를 옮기고, 곧바로 왕실 인물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권을 수립했다. 이에 다시 창덕궁으로 돌아온 고종과 쿠데타 세력은 다음 날 혁신정강(革新政綱)과 대정유신(大政維新)의 조서를 반포했다.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 평등권을 제정하며, 지조법을 개혁하고 국가 재정을 건전하게 운영하겠다는 것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이들은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를 타파하고, 만민의 평등과 자유를 보장하는 부국강병의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이에 반발하는 청군의 공격을 받아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쿠데타 세력은 민중의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했고, 일본 역시 이들을 지원하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한편,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에서 유사한 사건이 또 발생할 경우를 상정하고 조선에 군대를 파병할 경우 서로 미리 알린다는 내용의 톈진조약을 체결했다.



건청궁 옥호루의 비극
갑신정변 후 약 10년이 지난 1894년 4월에는 동학 농민군이 봉기를 일으켰는데, 이들이 서울을 향해 북상하려는 기세를 보이자 조선 정부는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 청에 원병을 요청했다. 이에 호응하여 청나라는 아산만의 풍도 앞바다를 통해 군대를 파견했다. 조선에서의 영향력이 청에 밀리던 일본은 전세를 뒤집을 절호의 기회로 판단하고, 10년 전에 청과 맺은 톈진조약을 근거로 내세워 인천·서울 지역에 청보다 더 많은 군대를 파견했다.
이렇게 조선에 들어온 청나라와 일본 군대는 잦은 충돌을 빚더니 급기야 본격적인 전쟁을 벌였고(청일전쟁), 승자가 된 일본은 청을 누르고 동아시아의 새로운 패권자로 급부상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정계의 거물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공사로 파견해 조선 내정에 더욱 깊숙이 간여하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 정부는 내각을 개편하고 200여 개의 법령을 발포하는 등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부문에 걸쳐 대대적으로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노우에는 이런 개혁 정치에 편승해 일본 세력을 조선에 심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1895년 5월의 삼국간섭 이후 조선에서 일본의 위신은 급격히 추락했다. 당시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중국의 랴오둥 반도를 장악했는데, 만주 진출을 꾀하던 러시아로서는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러시아·프랑스·독일 삼국이 이 문제에 간섭해 랴오둥 반도를 중국에 반환하라고 일본을 압박했다. 힘의 열세를 느낀 일본은 랴오둥 반도를 반환했고, 러시아에 대한 불만은 심화되어 또 하나의 어두운 역사인 러일전쟁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처럼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위신이 추락하는 상황을 지켜본 조선 정부는 김홍집 내각을 출범시켜 민씨 세력의 인물을 다시 등용하고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독자적 길을 모색해나가기에 이르렀다. 이노우에 공사의 후임으로 부임한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일본 세력의 퇴조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최대의 걸림돌인 명성황후를 제거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했다. 이것이 바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 곧 을미사변의 발단이었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군 등은 고종과 명성황후가 머무는 건청궁을 습격했다. 미국인 군사교관 다이(Dye)가 지휘하는 시위대가 이를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건청궁에 다다른 일본군 등은 고종과 세자를 위협하고, 이를 저지하려던 궁내부 대신 이경식을 살해했다. 그리고 방마다 샅샅이 뒤져 곤녕전(坤寧殿) 옥호루에서 명성황후를 찾아내 살해하고, 유해를 연못에 던졌다가 다시 끌어내어 건청궁 뒤편 정원의 소나무 숲에서 불태웠다.


대한제국의 탄생과 소멸
명성황후가 일본군 등에 살해된 이후 고종은 일본 세력에 포위된 채 경복궁에서 사실상 유폐 생활을 했다. 그는 자신도 언제 암살당할지 모른다는 불안에 떨었다. 그러던 중 고종은 한성의 수비대가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지방으로 대거 이동한 틈을 타 경복궁을 탈출했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과 세자는 궁녀가 타는 가마에 몸을 숨기고 경복궁을 빠져나와 정동에 있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이를 아관파천이라 한다. 조선에서 일본 세력에 밀리던 러시아는 고종의 이어(移御)를 크게 환영했다.
고종은 1년여 동안 러시아 공사관에 기거하면서 러시아와 미국에 우호적인 인사들로 새 내각을 조직했다. 이 당시 고종은 조선에서 일본 세력이 퍼져나가는 것을 저지하는 한편, 서양 문물을 도입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서재필 등이 한성에서 조직한 독립협회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는 것은 자주독립 국가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행위라 하여 비판 운동을 전개했다. 이에 고종은 1897년 2월 20일에 경운궁으로 이어했다. 왕비가 살해된 경복궁으로는 다시 돌아갈 마음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립협회를 비롯한 관리와 유생들은 경운궁에 거주하는 고종에게 독자적 연호를 제정하고 황제에 오를 것을 요청했다. 고종은 이러한 여론을 받아들여 연호를 광무(光武),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정하고 1897년 10월 12일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환구단에 나아가 천신에게 고제(告祭)를 올린 후, 대한제국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
황제가 된 고종은 대한제국이 근대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개혁 정책을 잇달아 단행했다. 교육과 산업을 육성하고, 서울의 도로와 건물을 개수하며, 전기·전차·전화·철도 등 근대 문명의 이기를 활발히 도입했다. 이러한 근대 문물의 도입과 활용은 서울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세계관을 크게 바꾸어놓았다.
그러나 고종의 개혁은 주체 세력이 미약하고 일본 등 외국 세력의 간섭이 심해 근대국가를 수립하는 데까지는 진행되지 못했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폐멸한 후 환구단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철도호텔을 지었다. 마치 고종과 대한제국이 벌인 자강 개혁의 흔적을 지워버리는 듯했다. 지금 서울 한복판 웨스틴조선호텔 후원에는 황궁우와 석고 등 환구단 부속 시설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고종이 꾼 새로운 꿈과 좌절의 상처 또한 그대로 남아 있다.







글 이상배(서울시사편찬위원회 전임연구원) 사진 제공 서울시사편찬위원회

문서 정보

[서울 600년 역사 기행] 고종 황제의 꿈과 시련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원본시스템 서울사랑 제공부서 시민소통담당관
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16-07-19
관리번호 D0000028036768 분류 기타
이용조건타시스템에서 연계되어 제공되는 자료로 해당기관 이용조건 및 담당자와 협의 후 이용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