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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600년 역사 기행] 경복궁, 조선 최초의 궁궐로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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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외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곳 가운데 하나가 서울의 궁궐이다. 우리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장 직접적이고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유산이 바로 궁궐이니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서울의 궁궐 중에서도 경복궁과 창덕궁을 방문하는 관광객이 제일 많다. 이제 이들 궁궐에서 외국인을 만나는 일은 흔하디흔한 일상이 되었다.



파란만장한 조선왕조의 역사를 대표하는 법궁
현재 서울에는 경복궁을 비롯해 창덕궁·창경궁·경운궁(덕수궁)·경희궁의 다섯 궁궐이 남아 있다. 이 가운데 경복궁은 조선왕조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상징하는 대표적 법궁(法宮)이다. 조선왕조가 한성에 도읍한 이듬해인 1395년에 처음 완성했으니 6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서울의 대표적 역사 유산이다.


이처럼 조선왕조 최초의 궁궐로 조성한 경복궁은 그러나 200여 년이 지난 1592년에 일본이 일으킨 임진왜란 와중에 불타버렸다. 그 후 역대 왕들은 경복궁을 불길한 궁궐이라 여겨 270년 동안이나 폐허로 방치했다.


그렇게 버려져 있던 경복궁은 1868년(고종 5년)에야 중건되는데, 이 대업을 주도한 이가 바로 둘째 아들을 왕(고종)으로 옹립한 흥선대원군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굳이 270년이나 폐허로 버려져 있던 경복궁을 중건하려고 했을까?


흥선대원군은 왕손이었음에도 외척의 등쌀에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우한 시절을 보냈다. 그는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시정잡배들과 어울리는 한편, 왕실의 최고 어른인 조대비(趙大妃)와 깊이 교감해 마침내 자신의 둘째 아들을 보위에 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는 섭정이 되자마자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경복궁 중건에 나섰고, 이는 그동안 안동 김씨 일가가 독식해온 국가 권력의 주도권을 왕실로 되돌리고 싶어 하던 조대비의 뜻이기도 했다.




흥선대원군과 경복궁 중건
흥선대원군은 영건도감(營建都監)을 설치하고 원납전(願納錢)을 거둬들여 경복궁을 다시 세웠다.


그러나 이미 국가 재정이 바닥난 상태였기 때문에 이를 충당하기 위해 고액 화폐인 당백전(當百錢)을 발행해야 했고, 결국에는 이를 남발해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백성들로부터 막대한 세금과 부역을 징발했고, 마침내 1868년 7월 경복궁 중건을 끝냈다. 이로써 경복궁은 총면적 41만9천100m2의 부지에 210채의 전각을 거느린 웅장한 대궐로 다시 부활했다.


궁궐 완공에 맞추어 고종은 대왕대비와 왕대비·대비 세 분을 모시고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옮겨왔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경복궁은 270여 년 만에 다시 정치 무대의 중심이 되었다. 흥선대원군이 무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경복궁 중건 공사를 진행한 것은 오랜 기간 이어져온 세도정치로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고,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곧추세움으로써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기 위함이었다.


고종이 경복궁으로 이어한 후에도 국가 권력은 여전히 운현궁(雲峴宮)의 흥선대원군이 행사하고 있었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자리한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의 사가(私家)로, 그가 개혁 정책을 입안하고 실천한 실질적 통치의 장이었다. 고종은 태어나서 왕위에 오르기 전인 열두 살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게다가 운현궁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식(嘉禮式)을 거행한 경사스러운 곳이기도 했다. 운현궁과 창덕궁 사이에는 고종이 왕래하는 경근문(敬覲門)과 흥선대원군이 왕래하는 공근문(恭覲門)을 별도로 설치했는데, 부자의 긴밀한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흥선대원군 섭정 당시 운현궁 건물도 잇따라 대대적으로 보수해 섭정으로서 그의 권세를 유감없이 자랑했다.


흥선대원군은 10년간 실권을 행사하면서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문벌당색(門閥黨色)을 초월해 인재를 두루 등용하는 등 개혁 정치를 단행했다. 이러한 개혁 정치는 백성들의 여망과 지지를 수렴해 실행한 것이었다. 흥선대원군은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 서양 열강의 침략에 맞서 이들을 격퇴했다. 조선 군대의 잇따른 승리는 흥선대원군의 성가를 한껏 드높였다.


흥선대원군은 1873년(고종 10년) 고종이 직접 정치를 시작하면서 정계에서 물러나 양주 곧은골(直谷)에 은거했다. 그는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을 계기로 정계에 복귀했으나 이내 청나라 군대에 납치되는 신세가 되었다. 이후 천진(天津)의 보정부(保定府)에 3년간이나 유폐되는 비참한 처지에 놓였다가 1885년에야 귀국했다. 흥선대원군은 조선왕조가 근대 세계와 만나 생존의 길을 모색하던 19세기 중반 이후 40여 년 동안 정치적 부침을 거듭하면서 굵은 족적을 남긴 풍운아였다.


일제의 경복궁 파괴 만행
흥선대원군에 의해 어렵게 중건된 경복궁은 조선이 나라를 잃어버리면서 다시금 일본인들 손에 의해 산산조각 파괴되는 운명을 맞았다. 1895년 일본군 등이 경복궁에 침입해 옥호루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른 후, 고종이 다시 정무를 보기 위해 돌아온 곳은 경복궁이 아니라 경운궁이었다. 고종의 머릿속에는 경복궁은 불길한 궁궐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 후 십수 년동안 국왕은 경운궁에 거처했고, 그사이 경복궁은 방치되어 점차 잡초가 무성한 퇴락한 궁궐로 변해갔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자마자 조선왕조의 권위를 상징하는 궁궐 파괴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빈 궁궐로 남아 있던 경복궁이 첫 번째 대상이었다. 1911년부터 경복궁을 차지한 조선총독부는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0일까지 50일 동안 경복궁에서 이른바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열었다. 조선총독부가 조선에서 얼마나 선정을 베풀었는가를 선전하는 박람회였다. 조선총독부는 경복궁 안에 광대한 박람회장을 설치한다는 구실로 근정전 앞의 흥례문 일곽을 헐어버린 것을 비롯해 수많은 전각을 헐고 그 부지를 파헤쳤다.


이때 철거한 경복궁 전각들의 목재와 초석 등은 일본인의 사원이나 민가를 짓는 데 사용했다. 황태자의 거처였던 동궁(東宮) 자선당은 일본인 재벌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가 뜯어다 도쿄 한복판에 자리한 자기 집 정원에 복원하고 조선관(朝鮮館)이라는 이름을 붙여 박물관으로 삼았다. 이 건물은 1923년의 관동대지진 때 불타버리고, 주춧돌만 남아 1995년 경복궁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불을 먹어 쓸 수 없는 지경이 된 상태였다.


일본은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가 끝난 직후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건립하기로 결정하고, 1916년에 공사를 시작해 1925년에 준공했다. 결국 조선물산공진회를 핑계로 경복궁 전각을 헐어버린 것은 처음부터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기 위한 사전 포석이었던 셈이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연면적 3만1천700m2에 이르는 5층짜리 르네상스식 석조 건물이었다.


조선총독부 청사를 건립하는 과정에서 경복궁 내 전각 19채, 대문과 중문 22개, 당우(堂宇) 45개 등 늠름하고 아름다운 건물들이 또 파괴되거나 해체되었다. 심지어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조차 조선총독부 청사 완공과 때를 같이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다른 민족에게 멸망당한 왕조의 궁궐은 이처럼 비참한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아물지 않는 광화문의 상처
조선총독부 청사가 완공된 후 그 앞에 놓인 광화문은 일본인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조선총독부는 광화문이 위풍당당한 총독부 청사의 시야를 가린다는 이유로 광화문을 아예 헐어버리려고 했다. 이에 맞서 일본의 문화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등은 조선 건축 예술의 정수인 광화문을 헐어버리는 데 반대한다는 논설을 발표했다. 일본이 조선의 위대한 문화유산인 광화문을 훼철하는 것은 우방을 위해, 예술을 위해, 역사를 위해, 도시를 위해, 특히 조선 민족을 위해 해서는 안 될일이라는 것이었다. 동아일보 등 한국인이 발행하는 신문들도 가련한 처지에 놓인 광화문을 애도하는 기사를 실었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광화문을 부숴 없애는 대신 경복궁 동쪽 담벼락 일각으로 옮 겨 세웠다.


이어 일제는 옛 광화문 자리에 조선총독부 광장을 만들었다. 조선총독부는 이 광장에서 식민지 지배 정책을 선전하거나 식민지 백성들을 동원하는 각종 옥외 행사 등을 거행했다. 이를테면 중일전쟁 이후 조선총독부가 많은 한국인을 만주로 이주시킬 때 이곳에 한국인 간부들을 모아놓고 만주의 개척자가 되라고 다그쳤다. 이와 같이 일본은 조선을 상징하는 경복궁을 집요하게 파괴하고, 또 이곳에 식민 통치를 위한 총독부 건물을 지음으로써 한국인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았다.


1917년에는 창덕궁 내전 일대에 큰 불이 나서 대조전 등이 불타버리는 사고가 있었는데, 일제는 조선 총독부를 지을 때 헐어낸 경복궁 강녕전과 교태전을 비롯한 전당 10여 채의 목재를 옮겨다 불타버린 창덕궁 희정당과 대조전을 다시 짓는 데 사용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창덕궁에 머물고 있다는 핑계였다.


이어 1929년 조선총독부는 경복궁에서 대규모 조선박람회를 개최하면서 다시 건청궁 등의 전각을 다수 헐어버렸다. 건청궁은 명성황후가 일본군 등에게 살해당할 때 고종이 거처하고 있던 비운의 장소이기도 했다. 조선총독부는 1939년 이곳에 미술관을 지었다.


일제가 경복궁을 철저하게 훼손함으로써 해방될 때까지 살아남은 경복궁의 건물은 근정전과 경회루뿐이었다. 한때 수천 명이 생활하던 경복궁은 그렇게 폐허가 되었고, 해방 이후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복원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제 겨우 전체 궁궐의 3분의 1 정도만 복원했을 뿐이다.
이처럼 경복궁에는 아직도 일제 식민 지배의 상처가 짙게 남아 있다. 그런데 허황된 망상에 빠져 인근 국가와 백성들을 한없는 도탄에 빠뜨리고 인류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철저히 파괴한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이 최근 과거사를 반성하기는커녕 재무장을 서두르고 있다는 소식이 연일 매스컴을 장식하고 있다. 이들에게 역사를 직시하거나 반성하라고 주문하기 이전에 우리 스스로 경복궁에 새겨진 과거의 아픈 상처를 확인하러 나서보는 것은 어떨까. 진부한 말이지만 역사는 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에게 되풀이되는 속성이 있다니 말이다.

*12월호에는 을미사변의 비극과 고종 황제 즉위에 대한 내용을 싣습니다.
그 당시 서울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역사적 사건이니까요.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둘러싼 이야기와 고종이 아관파천 후 대한제국을 선포하게 된 과정을 중심으로 다룰 예정입니다.





글 이상배(서울시사편찬위원회 전임연구원) 사진 제공 서울시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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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1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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