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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서울 기행] 구로구, 시커먼 공장 연기 대신 기술과 예술이 피어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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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초이자 최대의 수출 전진 기지이던 구로공단은 1960~1970년대 대한민국 고도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똑똑히 해냈다. 그런 구로구가 스마트한 빌딩이 들어선 최첨단 디지털단지로 거듭나고 있다. 또 단지 내에 예술가들이 둥지를 틀면서 문화·예술 공간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시커먼 연기를 내뿜는 공장으로 상징되던 구로구가 기술과 예술이 어우러진 첨단 도시로 환골탈태하고 있는 것이다.



<구로 아리랑>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작가 이문열의 1987년작 동명 소설을 각색한 영화다. 박종원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1989년 개봉한 이 영화는 최민식, 신은경, 옥소리 등이 출연해 당시 노동 밀집 지역이던 구로공단에서 노동자들이 겪는 비참한 현실을 리얼하게 묘사하고, 공단 부근의 노동자들과 노사 간의 갈등이나 분쟁 등 사회문제에 정면 도전해 주목받았다.


문제는 이 영화가 당시 공연윤리위원회에서 무려 21곳이나 가위질을 당했다는 점이다. 원작이 운동권 학생들의 필독서였고, 1987년 민주화로 각종 사회문제가 자유롭게 공론화된 시점이었음에도 영화에서 노동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엔 시기상조였기 때문이다.


고도성장과 인권유린 공존 현장
작가는 왜 노인 아홉 분이 장수한 데서 유래했다는 ‘구로(九老)’라는 아름다운 지명을 따 노사 분쟁 이야기를 만들었을까? 그건 아마도 구로가 지닌 태생적 명운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구로공단’이라는 약칭으로 불려온 한국수출산업공단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64년 제정한 수출산업단지개발조성법에 따라 총면적의 90%가 국유지이던 구로 지역 일대를 국가 산업 단지로 조성했다. 1965년 1단지 착공을 시작으로 1973년 3개 단지 200만㎡의 대규모 산업 단지가 준공된 것이다.


대한민국 최초이자 최대의 수출 전진 기지이던 구로공단은 1960~1970년대 대한민국 고도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똑똑히 해냈다. 섬유·봉제·전자 공장에 가발 공장까지 우후죽순처럼 들어섰고, 삼성그룹의 모태인 삼성물산의 섬유 공장도 구로동에 자리 잡았다.


구로공단의 존재 의미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제1회 한국무역박람회를 들 수 있다. 1968년 9월 당시 연간 수출이 1억 달러 남짓이었을 시기,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이 수출 드라이브를 위해 첫 무역 박람회를 구로공단에서 개최한 것이다. 심지어 관람객의 편의를 위해 경부선 노선에 박람회역(현 금천구 가산동 수출의 다리 인근)이라는 임시역까지 개설했을 정도였다.


최전성기이던 1978년 대한민국 전체 수출액의 10%가 구로공단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니 그 규모를 대략 짐작할 만하다. 당시 구로공단의 노동 인력이 무려 11만4천 명이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노동자가 14세 이상 여성이다 보니 스스로의 권익 보호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적정 근로시간 준수는 고사하고 잠 쫓는 각성제를 먹고 밤샘 근무를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작업반장이 몸수색이나 성추행을 하는 등의 인권유린도 비일비재했다. 설상가상으로 박봉의 급여마저 업주가 고의 체불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자신들의 권익에 눈뜬 근로자들이 도시산업선교회나 운동권 학생 등 외부 세력과 연합해 노동운동을 벌이기라도 할 양이면 당국에 의해 저지당하거나 체포되기 일쑤였다.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학생 시절 위장 취업해 노조위원장을 지낸 도루코공업도 구로공단에 있었다. 이러한 연유들로 구로공단은 고도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한 동시에 인권 사각지대였다는 야누스적 감성으로 다가온다.


▲ 쾌적한 생활환경의 구로구 전경


구식 공단에서 첨단 단지로
구로공단은 노동 집약형 산업의 경쟁력이 저하되면서 공장들이 지방이나 중국·동남아 등으로 이전하자 공동 현상을 일으켰다. 2000년 구로공단은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일명 G밸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노동 집약형 산업으로부터 탈피해 첨단 정보 산업으로 체질을 개선하지 않고는 21세기에 존립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그 후 옛 구로공단이 환골탈태하고 있다는 소식은 간간이 들었지만 현장을 확인할 기회는 없었다. 그러다 얼마 전 고교 동창이 경영하는 업체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반도체 설계를 하는 그 업체는 원래 여의도 중소기업협동중앙회 건물에 있었다. 그런데 코스닥에 상장하고 회사를 확장하다 보니 넓은 공간이 필요했고, 또 유사 업종이 한데 모인 곳이 좋을 것 같아 디지털단지(G밸리)로 옮겼다고 했다.


고층 빌딩의 한 층을 모두 사용하는 사무실은 예전에 비해 훨씬 쾌적했으며, 무엇보다 공단의 전체 분위기가 산뜻했다. 예전에 시커먼 연기를 내뿜던 공장 굴뚝은 사라졌거나 가동을 멈췄고, 대신 날렵한 몸매의 마천루들이 키 겨룸을 하고 있었다. 조금 과장한다면 미국 실리콘밸리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G밸리는 경인선·경부선 간 교통축의 결절지일 뿐 아니라 지하철 2호선과 7호선, 남부순환로가 통과하고 영등포 부도심권에 속해 있어 대도시 입지에 유리한 첨단 기술 단지가 발전하는 데 유리한 여건을 갖추고 있다.


통계청의 통계에 따르면 작년 G밸리(금천구 포함)를 통해 14조 원의 부가가치가 창출됐고, 수출도 28억 달러를 달성했다. 1만여 개 입주 업체, 15만 명의 노동자가 이룩한 실적으로는 상당히 양호한 편. 그러고 보니 이곳은 지금도 수출의 전진 기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인권유린이 비일비재하던 노동 집약형 잿빛 공단에서 쾌적한 기술 집약형 첨단 산업 단지로 진화한 것은 우리 사회의 변화만큼이나 경이로운 사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 TOKA예술공장의 작품들. 구로공단 제1단지에 화가들이 둥지를 틀어 예술 공간을 만들었다.


공단 한복판의 ‘창작 공장’
여기에 희망을 더하는 변화가 있으니 구로공단 제1단지이던 곳에 화가들이 둥지를 튼 것이다. 60년 역사의 삼화인쇄에서 대각선상에 있는 오닉스시스템(CCTV 제조업체) 3층. ‘TOKA예술공장’이라는 팻말이 걸린 이곳은 화가 10명이 모인 창작 공방이다. 5평 남짓한 공간엔 판타지풍 그림을 그리는 20대 여성 작가부터 집적회로 등 전자 제품 부속이나 전깃줄 등으로 형상화한 설치물을 만드는 50대 작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취향의 작품이 창작되고 있다. 월 임대료는 단돈 20만 원. 주머니 사정이 빈약한 화가들에겐 낙원 같은 공간이다.


그 자신이 화가이면서 1년 전 예술 공장을 시작한 조석진 대표는 “단순히 작업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출범한 게 아니다. G밸리에 입주한 벤처기업들에는 문화의 향기를, 작가들에겐 작품을 창작하고 판매할 기회를 주기 위한 메세나 소통의 근거지로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매년 10월 오픈 하우스 행사를 통해 G밸리 입주 기업들과 만나고 있다.


이제 G밸리를 나와 가리봉동으로 간다. 가리봉동! 1960~1970년대에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던 노동자들의 숱한 애환을 품고 있는 벌집촌이 53층 고층 빌딩으로 탈바꿈한다는 장밋빛 청사진만 안고 퇴락한 채 세월을 보내는 사이, 이곳엔 어느새 조선족 거리가 들어섰다. 가리봉종합시장조차 ‘동포타운’이라는 별칭을 붙인 채 동포 손님을 호객하고 있다.


▲ TOKA예술공장 전경


표지석으로 남은 주막거리 객사
이제 구로구의 유서 깊은 곳을 찾아 나섰다. 오류2동 경인로 변 동부제강과 동부제강 사원연수원 사이에 당도하면 ‘주막거리 객사’라는 표지석이 나그네를 반긴다. 이곳은 경인선 철도가 개통하기 이전 한양과 제물포를 왕래할 때 관원들이 쉬거나 숙박하며 머무르던 곳이다.


철도 개통 전, 100리 길인 한양과 제물포를 내왕하려면 중간인 오류동에서 쉬어 가거나 점심을 먹기도 하고 바쁘지 않은 여행객은 숙박을 하고 가기도 해 주막이 필요했다. 그런 까닭에 항상 여행자로 붐비던 오류동에 자연스레 주막거리가 생긴 것이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주막거리 객사였는데, 이곳엔 1930년대까지 일본인 고미네(高峰)가 살았다고 한다. 고미네는 조선 말에 활동한 일본인 첩자로 일제강점기의 동양척식회사 관계자로 알려져 있다. 사람의 내왕이 잦은 곳에서 각종 첩보를 수집해 보고한 것으로 추정한다. 한때 이 집은 개성에 있던 전국의 무당 본부를 옮겨왔다가 여론이 좋지 않자 서울로 이전해가기도 했다.


▲ 올해 말 완공되는 국내 최초의 돔형 야구장


반정공신 류씨 종중 묘역
주막거리 객사터를 떠나 경인로를 따라 계속 가다가 성공회대학교 못미처 야산에 당도하면 거대한 묘역이 나온다. 오류동 산 43번지 일대 8천 평 규모의 야산이 조선조 중종반정(中宗反正) 3대 공신 중 한 명인 진주 류씨(晋州柳氏) 류순정(柳順汀)과 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 부부 묘역이다. 여기에 아들 류홍(柳泓) 묘역 그리고 후손 5대(류사필·류준·류중광·류식·류순) 묘 등 총 7대 8기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원래 이 묘역은 반정공신으로 영의정을 제수받은 류순정이 1512년(중종 7년) 53세로 숨지자 중종이 지금의 오류동과 온수동 일대 및 경기도 부천시 여월동, 작동에 이르는 약 300여만 평을 하사하면서 조성됐다. 역시 정국공신 4등에 책록된 아들 류홍의 묘는 류순정의 묘역에서 서남쪽으로 80여m 떨어진 곳에 자리한다. 류순정·류홍 부자 묘역은 서울 유일의 부자(父子) 2대 공신2묘역이다. 묘역 내 석물 또한 매우 정교하고 생동감 있는 조각기법과 강한 개성을 보여주고 있다.


궁동 이름 유래된 정선옹주 자택
류씨 묘역을 나와 오리로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궁동저수지 생태 공원이 나온다. 옹기 조각으로 쌓은 타원형 단 위에 재미있게 꽂힌 솟대를 지나면 호화스러운 묘역이 눈에 들어온다. 조선 선조의 일곱째 딸 정선옹주(貞善翁主)의 묘역이다. 정선옹주는 안동 권씨 권대임(權大任)과 혼인한 후 지금의 구로구 궁동 67번지 일대에서 궁궐 같은 기와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궁동(宮洞)이라는 명칭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


안동 권씨 집안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권철(權轍)과 그의 아들로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의 대공을 세운 도원수 권율(權慄)이 있다. 묘역에는 정선옹주와 남편 권대임의 묘를 비롯해 여러 기의 후손 무덤이 자리 잡고 있다. 말하자면 안동 권씨 문중묘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은 풍수가들이 명당 중 명당으로 꼽는 곳이다. 궁동 북쪽 끝 와룡산을 주산으로 동쪽으로 뻗어 내린 줄기가 좌청룡을 이루고, 와룡산 서쪽으로는 궁동 서부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가 우백호를 이룬다. 주산에서 좌우로 뻗어 내린 산줄기의 한가운데를 다시 짧은 산줄기가 남쪽으로 뻗었고, 그 끝에 저수지가 있다. 고추처럼 생긴 그 산줄기가 낮은 언덕을 이룬 곳이 궁동 한복판이다. 이 지형이 바로 풍수지리설에서 ‘금닭이 알을 품은 형국’, 즉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인 것이다. 고추 모양의 언덕 끝 부분에 안동 권씨 문중묘가 있으니 명당 중 명당 아닌가!


▲ 궁동저수지 생태 공원


서울의 마지막 집성촌이 자리한 궁동
궁동 얘기가 나왔으니 하나만 더 짚고 넘어가자. 이곳엔 전의 이씨(全義李氏) 집성촌이 있다. 서울에 웬 집성촌? 하지만 사실이다. 그것도 서울의 마지막 집성촌이다. 궁동 매봉산 아랫마을은 고려 개국공신 이도(李棹)를 시조로 하는 전의 이씨 30여 가구가 오순도순 모여 살고 있다. 11대손 이문간(李文幹)이 1360년 공민왕으로부터 약 100㎡(30만 평)를 하사받은 터에 자리 잡은 이래 20대를 이어왔다. 이곳엔 아직도 예전 풍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친척 간에 촌수를 철저히 따지는가 하면, 시집온 새 신부는 마을 곳곳에 인사를 다녀야 한다. 친척들의 대소사를 꼼꼼히 챙기는 것도 이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도시화로 대부분의 집성촌이 해체됐지만 궁동에서 전의 이씨 집성촌이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이곳이 개발제한구역이었기 때문이다. 뛰어난 자연경관 때문에 2005년까지 시계경관지구로 묶여 개발이 제한됐다. 그린벨트가 남긴 망외의 소득이다. 가문에 대한 자부심도 집성촌 유지의 원동력이다. 이들은 세종대왕이 하사한 가훈을 아주 소중하게 여긴다. ‘가전충효세수인경(家傳忠孝世守仁敬)’. 나라에 충성하고 어버이에게 효도하며 사회에서는 인자하고 어른을 공경하라는 뜻이다.


이렇듯 집성촌을 이루다 보니 자연히 가문도 번성했다. 조선 시대 문과 급제자 178명, 대제학 1명, 청백리 6명을 배출했다. 을사늑약 체결 후 자결한 대한제국 외교관 이한응, 수필 ‘딸깍발이’의 저자 일석(一石) 이희승, 가수 이문세도 전의 이씨다. 정선옹주의 부군 부마도위 권대임의 후손인 안동 권씨도 집성촌을 이뤄 10년 전에 30가구가 살았지만 지금은 4가구만 남았다. 이 마을이 앞으로 주민 참여형 도시 재생으로 거듭나게 된다. 기존 주택의 형태는 그대로 두되, 담벼락 등을 주민과 구로구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 참여하는 공공 미술 프로젝트로 꾸미고, 예쁘게 디자인한 CCTV를 설치하는 등 사람 냄새 나는 마을로 탈바꿈할 예정이다.


+ 칙칙하던 공단이 그윽한 문화·예술 도시로
구로구를 돌아보면서 느낀 점은 칙칙한 공단에서 문화 · 예술의 향기가 그윽한 도시로 변모했다는 것이다. 앞서 찾아본 TOKA예술공장 말고도 다양한 문화 · 예술 공간이 관내에 즐비하다. 신도림역 지하에 있는 예술 공간 ‘고리’는 주민들이 악기를 연주하거나 공예품을 만드는 공간으로 항상 북적인다. 공연장이 척박하던 곳에 2008년 구로아트밸리 예술극장을 설립한 것도 주민의 문화 접근성을 높인 사례다.


구로구는 ‘동네 북 카페’로 불리는 작은 도서관이 많은 곳으로도 이름나 있다. 2004년부터 아파트 단지 내 버려진 창고나 경비실 등에 설치하기 시작한 북 카페는 현재 70여 곳. 구로구는 출판사와 도서 도매상의 협찬을 받아 매년 도서 8천여 권을 이곳에 공급하고 있다.


지난 4월 23일엔 문학 분야의 경사가 있었다. 구로문인회의 숙원인 문학의집(일명 詩공장)이 오류동에 개관한 것. 문인들이 모여 시도 짓고 소설도 쓸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것이다. 무엇보다 2010년 5월 문화 · 예술의 본산인 한국문화 · 예술위원회(ARKO)를 동숭동 대학로에서 구로동으로 이전 · 유치함으로써 문화 · 예술 인프라를 더욱 공고히 구축한 것이 쾌거라면 쾌거다. 여기에 고척동에 짓고 있는 국내 최초의 돔형 야구장이 올해 말 완공되면 스포츠 인프라까지 완비하는 셈이다.





글 윤재석(언론인) 사진 나영완 일러스트 문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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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서울 기행] 구로구, 시커먼 공장 연기 대신 기술과 예술이 피어오르다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원본시스템 서울사랑 제공부서 시민소통담당관
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16-07-19
관리번호 D0000028036675 분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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